우당탕탕 미국 의료 시스템 적응기
지금 잡아야 해. 그래도 6개월은 걸려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우연찮게 만난 한국분이 해주신 말씀이었다. 패밀리 닥터, 즉 '주치의' 예약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흔치 않은 개념인 '주치의'. 솔직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재벌들이나 정치인이
"주치의 지금 바로 들어오라고 해"
이럴 때만 들어봤던 단어.
6개월이 지난 지금, '주치의'를 잡아서 첫 미팅까지 마친 내가 생각해 본 결론은,
1. 있으면 좋다
2. refer가 쉽다 (주치의가 없이 본인이 스스로 예약하려고 한다면, 한 두 달 대기는 기본인 듯)
- refer란 주치의가 우선 진료를 본 뒤,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닥터 오피스로 연결해 주는 시스템!
- 단, refer를 해줘도 당일은 절대 안 됨. 2주 안에 된다는 분들도 있고, 한두 달 기다리는 분들도 있는 듯
3. (내가 만약 어른이라면) 없어도 문제는 없다
- 아프면 urgent care 가면 되고(당일 진료가 가능하기 때문!)
- 여기서 어른들은 그냥 웬만하면 참는다
- 크게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나름 대형 병원인 곳의 패밀리 닥터를 잡으려고 하니, 제일 빠른 예약이 6개월 후라고 했다. 그래서 일단 미국 의료 시스템을 잘 몰랐던 나는, 패밀리 닥터 예약을 우선 잡았다. 그 사이 우리는 아기가 생겼고, 다행스럽게도 임신과 관련된 산부인과 진료는 몇 달씩 대기하지 않고, 최소 2~3주 안에 예약을 잡아주어 산부인과 담당의는 따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산부인과 담당의는 아기를 출산한 뒤에 내 주치의로 지정하지 않은 이상, 다시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주재 기간 동안 출산 후 혹시나 아플 수도 있고, 또 일 년에 한 번씩 regural check, 즉 건강검진을 진행하기 위해(보험으로 커버된다고 한다) 패밀리 닥터 예약을 취소하지 않고, 6개월을 대기한 뒤, 의사를 만났다.
내가 만난 의사는 아주 젊은 닥터였고, 진료실에 들어오자 말자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는 산부인과 진료 기록을 살펴본 뒤, 한국에서 진행했던 건강검진 기록을 제출해 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지금 임신 중이라 regural check는 아기가 태어난 뒤 하고 싶다는 말에, 어차피 지금 예약해도 또 5~6개월은 대기해야 한다고 말하며 웃어주었다. 역시 대기의 나라. 하하.
대신 그는, 산부인과는 출산 후 산후 검진 외에 더 이상 가지 않으니, regular check 때 여성과 출산 관련 검진도 꼼꼼하게 챙겨주겠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리고 현재 나의 상황과 관련해 refer가 필요한 과가 있는지 확인해 주었고, 필요하다면 예약을 한 뒤 자신과 진료를 보고 refer를 요청해 주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패밀리 닥터를 만나기 전, 나는 많은 고민을 했었다. 지금 다니는 산부인과와 아기가 태어난 뒤 다닐 소아과를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나는 어른인데 참으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평생 미국에 살 것도 아닌데 고작 몇 년 때문에 패밀리 닥터를 또 알아봐야 할까. 참 많은 고민이 되었다.
그래서 주변에 패밀리 닥터를 한 사람들을 수소문해 보았더니,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패밀리 닥터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몇 년 뒤에 돌아갈 주재원 가족들은 자녀들의 소아과 주치의만 지정하고, 본인들은 urgent care나 급한 경우 ER을 방문하는 것 외에는 굳이 패밀리 닥터를 잡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영주권을 갖고 사시는 분들도, 자녀가 없는 경우, 굳이 패밀리 닥터를 잡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또, 한국에서 받던 진료를 미국에서 이어서 받아야 할 경우에 있는 분들. 미국 보험으로 regular check를 받아봐야겠다고 판단한 분들. 나이가 있으신 어른들. 미국에 오래 거주할 예정인 분들 등. 이런 분들은 패밀리 닥터를 잡고 혹시 모를 상황에 refer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대비하는 것 같았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했던가. 미국 의료 시스템의 1도 모르던 내가, 주변에서 해준 말에 그냥 패밀리 닥터를 잡게 되기까지. 없으면 뭐 어쩔 수 없지만, 예약을 잡아놨던 것이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 보면 주재 기간 동안 남편과 나에게 또 하나의 보험이 되어줄 수 있을 거라는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또,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조금씩 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