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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래몽상가 Jan 07. 2024

조선의 못난 개항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했고, 조선은 허송세월을 보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조선의 개항과 근대화가 일본보다 늦은 이유를 외부에서 많이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조선 내부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 개혁과 근대화를 추진할 정책 입안과 실행능력의 부족, 성리학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사상적 편견, 인재등용과 관리의 실패 등을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고종이 즉위하던 1863년 이전의 조선 시대는 순조-헌종-철종에 이르기까지 소위 세도정치로 인해 국가재정과 민생이 피폐해지고 정치권력은 부패와 타락의 절정을 달리던 시기였다. 순조 때는 안동 김씨, 헌종 때는 풍양 조씨, 철종 때는 다시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면서 삼정(三政)의 문란이 있던 시절이었다.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하응)이 외척세력의 정치개입을 철저히 차단하며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배경이 되었다.


 일본 막번체제의 기본골격은 천황-막부(쇼군)-(다이묘)이다. 막번은 쇼군(장군)이 통치하는 막부와 지방 영주인 다이묘가 관리하는 번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천황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상징적인 존재였고, 실질적인 권력은 중앙 정부 격인 막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막부의 수장을 쇼군이라고 불렀다. 번은 1871년 이후 지금의 44개 현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 우리나라의 8도에 해당한다. 번을 다스리던 지방 영주를 다이묘라고 불렀다. 사무라이로 알고 있는 무사들은 쇼군과 다이묘를 호위하면서도 문관의 성격이 있어서 막번의 행정을 보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의 핵심세력들이 바로 무사 출신이면서 정계에 진출한 인물들이었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청(淸)나라가 영국에 패배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에 휩싸였던 일본에게도 서구세력의 야욕이 엄습을 하게 된다. 서구세력의 아시아 진출이 빈번해지자 막부에서는 개항을 결정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사회적 혼란이 잇따랐다. 특히, 무사 계급과 막부에 불만을 품고 있던 지방의 다이묘들은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워 개항을 결사반대했다. 그러나, 서양문물의 위력을 실감한 존왕양이파는 입장을 바꿔, 적극적인 개항을 하는 것만이 일본의 부국강병을 위한 길임을 깨닫게 된다. 결국 1867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통해 모든 권력을 천황에게 이양하고, 1868년 일본제국 수립을 선언하면서 메이지 유신을 단행해 일본의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이 책의 각 장별 주요 내용은 제목과 목차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슷한 근대화 시기에 왜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했고, 조선은 실패했는지를 비교해 가며 기술하고 있다. 조선과 일본의 뚜렷한 차이를 알 수 있는 주요 사건과 인물들 위주로 책의 내용을 요약해 보았다.


 1차 아편전쟁(1840~1842)에서 중국이 영국에게 패배하고 불평등 조약인 난징조약(1842, 南京條約)을 맺은 뒤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고 5개 항을 개항하는 모습을 보며 일본은 긴박한 위기감을 느낀다. 일본은 청나라와 네덜란드 선박을 제외한 모든 외국 선박은 무조건 포를 쏘아 격퇴한다는 이국선타불령을 1825년부터 시행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1842년 난징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은 이국선타불령을 즉시 철회한다. 반면 조선은 2차 아편전쟁(1856~1860) 때가 되어서야 위기감을 느낀다. 조선은 명나라를 섬기고 청나라는 배척한다는 숭명배청(崇明拜聽)의 이데올로기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2차 아편전쟁에서 베이징이 점령당하고, 청나라의 황제가 피난을 가는 등 서유럽 열강들에 의해 세계의 중심으로 알고 있던 중국이 처참히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조선은 숭명배청의 정신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일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등에 떠밀려 100m 달리기 시합에 나간 초등학생이 조선이었다면, 일본은 충분한 준비운동을 한 국가대표가 시합에 나선 것이었다. 더군다나 일본은 준비된 선수들이 꾸준히 양성되었고, 천황의 지원으로 지지층을 넓혀갔지만, 조선은 선수 교체를 너무 자주 했던 것이 실패의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일본에 메이지 유신을 논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인물과 장소가 있다. 요시다 쇼인(1830~1859, 29세)과 조슈 번(지금의 야마구치현)에서 그가 운영하던 사설 교육기관인 쇼카손주쿠이다. 요시다 쇼인은 안세이 대옥으로 인해 비록 2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문하생들은 이후 정계에 대거 진출하면서 메이지 유신을 성공으로 이끌고 일본 근대화를 주도하였다. 하급 무사 출신인 요시다 쇼인은 1850년 서양의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규수로 유학을 떠났고,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개항을 압박하자 해외 유학을 결심해 미국 함선에 올라타 밀항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하기도 했다. ‘해외 도항 금지’라는 나라의 법을 어긴 죄로 옥살이를 하던 1854년에 요시다는 <유수록>을 집필한다. <유수록>앞으로 일본이 지배하고 통치해야 할 영토를 제시하고 있는데, 약 90년이 지난 1945년 일본이 실제로 지배하고 있범위와 거의 일치했다고 한다. 특히, 현재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지역들 모두 요시다 쇼인이 언급했던 지역과도 일치한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 개항의 원인을 국력이 약해졌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래서 서양의 기술과 문물을 배워서 을 길러 서양 열강들과 대등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국가전략으로 제시했다. 서양에게서 빼앗긴 것은 조선 등 아시아의 약소국에서 되찾아 오면 된다는 소위 정한론(征韓論)과 제국주의의 선구자가 요시다 쇼인인 셈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쾌하고 불편한 진실이지만, 일본 입장에서 보면 요시다 쇼인은 국가전략을 제시하고 제자들을 통해 자신의 뜻을 실현한 혁명가이자 일본판 산업혁명인 메이지 유신의 스승인 셈이다. 지금까지도 일본 우익세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운영했던 교육기관인 쇼카손주쿠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가 되었다.

요시다 쇼인(왼쪽)과 후쿠자와 유키치(왼쪽)

 요시다 쇼인과 함께 일본 근대화의 사상가로 유명한 인물은 후쿠자와 유키치이다. 일본 지폐에도 등장하는 인물로 개화사상을 지식인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뿌리내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집필한 <서양사정>은 20만 부 이상이 팔렸는데 당시 일본 인구가 3,500만 명이니 160명 중 1명꼴로 읽은 셈이다. 우리나라 성인들의 독서량과 비교해 보면 그 당시 일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자 그를 찾는 문하생들이 늘어났고, 지금의 게이오대학의 전신인 게이오기주쿠를 개설해 서양 학문과 근대사상을 전파하였다.


 요시다 쇼인만큼이나 조선의 근대화에 사상적 영향을 미친 인물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 1807~1876)를 꼽을 수 있다. 박규수는 1869년에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으로 부임하면서 북촌 사랑방 모임을 통해 개화사상을 전파했던 인물이다. 사랑방 모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과 조선 최초의 미국 유학파인 유길준, 친청 노선을 걸었던 김윤식, 친일노선을 선택한 김홍집 등이 있다. 특히 김옥균과 박영효는 일본 유학 시절 일본 개화기의 계몽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규수(왼쪽)와 오경석(오른쪽)

 박규수가 개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계기는 1861년과 1872년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이다. 그러나, 박규수에 앞서 조선에서 가장 먼저 개화사상을 형성한 사람은 오경석이었다. 박규수와 마찬가지로 오경석도 중국이 서양 열강의 침략에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고, 위기극복을 위해서는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오경석은 박규수가 한성판윤으로 부임되자 청나라에서 구입한 서양 책들로 개화사상을 교육함으로써 일대 혁신을 일으키고자 제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박규수의 북촌 사랑방 모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박규수는 1877년에, 오경석은 1879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개화의식의 발전과 확산은 그다음 세대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시절은 쇄국을 강조하던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더 불행했던 것은 고종의 일관성 없는 선택과 이로 인한 개화세력에 대한 토사구팽이었다. 최익현의 상소로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1874년부터 고종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고종 옆에는 명성황후(민자영)의 친척인 민씨 세력들이 버티고 있었다.


 마카이벨리는 <군주론>에서 용병은 절대로 일치단결되지 않으며 야심만 가득하고 규율도 없고 배반할 가능성도 크다며 용병의 위험성을 강력히 경고했다. 비록 조선이 고용한 용병은 아니었지만, 자국 군대를 강하게 키우지 않고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내부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고종과 민씨 세력의 선택은 마키아벨리의 경고를 철저히 무시한 결정이었다. 갑신정변(1884)이 3일 천하로 실패하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홍영범 등은 외국으로 망명을 하거나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특히 김옥균은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었으나, 갑신정변이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고종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홍종우(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에 의해 암살된다. 조선으로 송환된 김옥균의 시신은 고종의 승인하에 능지처참형을 당한다. 서광범은 일본으로 도피 후 미국으로 망명했지만, 조선에 남아있던 그의 일가족은 모두 처형당했다. 갑오개혁(1894)을 주도했던 김홍집의 최후 역시 매우 비참했다. 김홍집은 1880년 일본의 근대화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아 고종에게 신사유람단 파견을 건의하여 실행시킨 인물이었다. 또한, 고종에게 <조선책략>을 소개하면서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대비한 국가전략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을미사변으로 반일감정이 고조되자 친일내각이었던 당시 조정은 곤경에 빠지게 된다. 결국, 고종은 아관파천을 통해 친러내각을 구성하고, 김홍집을 포함한 내각의 대신들을 체포하라는 칙령을 내린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김홍집은 일본군이 있는 곳으로 피신하라는 수행원들의 권유를 무시하고 스스로 성난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결국 백성들의 돌에 맞아 죽는다.

갑신정변 개화파 인물들

 일본은 개혁세력의 사상을 지지해 주는 대중의 폭넓은 지지가 있었던 반면, 조선은 오랫동안 뿌리내린 중화사상과 유교에 대한 사상적 경로의존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지식인들에 의해서만 개혁을 시도했던 것이 가장 큰 차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당시 패권국인 영국과 미국을 보며 개화를 한 일본에 비해, 조선은 이제 걸음마 단계에 있던 일본을 통해 근대화를 벤치마킹했던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실패의 원인으로 보여진다. 가장 아쉬운 점은 고종의 일관되지 않은 정책개혁을 추진했던 세력들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무능함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변동이 있지 않은 한 주변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돌아보며 끊임없이 반성하고 성찰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더욱 절실해질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런 지식인들의 통렬한 비판을 경청하고 이를 토대로 미래전략을 수립하여 지속가능한 실천을 행하는 리더십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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