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지 않는 나약한 양심에 대한 반성
이 책은 매우 얇지만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께는 얇지만 묵직한 울림을 주는 책이다. 소설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연을 맡았던 킬리언 머피(Cillian Murphy)가 제작과 주연을 맡았다. 킬리언 머피는 아일랜드 출신 배우이다.
이 소설은 아일랜드에서 실제로 있었던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타락한 여성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수녀원에 감금시키고 강제 노역을 시키던 수용시설이었다. 1996년까지 아일랜드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운영되었다고 한다.
소설 속 주인공 빌 펄롱은 어린 시절을 엄마랑 둘이서 보냈다. 아빠는 누구인지 모른다. 펄롱의 엄마는 어느 부잣집의 하녀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펄롱의 엄마는 일찍 죽는다. 다행히 부잣집 주인의 도움으로 펄롱은 반듯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어느덧 펄롱은 딸 다섯을 키우는 어엿한 가장이 된다. 석탄 배달을 하느라 언제나 새벽 일찍 집을 나선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손톱에 낀 검은 석탄 때를 씻는다. 영화에서 잠깐 검게 더러워진 손을 씻는 장면이 나온다. 손에 낀 검은 자국들은 비눗물에 씻겨 내려가는데, 왠지 모르게 그 장면에서 내가 느낀 뭉클함은 씻겨 가지 않는다. 딸 바보 아빠의 동병상련 때문인가? 평범한 월급쟁이 직장인의 고된 하루가 생각나서였을까? 지금도 왜 그 장면에서 내가 뭉클했는지 모르겠다. 독자분들 중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신 분이 있다면 어떤 연유에서 뭉클함의 여운이 지금도 남아 있는지 함께 나눠보고 싶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추운 겨울날 펄롱은 석탄을 배달하러 간 수녀원에서 큰 충격에 빠진다. 석탄을 보관하는 창고 안에 어린 소녀가 잔뜩 겁에 질린 채 숨어 있었다. 펄롱은 심하게 출렁이는 파도처럼 엄청난 내적 갈등과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겉으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평온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고뇌를 거듭하던 펄롱은 결국 그 아이를 구출해 온다. 소설이나 영화도 그 아이를 자신의 집까지 데려오는 것이 마지막 장면이다. '이게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분명 어떤 이유나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의도였는지, 나는 이런 아쉬움이 왜 생기는지 고민해 봤다.
이승환의 <화려하지 않은 고백>이라는 노래 제목이 떠올랐다. 수녀원에서 일어나고 있던 부조리와 비인간적인 행위들이 펄롱의 행위로 인해 세상에 알려져 사회가 떠뜰썩해지고, 시민들이 공분하고, 수녀원에 감금되어 있던 어린 소년들이 구원되는 장면을 너무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펄롱이 그 소녀를 구하는 행동을 했다는 점이다. 펄롱은 결코 화려하게 고백하지 않는다. 아무도 몰라도 된다. 막달레나 수녀원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기적인 양심적 행동이라 비난받을 수 있겠으나, 펄롱은 어쨌든 행동에 옮겼다. 이 점이 바로 얇고 가벼운 책을 묵직하게 만들어주는 결정적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또 한 번 나를 반성해 본다. 이 책을 읽었거나 영화를 본 사람들도 아마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사실 주위를 돌아보면 펄롱처럼 화려하지 않은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드러내지 않고 선행을 베풀고, 도덕적 양심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책과 영화 제목처럼 사소해 보이는 작은 행위들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린 아이나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일, 담배꽁초를 길거리에 버리지 않고 주머니속에 넣어 두었다가 재떨이에 버리는 일 등이다. 하지만, 이처럼 사소해 보이는 행동들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뭘까?
아마도 그 순간, 우리는 마음속의 질문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지금 내가 나서야 할까?’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으면 의미가 있을까?’ ‘괜히 나섰다가 불편해지는 건 아닐까?’ 이런 질문 앞에서 대부분은 주저하게 된다. 그러다 그냥 지나쳐버리고 만다. 펄롱도 그런 고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망설임 끝에 결국 행동을 선택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 누구에게도 칭찬받지 않아도 그는 자신의 양심을 따랐다. 그리고 그런 ‘작은 선택’이 결국 한 아이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어쩌면, 그동안 숨겨져 왔던 부조리를 세상이 알게 해주고 어둠에서 고통받던 사람들에게 빛을 선물해 주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떠오른 또 다른 장면이 있다. 지하철에서 누군가 무거운 짐을 들고 있거나, 아픈 기색을 보일 때 도와주고 싶지만 망설이는 내 모습. 머릿속으로는 수십 번 도와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다음 역에서 내리는 나. 우리는 어쩌면 매일매일 그런 ‘작은 기회’를 스쳐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나서 영화를 봤을 때, 이미 마음 한켠에는 펄롱의 고요하지만 단단한 심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소설을 통해 충분히 생각하고, 상상하고, 공감했던 감정들이 영화 속 장면에서 더욱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멈춰 섰다. 펄롱이 손을 씻는 장면, 창고 안에서 소녀를 발견하는 장면,
그저 지나칠 수도 있었던 평범한 문장 앞에서 나는 책장을 덮고 한참을 생각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가 느낀 망설임과 머뭇거림, 두려움과 책임감을 나는 외면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독서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멈춤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책은 언제든, 내가 원할 때 멈출 수 있고, 그 감정에 오래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준다. 그러나 영화는 다르다. 극장에 앉아 있는 그 순간부터
이야기는 내 감정의 속도와 무관하게 흘러간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고, 한 장면이 마음에 깊게 박히더라도 곧이어 다음 장면이 덮어버린다.
물론 영화는 영상과 소리로 전하는 힘이 있고, 감각적인 몰입을 선사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주체적으로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여백은 줄어든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더 깊이 내면화하고, 그 인물의 마음을 온전히 들여다보고 싶을 때는 영화보다 책이 먼저여야 한다고 느낀다.
예전에 김훈 작가의 『하얼빈』을 읽고 나서 영화 <영웅>과 <하얼빈>을 차례로 봤을 때도 그랬다. 책 속에서는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고뇌와 신념을 시간을 들여 곱씹을 수 있었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 생각들을 충분히 따라가지 못한 채 장면과 대사에 휩쓸려가 버리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나는, 한 편의 영화보다 한 권의 책이 먼저였던 경험들이 늘 더 오래 남는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라도, 글로 먼저 만나면 감정의 뿌리가 훨씬 깊고 단단해진다.
책을 읽는다는 건 단순한 이야기 소비가 아니라, 내 감정의 속도로 누군가의 삶을 함께 걷는 일이다.
그 시간을 지나 영화나 다른 매체로 만났을 때 감동은 더 크고, 울림은 더 오래간다.『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말한다. 세상을 바꾸는 건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이름 없는 누군가의, 아주 작은 용기일지도 모른다고. 펄롱처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러나 결코 외면하지 않고, 침묵하지 않는 사람들.
오늘 하루, 나도 그런 작은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화려하지 않은 고백’을 하나쯤 실천해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