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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서 Nov 09. 2019

2. 나는 왜 독서모임을 계속할까?

by 안수현

- 안 수 현

새벽 독서를 하면서 좋은 책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저자들은 자신의 지혜를 수고스럽게 쓰고, 책이라는 결과물을 남겼다. 그들은 그 명징하고도 고요한 지혜를 독식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지혜를 사람들과 나누려 했다. 나는 오늘도 특별한 노력 없이 그냥 그들의 것을 취한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책을 읽는 만큼 남이 애써서 쌓아온 지혜를 쉽게 가져오는 것도 없다”

<될 일은 된다>은 평범한 경제학과 대학원생이었던 마이클 싱어가 대학교수가 되고, 건축업자가 되고, 프로그래머가 되고, 미국 의료 전산화를 이끈 CEO가 되고, 100만 평 규모의 영성공동체의 리더가 되고, 뉴욕타임스 종합 1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책이다. 맨몸으로 성공의 끝까지 가본 정말 말도 안 되는 놀라운 그의 진짜 이야기이다. 그가 이렇게 성공한 이유는 영감, 직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깨어있기 때문이다. 그가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선의 세 기둥>과 <요가난다, 영혼의 자서전>이라는 책을 읽고 난 이후부터다. 평소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책만 읽어도 지혜를 얻을 수 있다니. 나는 그 욕심 덕분에 꾸준한 독서를 했고 그럴수록 내 인생에 보물 같은 책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혼자 책을 읽으면서 터져 나온 질문에 스스로 답을 구하고 사색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다른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어떻게 느꼈을까?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더욱 궁금했다. 이론이나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알고 싶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이 세계의 손톱만큼에 불과하다. 내가 알지 못한 세상이 존재한다. 내가 알지 못한 보물,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보물을 알고 싶었다. 너의 보물과 나의 보물을 꺼내서 하나씩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회의 일원이 되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짐승이거나 신”라고 했다. 나의 이런 인간에 대한 연결 욕구는 원초적인 본능이었다.


이런 궁금증과 호기심은 오프 독서모임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일회성 독서모임에 참여했다. 책에 대한 소감과 느낌을 공유하고 어떻게 읽었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읽었구나. 저 사람은 저런 느낌을 받았구나. 눈만 사용하던 혼자 읽기에서 입과 귀를 사용하는 함께 읽기는 또 다른 독서법이었다. 신선하고 좋았다. 하지만 몇 번 모임에 나간 후 나중에는 그냥 피상적인 이야기뿐 깊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에 내가 참여했던 모임은 일회성이라 회원 간에 충분한 친밀감이 형성되지 못해 사람들 간 대화는 피상적이었다. 더 깊은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없었다. 또한 매번 회원 소개를 한다든지, 특정 한 사람이 자기 얘기만 장황하게 늘어놓는다든지, 친분이 없는 사람이라면 관심도 없을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간을 잡아먹는다든지 기타 등등 진행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터져 나왔던 질문을 하고 싶었다. 근본적인 그들의 생각과 느낌을 알고 싶었다. 그러면 독서모임이 더 풍성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냐면 나에게는 아주 강렬하고 충격적인 모임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성경공부 모임이었다.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이십 대 중반에 세례 받아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무협지를 보면 강호에서 강자는 혼자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은 죄다 약자뿐이다. 약자들은 집단을 이루고 그 집단에 종속된다. 평소 이런 생각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단합과 친교라는 미명 아래 우르르 무리를 지어 다니는 단체 활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혼자 조용히 미사만 참여했다. 다행히 천주교는 무엇을 하라는 권유나 강요를 하지 않았고 고독한 신자가 될 수 있게 나를 내버려 두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신자가 되기 전부터 성경은 한번 읽고 싶었다. 성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많이 팔리고 읽힌 책이다. 수많은 탄압과 핍박을 견디며 죽음으로 지켜낸 책이다. 기독교적 서양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알려져 있다. 성경 속 이야기를 파헤쳐 그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알고 싶었다. 성경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종교를 초월한 순수한 학구열이었다.

우연히 주보에서 성경공부 모임 회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나는 혼자 성경을 읽고 공부할 자신이 없었던 터라 깊고 꾸준한 공부를 하고 싶어 모임에 참여했다. 성경공부라고 하지만 종교적인 색채가 짙다거나 편파적이고 배타적 믿음을 강요하는 모임은 아니었다. 공부 방식은 함께 성경을 읽고 질문하고 서로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는 것이었다.

그 모임에서 운영자는 단순히 성경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내용을 삶으로 연결하고 그 과정에서 나를 치유하고 정화할 수 있도록 모임을 이끌었다. 그곳에서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그때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운영자는 멤버들이 진솔하게 자신의 사적이고 은밀한 이야기를 풀어내도록 은근슬쩍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멤버들은 자신의 상처를 하나둘 풀어냈고, 울었고 치유받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늦깎이 신자로 홀로 미사만 참여했던 나는 꽤나 충격을 받았다. 멤버들의 고백과 울음이 생소하고 신기해서 구경꾼처럼 쳐다만 보았다. 어떻게 자신의 상처를 이런 모임에서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경이로웠다.

나는 속이야기를 하는 게 어려운 사람이다. 하지만 점점 나도 모르게 분위기에 취했고, 나중에는 내 이야기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꽁꽁 숨겼던 내 이야기를 하면서 두려웠지만 경이롭고 시원한 느낌을 잊을 수 없다.

바람이 통하지 않는 음습한 곳에 곰팡내가 풀풀 나는 무언가가 있다. 그곳에 어느 순간 창문이 열리고 맑은 바람이 들어와 공기가 순환되고, 따듯한 햇살이 쏟아져 그 무언가가 살균소독이 되는 기분이었다. 상처 때문에 철갑을 두르고 있었던 한 꺼풀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공개되면 큰 일일 줄 알았는데 괜찮았다. 별일 아니었다. 괜히 쫄았나 싶었다.

지금 돌아보니 그때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거대한 에고의 한 부분을 깨고 나왔던 것이다. 그때의 그 강렬했던 느낌은 한용운의 시처럼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고 할까. 한 사람의 능력이 모임의 구성원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똑똑히 지켜보았다.


나는 취미 동아리에서 그 어떤 직책도 맡지 않는다. 의욕이 없다고 해야 할까, 책임지기 싫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리던 독서모임을 하려면 달라져야 했다. 내가 나서야 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따로 모아 서울 사당에서 대망의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사람을 모으고, 오프라인 모임이 되기까지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그냥 순리대로 착착 진행되는 듯했다. 그렇게 책을 좋아하는 엄마들끼리 모여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내가 고안한 전체적인 진행방식은 이랬다. 정기적으로 매달 1회, 두 시간 독서모임을 갖는다. 멤버는 6명의 소수정예로 운영한다. 진솔하고 깊이 있는 독서모임을 위해서는 6명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두 시간 동안 한 사람당 15분 정도 발언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생각과 느낌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독서모임의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으면서 질문지를 하나씩 만들어서 단톡 방에 모임 전에 미리 공유했다. 너의 질문, 나의 질문을 한데 모으면 다양한 색깔을 지닌 6개의 질문이 된다. 평소에 나라면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사유하다 보면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책 선정은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했다. 책을 선정한 사람이 그 달의 운영자가 되어 모임을 진행했다. 물론 기본적인 운영방식은 정해져 있었지만 진행자의 개성에 따라 바꿀 수 있었다.


독서모임이 가장 좋은 이유는 단순히 책 읽는 것을 넘어 사람들과 만나는 에너지 교류의 장이기 때문이다. 혼자 가만히 앉아서 활자를 읽는 정적인 활동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서 모임 장소에 가고 사람들을 만나서 듣고 말하는 역동적인 활동이라는 말이다. 온라인의 SNS 등을 통해 소통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 사람 인생을 만나는 것이다. 사람을 알고 교류하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람한테 인생을 배운다.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 인생 전체가 나에게 오는 것이다. 사람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어마어마하다. 고로 나와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자연스럽게 확장될 수밖에 없다. 내 마음을 너무나 잘 표현한 시 정현종의 <어느 방문객>으로 설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그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바로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년 후 나는 이 독서모임을 깨기로 했다. 처음에 불타올랐던 열정은 사그라지기 시작했고, 후반에는 기가 빨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당일에 갑자기 불참 통보를 받거나 진행자의 역량에 따라 모임의 깊이가 달라졌고, 진행자가 불참할 경우 내가 대타로 진행하기도 했다. 또한 불참하는 사람이 많으면 6인실 스터디 룸 대여비, 간식비 등으로 참석한 회원에게 개인별 부담액이 많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흥이 나지 않았다. 모임 주최자로서 억지로 애쓰고 있을 뿐이었다. 좋아서 시작한 취미 활동인데 즐겁지 않았다. 이대로 모임을 지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나는 지금 즐거운가? 다시 스스로 질문했다. 결론은 아니었다. 이 모임을 중단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으로 만든 독서모임이 실패했다. 독서모임의 힘은 주고받는 에너지 교류 과정에 있다. 그런데 그 흐름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돌아보니, 그 책임은 나한테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책임지기 싫어서 회원들 모두 공평하게 진행자가 되자고 제안했다. 그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회원 모두 책임자로서 모임을 잘 이끌어보자는 취지로 포장했지만, 정작 모든 것을 내가 다 책임지기 싫다는 마음이 더 컸다.

회사에서, 가정에서도 책임지면서 일하는데 이런 취미 동아리에서까지 부담지기 싫었다. 그냥 단순 참여자로서 가볍게 즐기고 싶었다. 주도적으로 모임을 이끌고, 장소를 예약하고, 일정을 잡고, 운영자로 일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알게 모르게 생기는 감정적 뒤치다꺼리까지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즐겁자고 한 일에 부담을 껴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 같이 진행자로서 책임을 지자고 발을 뺐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모임을 만든 실질적 주최자였고 다른 멤버가 보기에는 운영자였다. 운영자라면 책을 선정하고, 발제하고, 회원들의 일정을 파악해 모임 날짜를 정하고, 모임을 이끄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써보니 모든 책임이 나한테 있었다는 것을 더 실감할 수 있겠다.


비록 실패했지만 모임을 운영하면서 독서모임의 재미도 더 깊이 알았다. 첫째는 편파적이었던 내 독서취향이 넓어졌다는 점이다. 입맛에 맞는 책만 읽던 편식 독서에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영양소가 고루 있는 독서를 접할 수 있었다. 의외의 책을 만나 식견을 넓힐 수 있는 결정적 기회가 되기도 했다. 둘째는 깊은 독서를 하게 된다는 점이다. 혼자 읽을 때 이해되지 않은 부분, 별생각이 없이 그냥 지나쳤던 부분을 독서모임의 다른 회원이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이라며 자신의 경험과 생각, 느낌을 덧붙여 이야기했다. 그 과정에서 구멍이 숭숭 뚫렸던 부분이 촘촘하게 채워지는 깊은 책 읽기가 되었다. 셋째는 편견과 선입견이 점점 사라진다는 점이다. 상대방의 생각과 느낌을 들으면서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라고 공감했다. 그러면서 나의 고정된 옳고 그름, 호불호 같은 그림자가 점차 옅어졌고 타인의 취향과 개성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독서모임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지난 모임의 장소는 서울 사당으로, 정작 독서모임을 하는 시간보다 내가 사는 파주에서 오가는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집 근처에서 독서모임을 시작하고 싶었다. 막상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니까 불편하고 귀찮은 일 투성이었다. 사람을 모집하고 처음 어색한 인사도 나누고, 일정도 잡고, 장소도 예약하고, 회비도 걷고, 모임 진행방식 등을 공유해야 한다. 그래도 뭐 괜찮았다.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독서모임을 좋아했으니까. 독서모임은 자극적이고 순간적인 쾌락이 아니라 내면에서 올라오는 재미이다. 다시 그 재미를 느끼고 싶었다.


이번에는 지난 모임의 실패사례를 거울삼아 스스로 책임을 씌웠다. 나는 첫 번째 독서모임을 운영하면서 사람의 능력에 따라 주어지는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공평이라는 말은 똑같은 역할을 분담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역할 차이를 두는 것이다. 책임성 있는 리더가 없으면 그 모임은 붕괴된다. 어떤 책임을 담을지 고민했다. 책임이 있는 만큼 더 많은 권한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권한을 한껏 활용해 먼저 독서모임의 전체적인 콘셉트를 정했다. 회원 한 명 한 명이 나로 깨어나서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를 깨우는 독서모임”으로 이름을 정했다. 날카로운 첫 키스 같은 성경공부의 경험 덕분에 나는 작은 모임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나를 깨우기 위해서는 열린 가슴을 가져야 한다. 열린 가슴을 갖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은 사람들과 진정성 있게 소통하는 것이다. 지극히 은밀한 속이야기를 할 수 있는 ‘진정한 소통’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회원 모두 서로에게 소중한 개인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작은 모임으로 시작했다.

나를 깨우는 독서 방향도 잡았다. 그에 따라 책 선정도 내가 했다. 발제도 내가 했다. 기간은 기수별로 3개월 단위이고, 3개월마다 독서모임 회원을 다시 모집했다. 기존 회원들은 다음 기수에도 신청했다. 그래서 다행히 회원 모집에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일회성으로 운영하면 그날 와서 회원들끼리 서로 인사하고 모임 분위기를 익히느라 깊은 독서 나눔을 할 수 없다. 3개월간은 고정멤버로 독서모임을 운영했다. 기수별로 운영하면 회원 입장에서는 개인 사정에 따라 바쁜 시기에는 독서 모임을 신청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나 같은 운영자 입장에서는 모임의 끝을 미리 알릴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뭐 여러 가지 설명을 갖다 붙여도 결국 이 모임은 내가 선호하는 취향의 결합체였다.

좋은 모임이 되기 위해서는 회원에게도 책임이 있다. 회원들은 독서모임 책을 진지하고 꼼꼼하게 읽고 참석하겠다는 책임의식이 필요하다. 몇 천 권을 읽었다는 지식욕이나 사회적 배경 같은 자기 자랑은 필요치 않다. 다른 사람 의견을 분석하거나 비평할 필요도 없다. 다만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회원들에게 이 부분을 공지하며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부담도 책임도 싫어하는 내가 또다시 독서모임을 만들고 시작했다. 왜일까? 그 이유는 누가 뭐래도 순전히 독서모임이 좋아서이다. 나의 성향으로 봐서 단순 참여자도 아니고 모임 주최자가 된다는 것은 더욱 피곤한 일이다. 나는 개인주의자이고, 소중한 개인 시간에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다. 나는 이타심이 크지도 않고, 대단한 독서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명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진행하고 싶은 방식대로 독서모임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런데 진행하다 보니 묘하게 회원들의 에너지가 점점 좋아지고 편안해지는 것을 느껴졌다. 에너지는 서로 교류하기 때문에 누구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나는 운영자였기에 관심이 많아서 예민하게 느꼈던 것 같다. 나중에 실제로도 회원들은 독서모임을 한 후에 자신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회원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인데 누군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쓸모 있음이 나 스스로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뿌듯함으로 올라왔다. 그러자 점차 독서모임의 운영자로서 아주 작은 사명감이 움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이 또한 경계하려고 한다. 이것은 내가 할 일에 최선을 다한 부산물일 뿐이다. 일부러 그걸 의도한다면 전혀 다른 결과물을 낳을 수도 있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사명감에 모임을 이끌다 보면 의미가 크고 무거워진다. 무거우면 재미가 없다. 재미가 없으면 지속력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 있냐고 반문할 것이다. 나는 취미활동까지 즐겁지 않은 일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회 일원으로서 충분히 의무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 거기에 개인 시간까지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며 매달릴 필요가 있을까? 내가 즐거우면서도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작지만 확실한 일이 의외로 많이 있다. 다른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는 일을 꾸준히 하려면 어디까지나 내가 먼저 즐거워야 한다. 명심하자. 그냥 즐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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