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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서 Oct 10. 2019

1. 그게 과연 즐거운 일인가

by 안수현

                                                                                                                                                       

다들 그렇겠지만 결혼 이후 내 삶은 달라졌다. 엄마, 아내, 며느리라는 추가된 사회적 역할은 ‘나’라는 정체성을 매몰시켰다. 젖 먹던 힘까지 살았지만 속은 공허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허기와 공허함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무식하게 속이 빈 느낌을 육체적인 배고픔으로 착각해서 먹고 또 먹었다. 그러면 그 허기가 달래 질까 봐. 뒤늦게야 배 속의 배고픔이 내면의 배고픔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느 날 문득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고 있을 때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건 사는 게 아니야.’라는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이후로 한숨을 쉬는 일이 잦아졌다. 가슴이 답답해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계속 직장에서는 점점 일하기 어려워졌고 아이는 엄마 손이 더 필요하고, 난장판인 집안은 정리정돈이 안되고, 체력은 점점 바닥을 치면서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었다. ‘정말 이대로는 안 되겠다’라고 소리쳤다.

뭔가가 해소되지 않는 갈증에 목이 탔다. 에스터 부흐홀츠는 “삶에 대한 창조적 해결책은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각 사람의 무의식이 문제를 처리하고 얽힌 실타래를 풀어내게끔 하려면 고독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뭔지 모르지만 막연하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만은 절감했다. 어린아이를 둔 내 형편에 일상에 많은 변화를 주기에는 부담이 커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일찍 눈을 뜬 새벽에 책을 읽었다. 새벽녘 고요함은 절로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놀아달라고 보채는 딸도 잠든 이 고요함. 따듯하게 비치는 스탠드의 불빛에 순간 침잠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책 내용과 물아일체가 된 황홀한 체험이었다. 그렇게 나는 새벽 독서를 시작했다. 

임신 이후부터 읽던 육아 및 자녀교육 책을 접고 내면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마이클 커닝햄의 <디아워스(The hours)>에서 시대를 달리 한 세 명의 여성이 나온다. 그중 로라 브라운은 1950년대 미국에 사는 중산층 여성이다. 로라는 학창 시절 유명했던 청년이자 제2차 세계대전 전쟁영웅이었던 댄과 결혼했다. 전쟁영웅이었던 남편 덕분에 중산층으로서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댄은 성실하고 가정적이고 자상한 남편이다. 사랑스러운 4살 아들도 있고, 지금은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행복의 조건을 다 갖춘 듯하지만, 로라는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다. 댄의 생일날, 로라는 버지니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자살 충동에 사로잡힌다.

로라 브라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미국의 시대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1950년대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로 백인 중산층에게 대체로 안정과 번영의 시대였다. 부유한 중산층의 이상적인 가정 이미지는 대도시 근교 넓고 쾌적한 주택에 살고, 예쁜 옷을 입은 엄마가 깨끗한 실내에서 아이들과 웃으며 놀아 주고, 가족을 위해 요리한다. 그리고 남편에게 내조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예쁜 아내가 있다. 바로 이 모습은 전쟁으로 파괴된 가정을 안정적으로 재건하기 위해 그 시대가 만들어낸 여성상이었다. 오로지 가정생활을 통해서만 여성은 행복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던 것이다. 보다시피 여기에는 엄마, 아내의 삶만 있지 개인으로서의 삶은 없다. 

로라 브라운도 시대적 여성상을 주입받고 세뇌당했기에 완벽한 아내이자 완벽한 엄마가  자신이 원하는 삶이라고 착각한다. 로라는 가족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를 돌보고, 남편을 위해 케이크를 굽는다. 로라는 당시의 전형적인 여성상을 대변한다. 그녀 스스로 본인의 삶에 대한 열정이나 목표를 철저히 무시했다. 실제로 당시 미국 중산층의 경제적 여유를 누리던 가정주부들은 자신에게 뭔가 결핍되었다고 느꼈다고 한다. 또한 이유 모를 막연한 우울감에 시달렸고 전업주부로서의 역할에 만족하지 못해 불행을 느꼈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십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여성이 결혼하면 암암리에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라는 보편타당한 역할을 강요받는다. 그렇지 않고 자기만의 색깔과 개성을 드러내거나 보편적인 역할에서 벗어나면 나쁜 엄마, 나쁜 아내, 나쁜 며느리가 되기 십상이다. 철저히 “나”가 무시되는 삶을 강요받는 것이다. 가정 내에서 주어진 역할만이 진정 행복한 여성의 삶이라고 세뇌시키며 억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참된 나”가 없다. 

주어진 사회적 역할과 참된 나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공허함과 답답함에 종국에는 자살충동까지 느끼는 로라 브라운에게서 내 상태를 인지했다. 어쩌다 보니 결혼 후 “나”를 죽이는 삶을 살았다. 아침에 눈뜨는 순간부터 잠을 잘 때까지 오로지 “나”로 존재했던 적은 없었다. 그 시간이 지속되니까 내면에서 알 수 없는 목마름, 공허, 허기로 가득 찼던 것이다. 

나는 가족과 함께 있는 것보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더 좋다. 가족을 위해 요리하고 집안일하는 것보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이 더 좋다. 사회적 이슈나 뉴스거리 보다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아이 교육보다 나의 배움에 돈 쓰는 것이 더 좋다. 이런 나는 특이한 엄마, 아내가 아니라 자아실현의 욕구를 지닌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이었다. 


책을 계속 읽으면서 점점 좋아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떤 특정한 텍스트를 읽으면서 내 마음의 불안, 걱정, 두려움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 본다는 자체가 내 마음에 밝은 기운을 가져왔다. 책은 특별한 조력자 없이 온전히 나 스스로 치유하도록 했다. 오히려 혼자여서 더 솔직하게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다스릴 수 있었다. 점점 좋아지고 있는 나 자신을 느끼면서 책 읽기를 멈출 수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도대체 참된 나, 잃어버렸던 나는 누구인가? 궁금해졌다. 이제는 무너졌던, 잃어버렸던 나를 다시 세울 때였다. 독서를 통해 더 좋아지고 온전해지고 싶었다. 


그때쯤 EBS에서 소설 속 명문장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봤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이 구절을 듣는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주체할 수 없었던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책꽂이에 있는 <데미안>을 집어 들고 다시 읽었다.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가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부모나 사회적 상황이 강요하는 삶이 아닌 진정으로 자기가 원하는 삶의 목표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청소년 권장 소설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데미안>은 청소년이 아니라 중년들이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했다. <데미안>은 헤르만 헤세가 마흔두 살에 출간한 책이다. 마흔 살이 넘은 헤세가 십 대 시절의 감정이나 느낌을 회고하며 쓴 책이라는 뜻이다. 또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청소년 시기뿐만 아니라 평생 끊임없이 진지하게 나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궁극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내가 십 대에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을까? 과연 청소년 권장 소설이 맞나 싶었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은 중년이 된 지금의 나에게도 어려웠다. 십 대에 읽었을 때는 싱클레어, 데미안, 프란츠 크로머 같은 등장인물만 기억했다. 다시 읽으면서 싱클레어에게 데미안만큼 영향을 준 피스토리우스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중요한 인물을 놓치고 있었다니. 십 대 시절 나는 <데미안>을 눈으로만 읽었지 제대로 읽지 못했었다.


청소년 시기에만 자아정체성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중년의 나는 십 대 시절보다 자아정체성에 더 큰 혼란을 느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단순히 진로를 고민하던 십 대 시절보다 한층 더 깊은 사색을 했다. 청소년 시기 학업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자체적으로 접었던 고민과 관련된 책을 찾아 읽고, 이런저런 강의도 듣고, 혼자 사색도 하면서 중년의 방황 기를 거쳤다. 

세상에 많은 풍파를 겪은 중년이 되어 <데미안>을 읽으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십 대 시절에 절대 알 수 없는 그런 내밀하고 농밀한 느낌이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제대로 된 삶의 방향을 잡을 수 있겠구나' 그런 본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사회적 역할로 쓰인 이름만 줄줄이 댄다. 예를 들면, 나는 누구의 엄마이고, 누구의 아내이고, 누구의 딸이고, 어느 학교를 나왔고, 어느 조직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고, 몇 살이고, 어디에 살고 있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나는 엄마, 아내가 아니면, 어느 조직의 직책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가? 몇 살 이전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마이클 싱어 <상처 받지 않은 영혼>에서 ‘나는 보는 자입니다. 나는 이 안의 어딘가에서, 내 앞을 지나가는 사건과 생각과 감정들을 내다보고 인식하는 자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그냥 나를 지켜보는 자이다.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며 이 세상을 살고 있는지 그냥 바라보는 자다. 


나를 들여다봤다.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과 감정을 갖고 살아가는지 바라보았다. 나는 돈을 빨리 많이 벌어서 조금 더 나은 동네의 좋은 아파트로 이사하고 싶었다. 회사에서는 일 잘한다는 평가도 받고 승진도 하고 싶었다.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내 아이도 남부러울 것 없이 잘 키우고 싶었다. 이것은 전부 세상에서 인정하는 잘 사는 기준이다. 

더 깊이, 오랜 시간 동안 나를 들여다봤다. 이것들은 모두 진정 내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많은 돈도, 그렇게 좋은 아파트도, 남들의 좋은 평가도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도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면 됐지, 남한테 부러움을 사는 아이로 키우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 세상의 기준에 따라 사느라 진정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살았을 뿐이었다. 왜 그랬냐고 물으면 다른 사람이 가치 있다고 하는 것, 사회에서 인정하는 성공의 기준에서 멀어질까 봐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 경쟁구조에서 이탈하면 무시당할까 봐 스스로 물을 여유도 없었다. 


이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유롭게 살고 싶었는데 내 생각인지도 남의 생각인지도 모를 생각의 감옥에 갇혀 허둥지둥 사는 내가 싫었다. 스스로 만든 생각의 쇠창살을 부수고 싶었다.

새롭게 태어나려는 새는 지금의 알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알껍데기는 나를 가두고 있던 나의 사고방식, 가치관, 오래된 습관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를 들여다보았다. 세상의 기준이 말하는 돈, 출세, 성공의 개념이 아닌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진짜 원하는 것으로 자유롭게 내 삶을 채워나가고 싶었다.


강화도 문화유적지를 탐방하면서 일흔두 살의 향토 사학자와 만났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 하나가 가슴에 남아있다. 김포에 땅을 많이 가지고 있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신도시가 개발되자 토지보상 명목으로 200억을 보상받았다. 갑자기 돈벼락이 떨어지자 흥청망청 썼고, 도박에도 손을 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수중에 남아 있는 돈은 얼마 없었다. 그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웠다. 그는 다시 조용히 농사나 지으면서 살기로 했다. 원래 부모님 때부터 농사꾼이 아니었던가! 남은 재산을 정리해서 농사를 지을 요량으로 화성에 땅을 샀다. 그런데 몇 년 후 동탄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또다시 벼락부자가 되었다. 향토 사학자의 이 말을 듣고 있었던 다른 사람이 말했다. "역시 될 놈은 엎어져도 금가락지라고, 운이 좋은 사람은 절대 못 따라가지." 그런데 그 향토 사학자가 이렇게 되받았다. “과연 그게 좋은 일인가? 마음을 비우고자 했는데 마음만 어지럽지. 괜한 욕심만 생겨 마음이 편하지 못 하지.”

그리고 강화도에서 철종이 어린 시절 살던 곳과 연산군 유배지를 돌아보았다. 향토 사학자는 왕이 되지 못한 왕족은 모두 역모라는 죄에 엮여 기본적인 생명권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왕족으로 태어나면 일거수일투족 감시를 받고 온갖 권모술수와 계략에 휘말렸다. 그 모든 험한 일을 뚫고 왕이 된다 하더라도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 피와 땀, 다른 사람의 피와 땀을 흘리며 애써야 했다. 향토 사학자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과연 왕족으로 태어난 것이 좋은 일인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많은 돈과 높은 권력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괜히 마음만 어지럽고 불편해 혼란스러운 상황만 조장한다면 그게 과연 좋은 일인가? 한때 나는 큰 부자가 되고 싶었고, 왕 같은 높은 권력도 누리고 싶었다. 세상의 기준에 돈 많고 권력이 높으면 못할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이 좋아 보였다. 그런데 지금 나도 되묻고 싶다. 그게 과연 좋은 일인가? 

큰돈도 가지려면 그것을 담을 수 있는 내 그릇이 커야 좋은 것이고, 큰 권력을 가지려면 그것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좋은 것이다. 큰돈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인지 돈에 휘둘리는 사람인지, 권력을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인지 권력에 놀아나는 사람인지 나를 먼저 알아야 한다. 즉, 내 그릇의 크기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릇의 크기를 타고났다는 말은 아니다. 그릇의 크기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개인의 수양과 노력으로 그릇의 크기는 충분히 키울 수 있다. 다만 현재 내 그릇의 크기와 깊이를 알고 지금 나에게 좋은 일을 택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 권력을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그곳에서 내 그릇의 크기를 키워야 한다. 거기가 바로 내가 시작해야 할 지점이다. 오로지 나의 직관으로, 느낌적인 느낌으로 내가 할 일인지 아닌지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최진석의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장자는 ‘나 자신만의 즐거움’을 ‘자쾌(自快)’라고 했다. ‘자쾌’는 의존적인 쾌락이 아닌 내 안에서 내가 생산해낸 나만의 고유한 쾌락이고 자유고 독립이라고 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고유한 즐거움이 발동하는 자쾌를 자각하고 그냥 그 일을 하면 된다. 나는 좋아하고 편안한 일을 하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인지 알기 위해 오늘 배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다. 

'과연 그게 즐거운 일인가?'

이전에 나는 세상의 기준에서 무엇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 추구하는 삶은 또다시 세상의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게 될 것이기에. 나는 추구하는 삶보다 즐기는 삶을 택했다. 


이젠 어떤 일이 있을 때, ‘나는 즐거운가’라고 질문한다. 그걸 하면서 즐겁지 않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즐겁지 않다면 방해 요소를 찾아서 없애거나 그 일을 도중에 멈추기도 한다. 물론 이때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다는 전제가 있다.(노력하지 않고 중도에 포기한다고 생각될까 걱정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겁지 않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고 그것은 내가 극복할 수도 없고 진정 내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에서 나와 똑같은 하루키의 생각을 발견하고 기뻤다. 

“그러면 무엇이 꼭 필요하고 무엇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지, 혹은 전혀 불필요한지를 어떻게 판별해나가면 되는가. 이것도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하자면, 매우 단순한 얘기지만 ‘그것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은 즐거운가’라는 것이 한 가지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뭔가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데 만일 거기서 자연 발생적인 즐거움이나 기쁨을 찾아낼 수 없다면, 그걸 하면서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뭔가 잘못된 것이나 조화롭지 못한 것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때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즐거움을 방해하는 쓸데없는 부품, 부자연스러운 요소를 깨끗이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평일에는 직장에서 강도 높은 업무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챙기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주말이 되어 겨우 한숨을 돌릴 때 남편이 시댁에 가자고 했다. ‘그래 이번 주말에는 내가 희생하고 다음에 쉬면 되지.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죽을 것 같이 힘들었지만 참았다. 내가 이렇게 하면 남편이 혹은 그 누구라도 나의 노고를 알아주고 챙겨주겠지’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내가 내 감정을 무시하고 챙기지 않는데 어찌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나를 챙길 수 있단 말인가. 그때는 서운하고 화가 났는데 지금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느낌이기 때문이다. 나만 알 수 있는 고유한 느낌이다. 그래서 내가 나를 먼저 챙겨야 한다. 즐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나를 챙기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지극히 이기적이어야 한다. 이기적이라고 말하면 분명 ‘엄마가, 아내가 되어서 자기만 챙기면 가정이 제대로 돌아가겠는가?’라고 되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매우 책임 있는 질문 같지만 의미 없는 질문이다. 한 인간으로서 잘 살고 있는지는 엄마, 아내 등 사회적 역할 이전에 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로 온전하지 않으면 세상이 덧씌운 사회적 역할 놀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내 상태가 좋아야 가족에게 좋은 에너지가 전달된다. 건강한 내가 있어야 가족도 건강하고 사회도 건강하다.

‘엄마가 되어서, 아내가 되어서 당연히 뭐를 해야지’라는 틀에서 내가 먼저 벗어났다. 처음에는 나는 특이한 엄마, 특이한 아내였지만 지금은 이게 바로 나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남편, 딸도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오늘도 ‘나는 즐거운가’라고 스스로 질문하고 작은 휴식부터 즐기고 있는 중이다. 내 생각과 감정을 보고 있는, 이게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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