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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직업은 푸드 크리에이터입니다.

잠들지 않는 꿈을 위해

잉여인간


30대 중반, 번아웃과 결혼을 핑계로 자발적 백수가 됐다. 1년 간은 좋았다. 그러나 자꾸만 아무것도 아닌 기분이 들었다.


나를 잃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 기자라는 직업을 버리고서야 알았다. 글을 써야만 살 수 있다는 걸. 숨을 참을 수 없는 것처럼 자꾸 글이 써진다. 나도 모르게 소리 없는 말풍선이 두 손에 고인다. 열손가락은 심장과 함께 뛰고 있었다. 그걸 알기까지 잉여의 시간이 필요했다.



푸른 꿈


대학교 때 나의 꿈은 영양교사였다. 부모님도 좋아하시는 안정적인 직업. 그러나 그 꿈은 교수님 앞에서 철저히 부서졌다. 엄숙하고 진중한 진로상담시간, "가능성이 많은 블루오션을 개척해 보는 건 어떨까?" 교수님은 나의 마음에 푸른 꿈을 던져 넣었다.


성적순으로 결정되는 교육이수 과정. 이 악물고 공부해도 안 되는 것이 있었다. 닿을 듯 닿지 않았던 선에서 난 좌절했다. 하지만 좌절은 또 다른 꿈을 꾸게 한다. 교사는 내가 바라던 직업일까? 직업은 꿈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건 뭐였지? 알에서 깨어나려는 것처럼 고민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푸른 꿈이 시작되었다.


글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무모한 꿈. 그렇게 기자를 꿈꾸게 됐다.



개척자


복수전공을 하면서 대학생활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방학 때도 놀지 않고 알바를 하면서 계절학기를 빼놓지 않았다. 덕분에 취직도 빨랐고, 전문지 기자로 운 좋게 발돋움했다. 난 내가 탄탄대로를 걸을 줄 알았다. 그러나 누군가 말했다. 인생은 사진이 아닌 동영상이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개척자가 된 기분으로 파도를 헤치면서 푸른 꿈에 길을 낸다고 생각했다.


지나온 뱃길은 다시 물로 가득 찼다. 보이지 않는 미래, 보이지 않는 꿈. 거친 물살을 헤치고 지나온 길에서 나는 내가 어디 서있는지 알지 못했다. 나에겐 나침반이 없었다.



브런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퇴사 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럴수록 글이 쓰고 싶었다. 나를 지탱하는 힘. 나의 의식은 손끝에서 시작된다는 걸.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 것처럼 키보드를 누르면 생각에도 시동이 걸린다.


그걸 아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생각을 펼쳐놓을 공간이 필요했다. 숏폼이 지배하는 시대, 긴 호흡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않도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한 줄의 글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브런치에 문을 두드렸다. 무엇이든 글로 빚을 수 있는 공간. 좋은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나는 이야기로 건강한 세상을 빚고 싶었다.



64kg


퇴사 직후 나의 몸무게였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찼고, 체력은 완전 바닥이었다. 가벼운 감기는 폐렴으로 발전했고, 천식과 아토피는 더 심해졌다. 한번은 침대에 누워 숨을 쉬지 못 했다. 물 속에 있는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가슴 속이 후추를 뿌린 것처럼 뜨끔뜨끔 아파왔다.


'세상에 아픈 사람들이 없었으면.'


한 번 지독히 아파보니 아픈 사람들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 TV를 보다가 건강 프로그램만 나오면 리모컨을 멈췄다. 혹시 나의 경험과 지식이 도움이 되진 않을까? 브런치 작가로 단번에 합격하진 못 했다. 4~5번, 전문성과 나만이 쓸 수 있는 글로 다시 문들 두드렸다. 그리고 2021년 10월, 드디어 브런치 작가가 됐다.

https://brunch.co.kr/@deuny/929



푸드 크리에이터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처음으로 공식 직함이 생겼다. 브런치가 만들어 준 직업, 푸드 크리에이터. 지금도 어디에선가 나를 소개할 일이 생기면 '푸드 크리에이터'라고 소개한다. 영양사이자 푸드크리에이터. 남편이 한 번은 이런 말을 했다.


"영양사는 면허이지 직업이 아니잖아."


단체급식으로 통용되는 영양사라는 직업. 블루오션을 찾으라는 교수님의 조언에 내가 한 발자국이라도 다가 선 것인가?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꿈을 향해 끝없이 펼쳐지는 생각들을 적는다. 크리에이티브한 생각, 규칙과 정형화된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삶.


먹는 것을 좋아하던 내가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신문방송학을 복수 전공하게 된 이유는 바로 푸드 크리에이터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실패는 또 다른 시작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여러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곧 내 책을 내줄 것만 같았다. 난 또다시 푸른 꿈에 젖어들었다. 앞으로 향하던 시선이 바다 아래를 향할수록 원동력은 떨어졌다. 중요한 건 앞을 바라보며 쉼 없이 노를 저어 나가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생각들을 글로 적어나가는 것이었다.


지나간 물길이 나에겐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엔 하나의 여정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걸. 실패는 또 다른 시작일 뿐. 포기와 단념이 뭉쳐지는 순간, 그것이 진짜 실패라는 걸. 브런치에 적어 온 글들은 내가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알려주는 나침반이 되었다.


그렇게 24시간 잠들지 않는 꿈을 꾸게 되면서 소원은 하나씩 이뤄졌다.


푸드 크리에이터란 직업, 요리연구가, EBS 출연, SNS광고. 월간 에세이에 글 싣기. 프로필에 쓴 작가소개는 거의 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이뤄진 소원들이다.


그래서 난 아직도 꿈을 꾼다. '작가'라는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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