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집공부 2-6화: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불완전한 사랑

엄마의 마음은 오르락내리락

by 교사맘

내 아이들은 아들, 딸 할 것 없이 다들 성격이 둥글둥글하고 무난하다. 엄마, 아빠의 생각과 말을 권위 있게 받아들이고,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나 선뜻 돕는다. 엄마, 아빠와 한 약속이나 집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꼭 지키려고 노력하고 부모님을 걱정시킬만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무엇보다 밝게, 자주 웃는 모습을 보며 난 참 운이 좋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지켜보는 내 마음이 문득문득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역시 아이들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방학이나 연휴처럼, 같이 있는 시간이 긴 경우 이 오르락 내리락을 좀 더 자주 느끼는 것 같다. (나는 긴 추석 연휴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자잘하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 귀찮아서 (특히 막내는 아직 2학년이라 그런지 엄마를 더 자주 찾는다.) 스타벅스로 도망친다. 가서 2시간 정도 맘껏 독서를 하고 온다. 밥을 차려주고 나면 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 방문을 닫고 글을 쓰거나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 막내가 종종 들어와서 놀자고 하거나, 둘째가 식사 메뉴를 묻는 것이 귀찮다. 집중하고 싶은데 방해받는다고 느낀다. 그러다 오후쯤 되면 이런 내가 아주 이기적인 엄마 같고, 나중에 아이들이 컸을 때 ‘그때 왜 귀찮아했을까’하고 후회할까 봐, 아니면 나 모르게 아이들이 상처를 받고 있는 걸까 봐 걱정이 된다. 휴직을 했으면서도 왜 자꾸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것인지, 자본주의 사회에 길들여진 - 만성적인 자기 착취형 인간 같다고 스스로를 비난할 때도 있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신문 뒤에 숨은 나>라는 작품이 너무 공감되어 액자를 사왔다. 작가님도 세 아이를 키우며 작업을 하셨다. 신문 뒤로 숨고 싶은 마음 - 알지알지 >_<


마음속 갈등은 집공부에 신경 쓸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 집 아이들은 유튜브나 동영상은 오직 영어로만 시청할 수 있는데, 영어 동영상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독서 시간이 부족한 것 같아서 문득 걱정이 된다. 독서나 놀이 등 다른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반대로 영어 듣기 노출이 부족한 것 같아서 걱정이 된다. 어휴. 초등 교육과정과 초등학생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는 나도, 이렇게 종종 자녀를 키우는 일에 불안함을 느낀다.


남편은 밤에 ‘아이들과 성경 읽기 시간’ 외에는 자녀 교육에 대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방문을 닫고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데, ‘저 사람은 왜 아무런 마음의 불편함 없이 잘 쉬는가!’하는 불만이 느닷없이 생길 때도 있다. 과거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자주, ‘엄마인 내가 방문을 닫고 있는 것’ 자체에도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남편은 나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조금도 외치지 않고, 휴일이나 방학이면 ‘아이들을 어디로 데려가주면 도움이 될까’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런 남편이 평일에, 응당 쉬어야 할 시간에 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저 사람만 맘 편해?’하고 말도 안 되는 시기를 하는 것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빙점은 현재 절판되었다. 더 세련된 번역의 E북이 판매 중인 듯하다. 밀리의 서재에도 있다.

최근에 다시 읽은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에서, 게이조라는 인물은 양녀 요코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귀여워하는 것이 아니다. 좋아하는 것과도 다르다. 사랑한다는 건……
그거야, 그거! 자기 목숨을 상대방에게 주는 것.'


게이조는 난파당하는 배에서 다른 사람에게 선뜻 자신의 구명조끼를 넘겨주던 선교사를 떠올린다. 자기 목숨을 상대방에게 주는 것. 그게 사랑이라고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고뇌한다.


가끔 누가 봐도 모성애가 엄청난 엄마들을 만나곤 한다. ‘저 엄마는 진짜 자식을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겠구나’ 싶은. 그 어떤 스케줄보다 자녀의 스케줄이 우선이고, 자녀의 삶을 자신의 삶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느껴진다. 그 엄마들은 정말 자기 목숨을 자녀에게 주면서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반면에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휴직 중에도 혼자만의 시간이 부족하다고 종종 말하고, 자녀들을 남편에게 떠맡기고 혼자 여행을 떠나야 숨통이 트인다. 그것도 정기적으로. 아이들의 집공부도 반에 반 정도는 초등교사라는 내 커리어의 연장선으로 삼는다. 내 공부, 내가 읽고 싶은 책, 내가 하고 싶은 것, 내 마음이 언제나 우선이고, 침해받는 것 같으면 울적해진다.


'자녀를 위해 목숨을 줄 수 있나?' 하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만약 게이조처럼 난파선에서 구명조끼가 하나밖에 없다면 나는 당연히 자식에게 줄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식을 살리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과 일상에서는 늘 내가 먼저인, 그렇다고 당당하게 나를 앞에 두지도 못하고 망설이는 시간이 더 길다. 이 괴로움이 정말 현실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


기도 시간마다 이 말씀을 읊는다. 자녀들에 대한 걱정, 책임감, 미래에 대한 불안 - 이 모든 것이 무거운 짐이다. 기도 시간 이외의 삶에서도 이 짐을 절대자에게 맡기고, 편안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더불어 지금 내 모습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이기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포기하지 않고 사랑의 조각들을 이어가 본다. 하고 싶은 게 많지만, 어떤 것은 퇴직 이후로, 어떤 것은 주말로, 또 어떤 것은 막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뒤로 미룬다. 어떤 것은 잘게 쪼개어 조금씩이라도 지금부터 내 것으로 만든다. 가사가 너무 힘들면 더 부정적인 감정이 커질 수 있으니, 중요하지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일들은 가능한 쉽고 자동적으로 굴러가도록 시스템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이 모든 조정과 노력이 결국 자녀를 키우는 의무를 저버리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불완전하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난파선에서 주는 구명조끼가 목숨을 한 방에 주는 것이라면, 매일의 삶에서 자녀들을 위한 양보와 조율은 내 목숨을 수백 분의 일로 분할해서 나누어주는 일 같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이라도 완전한 사랑을 흉내 내며 닮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이 믿음으로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조금씩이나마 메워가고 있다.



**표지 그림: 앨리스 달튼 브라운, <아이들의 장난감 블록(세로)>, 1966

keyword
이전 05화집공부 2-5화: 엄마가 새롭게 배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