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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J Sep 07. 2024

희극

연기자

이와달리 현실에는 자의던 타의던 너무나 많은 것이 내 인생에 달라붙는다. 흔히 할머니 세대에서 말하던 밭에서 일하다가도 애를 낳았다는 그런 시기에서, 집에 의사를 모시고 오거나, 무조건 출산은 병원에서 한다던가(그런 것이야 뭐 당연히 산모와 아이의 건강을 위한다지만), 이후에는 때에 따라 반드시 맞아야 하는 주사와 약이 누구의 의지와도 상관없이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하고.. 온전히 부모의 뜻대로 그 소중한 것을 부담 없이 키울 수 없는 환경이 달라붙는다.


산부인과에서의 순간을 일례로 설명했지만, 실은 최근의 대부분 부모는 아기를 낳기도 전에 이미 아이를 어떻게 만들고 이 세상에 내보낼지 구상한다. 신은 그와 그녀에게 생명체를 탄생시킬 수 있는 권한만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인생에도 신의 권한을 부여할 수 있음에 도전한다. 앞서 말한 무한한 "0"이 될 것에게 1이 되라고 강요된다. 탄생의 축복에서 나아가 굳이 그 고귀한 것의 자유와 현재, 미래를 본인의 좁디좁은 세상을 토대로 점 지으며 평생토록 희극적인 인생을 지원할 수 있노라 믿는다.


불행하게도, 이런 시대적, 문화적 흐름에 따른 인생은 채플린의 명언처럼 멀리서만 봐야 “희극”으로 보인다.

굳이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약소국으로써 수많은 외세의 침략, 이념분쟁으로 이어진 분단의 아픔, 압축된 고도성장 등이 원인인진 몰라도 우리 사회는 성공이란 이름의 인생희극을 앞다투어 복제한다. 그리고 한 번의 완벽한 성공이 있다면 모두들 그것을 천편일률적으로 모방하여 살아간다. 아까말한 산부인과의 일례를 시작으로 유치원부터 시작된 대학입시 인생, 취업, 결혼, 심지어는 실버타운에서 장례풍습까지도.. 내가 좋아하던 것은 이미 잊은 지 오래다.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판박이다.


그러고는 그렇게 남들과 같은, 복제된 궤도에 올라탄 것에만 성공해도 기뻐하고 일부분 성공했다고 여긴다. 진짜 내 인생의 “희극”에 도달한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 도달하지 못한 이는 세상에서 어긋나 버린 검은 머릿속 새치와 다를 게 없다고 느껴지게 만드는, 너무도 백치미 넘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각자의 개성과 선택권을 무시한 채 동일한 문화, 가치관에 우리 자신을 가두는 것은 가정과 사회가 일종의 "미시적 파시즘"을 행한다고 본다. 더 문제인 것은 이런 강요는 정당한것이고, 사랑이라고 여기는 상황이 사회와 가정 곳곳에 만연하게 퍼졌다는 것. 이렇게 살지 않는 가정과 사회는 유교적 마인드 안에서 별종이 되고 사회에서 도태되는, 대충 들여다봐도 너무 우습다.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보면,

격동의 90년대를 겪어본 사람으로서, 작금의 현실보다는 최소 수 배 아름다웠다. 동년배 친구들과는 경쟁이 적었고(그 경쟁자체도 너무 순수했다.) 친구집이 임대아파트는 커녕 온 가족 원룸에 살아도 아무 거리낌 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엄마가 쟤네 집 차는 소나타니까 놀지 말라고도 안했다. 친구가 좋은 일이 있으면 진심으로 기뻐했고 슬픈 일이 있으면 내일처럼 슬펐다.  친구가 잘하는 일이 1이었으면, 나는 2를 잘하니까 2에 몰두하면 되었다. 돈이 될 거 같거나 남들이 보장하는, 엄마아빠가 하라는 남들 보기 괜찮아 보이는 직업이 아닌, 진정으로 내 마음속에서 불러일으키는, 내가 좋아하는 걸 할 수 있다는 이처럼 다채로운 인생 속에 세상은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다 보니 왠지 마음도 여유로웠는지 여름에도 현재처럼 더웠던가 싶고, 겨울엔 비싸서 부모님 등골 후려치는 700 거위털파카 없이도 잘 지냈던 것 같다. 다 환경과 마음의 차이다.

아침엔 학교 가기 싫은 적이 없고, 부모님도 보다 안정된 가정이 연속될 수 있음에, 본인들 목표에 가까워질 수 있음에 재밌게 직장생활을 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다수가 공평하니 다수가 행복했다. 응답하라 시리즈도 그래서 계속 그 시절을 조명하며 추억한다.


그때에는 공무원만 직업으로 삼는다거나, 뻔하디 뻔한 남들과 같은 직업을 갖으려 하지도 않았다. 저학년 때 장래희망을 조사하면 그놈의 과학자, 대통령 말고도 개그맨, 비보이, 문방구사장, 슈퍼사장, 자장면집 사장 별별 직업이 다 나왔다. 눈앞에 경쟁자가 줄어듬에 즐거웠고 서로 응원했다. 사회적으로도 다음, 네이버를 포함한 많은 기업들이 창업되었고, 한국인의 나뭇가지가 무수히 뻗어나가는 그야말로 찬란한 시절이었다.


그의 계획, 그 계획의 섭리대로 탄생된 생명이 단지 자유의지에 따라 순수하게만 자라나는 게 그렇게도 어려운 것일까? 계획의 일부로써 본능적 행태가 아닌 우리가 만들고 강요하는 이런 과정들이 과연 “신”인 그의 계획의 일부일까?


낮의 태양과 밤의 별도 보지 못한 채 모국어도 못 읽는 유치원 시절부터, 왜 공부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공부만 해서 단 한 번의 인생시장인 수능을 치르고 나니, 결국 삼성일가의 톱니바퀴 97123호로 팔려 가는 것, 판검사가 되어 공노비 돌쇠가 되는 것, 시간이 없어 햄버거나 먹고 밤낮없이 당직 서며 의료행위를 하다 정부의 압박에 이제는 사람 살리는 그 일마저도 못하게 되려고 그렇게 아등바등 사는가?


세상의 모든 축복을 얻어 탄생한 것에게 고작 레버리지 당하는 인생을 보여주는 게 그렇게도 “그”가 계획했던 일일까? 아니지 굳이 멀리 우주에서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선이 아니라도, 조금만 숨좀 돌려도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가 느껴진다.

OECD에서 매년 발표해주는 "너네 나라는 뭔가가 이상해" 랭킹에 매번 1위를 하는 대한민국이, 이제야말로 좀 깨닫고 위기마다 발휘되는 회복력 최상위 실력을 앞세워 이제는 뭔가를 좀 깨닫고 DeTox 돼야 하는 시기를 맞이하면 좋겠다.


탄생 이후 유일하게 자유 의지로 즐거웠던, 진정으로 본인의 행복을 위해 “좋음”을 실천하던 시절은 아빠 몸속에서~엄마 몸속으로 헤엄치던 그때만이 즐거웠던 시절 아니었나싶네.


다들 오늘은 희극연기를 하던 비극배우인 자신에게

수고 많다고 격려하는 하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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