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J Sep 15. 2024

비극

알랭 드보통의 사랑학에 따르면, 사랑할 때 느끼는 행복은 모든 연애의 감정이나 연애 상황에서 느껴지는 상대방과 무엇을 행하는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다. 내가 누군가의 계획의 일부라는 관점에서 나는 이 논리가 삶의 전반에 모두 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모습을 사랑하려면 어떤 것부터 시작해야 할까?


내가 내 세상의 중심이자 항상 첫 번째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잘하거나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고, 잘 못하는 점, 부족한 점도 나의 일부로써 바라보고 사랑해야 된다.


세상의 중심이 나라는 것은 언뜻 보면, 유아기적에 흔히 보이는 모습으로 혼동될 수 있다. 유아기 때는 앞서 말한 소중한 존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에 울거나, 소리 지르거나, 꼭 그렇지 않아도 내 주위 모든 것이 나를 위해 돌아간다. 이런 모습은 청년기 등을 거쳐 자연스레 나의 중심적 세상과 나 이외 그들의 중심적 세상이 결합되며 적절히 타협되고 조율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마침내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된다. 건강하게 이런 과정을 거쳤을 땐 남에게 비칠 내가 중요한 게 아니게 된다. 물론 이런 과정 속에는 사회의 도움이 필요하다. 사회의 적절한 분위기 조성 속에 나의 내면이 강인해지면 사회 문화적으로 발생되는 나와 남들과의 비교되는 열등감은 마음껏 느끼더라도 강하고 빠르게 벗어날 수 있다. 콤플렉스에 빠지지 않고 덤덤하게, 마음 넉넉히.

마치 지구가 태양이 되고 싶어 하지 않고 묵묵히 45억 년 동안 자기 일을 하듯이 나로써 충분히 지내다 보면, 옆에 달처럼 빛나는 것들이 계획의 일부로써 따라올 것이다.


독일은 유아기 이후 이런 인간 내면의 성장을 위해 필수로 성교육과 정치교육, 환경교육을 주요 교과로 하여, 본인의 고유 능력들을 밖으로 이끌어낸다고 한다. 즉 교육이란 단어의, 초기 고유 뜻대로 e(밖으로)-duce(이끈다)한다는 건데, 독일 교육은 성교육을 통해 가장 먼저 "내가" 나의 자아와 사회 윤리, 통념 속에서 정체성을 찾고, 정치교육을 통해 타인과의 유대를, 환경교육을 통해 자연과의 어울림으로 이어져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울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인간다움을 가르치는 교육의 목표라고 말한다.


세상을 먼저 살아온 자들이 교육이라는 진정한 의미를 고민하여 자라나는 탄생석들에게 알려주고 본인 스스로 자신과 타인과 세상을 판단하고 이와 어울려 건강하게 살아가게끔만 지원한다. 나머지는 알아서 할 일이다. 그게 먼저 이 시대를 겪은 사람의 할 일이다.


반면 우리의 사회는 공교육, 사교육을 막론하고 이와 얽힌 다양한 인과와 이익추구, 더불어 유교적인 사상에 입각된 맹목적인 교육을 통해 이런 교육이 우리에게 돌아오지 못한다.(조금 과장하면 절대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 심지어 이런 행태는 사회에 의해서만 강요되는 것이 아닌 부모에 의해 자식에게 전달된다. 독일에 비하면 꽤나 불합리한 교육을 받고 살아가게 된다. 이런 좁은 틀 안에서 사는 "나"와, 독일의 아이들처럼 옳은 것과 옳지 못한 것을 스스로 파악하고, 그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고, 작은 의견이던 큰 의견이던 사회에서 공감받고 사회의 반영됨을 느껴보고 심지어는 사회가 바뀌는 현상도 어릴 때부터 경험한다면, 프롤로그에서 말한 새의 진화처럼 인간의 지능에 맞춰 가장 인간답게 진화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잘난 "미-적분"과 "다음 소설에서 화자의 심정"을 알아내는 것보다, 나를 알게 되고 남을 알게 되고 세상을 알아내는 인간적 진화를 불러일으키는 순간이 하루빨리 도래하길 가슴깊이 기대한다.


흔히들 행복을 찾기 위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게 목표라고 쉽게들 말한다. 그렇다면 행복으로 가는 순간까지의 길은 대부분 비극일 수밖에 없는데, 행복을 찾을 땐 이와 반대가 되는 불안감을 줄이는 거나 지금은 없는 걸 만들어내는 게 필요한 게 아닐 거다. 행복이란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이 순간순간에도 계속 탄생하는 "좋음" 으로써 너무도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이 바라보는 내가 남들의 입장에서 행복해 보이려면 뭘 하면 좋을까가 아니고, 내가 지금 누워있고 싶은 게 좋으면 누워있고,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게 필요하면 그걸 쫒으면 된다. 제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부모라도 타인과 자식의 좋음을 강요할 수 없고, 맛있음을 강요할 수 없다. 행복함의 길과 척도는 내 안에 있고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좋음의 가치를 판단하는 무게의 중심이 반드시 내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내 주위로 섭동 없이 올바르게 나와 타인과 자연의 모든 계획의 일부인 인생들이 공전한다. 내 인생은 절대 객관적으로 보지 말고, 주관적으로 바라보자.


위에서 말한 시대적, 문화적 흐름에 당신과 내가 사는 이 세상이, 무궁한 발전과 더불어, 세계 최고의 청년과 노인의 자살국가, 비혼과 비출산 국가의 오명을 얻은 것은 이미 작용 반작용의 법칙을 받아 아쉽게 지나버린 현실이다. 우리의 이런 모습은 "그"의 계획에 존재해야 할 것들이 스스로 "EXIT"를 쳐버리는 꼴인데, "그"로써는 참으로 달갑지 않을 것 같다.


재밌는 건, 이미 답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하이퍼 저출산국가, 탄생한 지 얼마 안 된 아이가 우울증을 앓는 비율 세계 최대, 이 우울증을 겪어낸 청년이 세계최고의 자살률-비혼-비출산 3관왕 그랜드슬램 달성, 또다시 청년 3관왕을 이겨낸 노인들이 세계 최고의 빈곤율, 자살률을 나타내며 이미 현시대의 우리 남녀노소 모두가 이 체제를 불쾌해하는 수준이 아니라 극도로 혐오하는 체제라고 말이다. 탄생의 위대함을 거쳐 희극의 인생이라고 믿고 있던 "나"는 결론적으론 비극에 도달하고 있다. 비극은 역시나 멀리서 볼 필요 없이 나의 내면에서만 바라보면 금방이고 알 수 있다.


베트남 전쟁 이후 발발된 전 세계의 68운동과 같이, 변화의 씨앗이 필요하다. 모든 잘못된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도록 리뉴얼이 필요하다. 독일이 조상의 과오를 무릎 꿇어 사과하고 다시 무릎 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잘못함이 탄생한 "1"은 진정한 회복의 감정으로 다시 "0"으로 만들어 정비하고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그"의 계획의 일부로써 가장 올바르게 가는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