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rth
사람이, 동물이, 벌레가 한날한시에 계획적으로 탄생한다. 계획된 임신을 말하는 건 아니고,
우주너머의 그 대단한 신이라고도 불리는 어떤 것이 계획해 놓은 섭리에 따라 생각할 새도 없이 너무나 본능적으로 행해진 프로세스에 의해 무언가가 탄생했다.
무언가가 탄생하던 그 시기, 쉽게 인간을 예로 들자면 인간을 탄생시킨 작지만 대단한, 신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부여받은 두 인간이 낳은 그 작은 것에는 부디 건강하게만 자라 너도 신의 능력을 부여받기만을 바랬을 것이다. 심지어는 그 능력조차 누군가는 쉽게 부여받고, 누군가는 너무나도 어렵게 부여받기에 그저 탄생하는 것에게는 별다른 부담을 쥐어주지 않는다.
한편, 물체도 탄생했다. 생명체를 도와 유기적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게 그에 비례하여 넉넉하게 배치하였다. 그 와중에는 조금 더 귀하게 쓰일 것도 있을 것 같아 찾기 힘들게 감춰놓기도 했다. 이걸 찾아내는 건 나름 재밌다. 원자가 그러했고, 전자도 그러했다. 그렇게 우주가 탄생하고 지구가 만들어지고 우리와 모든 것이 이 땅에 섰다. 이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우리는 서로 도와가며 계획의 일부로써 살아갈 수 있다. 아주 쉽다.
그러나, 감정도 탄생했다. 모든 것의 원인인 “감정”은 보다 많은 것을 탄생시켰다. 기쁨, 슬픔이 그러했고, 이를 기반으로 한 욕심과 우울이 그러했다. “그”가 드라마 더 에이트에서처럼 인간과 물체가 아름답게 살아가기만 바라고 시작했던 계획이 재미없었어서 그랬는지 모를 일이지만 이 감정이란 것은 탄생 의도와는 다르게 인간이 신의 권리에 도전하기 위한 또 다른 도전에 반영되보였을 것이다.
모든 것에는 탄생의 이유가 있고 알맞은 쓰임이 있다. 그 쓰임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형태에서만이 계획의 일부이자 일원인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다.
탄생하는 모든 것에 그 찬란함에만 우리가 신기해하고 좋아했던 것처럼, 신의 노림수인 감정에 걸리지 않고 의도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 어쩌면 가장 순수해서 섭리대로 살아갈 수 있는, “신”이 가장 만족해하는 시기가 아닐까.
따라서 탄생을 거치기 위해 힘들었던 과정을 거친 모든 것에는 이유를 불문하고 아낌없이 찬미를 보내야 한다. 보내고 나면 크게 할건 없다. 그냥 “렛잇비”다.
탄생 위에다 추가로 좋고 나쁨을 반영할 필요도 없으며, 더 욕심내거나 모자라서 우울함을 반영할 필요도 없다. 너무나도 쉽다.
시작이자 변화되지 않음, 그대로를 표현하는 0은 인류가 표현하는 가장 작은 숫자이지만, 동시에 무한을 표현할 수도 있다. 그 어떤 숫자도 0보다 위대하지 못할 수 있다. 0을 1로 만드는 순간 모든것에 변화가 일어난다. 그건 계획자에게 다른것을 추가로 계획하게 만들고 그를 귀찮게 할 수 있다. 그는 귀찮으면 탄생을 반대로 만들 능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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