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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Dec 07. 2020

Dublin, 너를 보내며

유럽의 열두 수도 이야기 - 열둘. 아일랜드, 더블린(1)




더블린에 처음 발을 디딘 건 2014년 3월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더블린을 떠났던 나는 다시 또 1년이 지났을 때 그곳으로 돌아가 반년쯤을 더 그 도시에서 살았다. 그러니까 내가 더블린에서 보낸 시간은 총 2년 6개월. 셈을 해 보면 쑤저우에서 보낸 시간과 한 달 남짓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이상한 일이다. 쑤저우는 나에게 '내가 살았던 하나의 도시'로 남았는데 더블린은 나에게, 이토록 애틋해서 감히 쉬이 돌아갈 수도 없는 '나의 도시'로 남았으니 말이다.  





한때 내가 'Home, Sweet home'이라고 불렀던 나의 도시, 더블린.



처음 만난 더블린은 평화로웠다. 낮은 건물들 위로 유유자적 펼쳐진 하늘을 보았을 때, 처음부터 이 도시가 조금 마음에 들었다. 서울을 사랑했지만, 서울에서 사는 일은 종종 나를 지치게 했었다. 그 지침을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서울로부터 도망쳤고, 그렇게 비행기로 열다섯 시간을 날아가 도착한 곳이 서울과 조금도 닮아 있지 않아서 어쩐지 조금 마음이 놓였다.   


서울이 언제든 터질 준비가 되어 있는, 바쁘고 활기찬, 웬만해서는 잠들지 않는 도시라면 더블린은 늘 비슷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소소하게 쾌활한, 봄에 부는 산들바람 같은 도시였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더블린의 평화로움을 좋아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더블린을 너무 심심해했다. 그 당시 우리는 (여기서 '우리'란, 더블린에서 내가 만난, 다양한 나라에서 날아온 내 친구들을 말한다.) 더블린을 사랑했지만, 그럼에도 더블린에서는 할 게 없고, 날씨는 정말 지긋지긋하며, 여행객들이 뭘 보기 위해 더블린으로 여행을 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데에 대체로 동의했다. 사실 더블린은 '뭔가 가난한 예술가들이 잔뜩 살고 있을 것 같은 묘한 이국적 분위기' 같은 것 말고는 별로 여행객을 사로잡을 만한 구석이 없어 보였다.


 



더블린 중심가에 세워져 있는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동상



어쩌면 그렇게 날씨가 좋지 않아서, 집 안에 틀어박혀 있거나 펍으로 술을 마시러 가는 것 말고는 별로 할 게 없는 도시라서, 더블린은 그토록 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작은 도시에서 배출해 낸 세계적 대문호만 해도 꽤 여럿이다. <율리시스>의 작가인 ‘제임스 조이스’를 위시하여,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인 ‘조너선 스위퍼트’,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와 '조지 버나드 쇼', <행복한 왕자>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등을 써낸 ‘오스카 와일드’,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인 ‘사무엘 베케트’에다가 <드라큘라>의 작가인 ‘브램 스토커'까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수많은 작가들이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인 더블린 출신인 것은 다소 놀랍다.


더블린은 문학의 도시인 동시에 음악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U2'가 탄생했고, EDEN이 더블린 출신이며, 한국인이 유난히 사랑한다는 음악 영화 <Once>와 2016년에 개봉한 또 다른 음악 영화인 <Sing Street>가 더블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더블린이라는 이름 앞에는 종종 '예술의 도시'라는 수식어가 붙고, 실제로도 더블린의 중심 거리 중 하나인 그래프턴 스트리트(Grafton Street)에서는 늘 노래하거나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거리의 예술가들을 볼 수 있다.

 



나로 하여금 늘 내가 '더블린'에 있다는 걸 일깨워 주곤 하던 그래프턴 스트리트의 풍경


그러니까,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블린의 분위기 자체를 좋아할는지도 모른다. 무언가 이 도시를 서성이는 것만으로도 예술을 즐기고 있는 듯한 느낌에 젖어들 수 있는 그러한 분위기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것도 '하루 이틀의 일'일뿐이다. 이 도시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거리의 예술 말고도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 최소한 집주인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영어 실력. 내 힘으로 방세를 제때제때 낼 수 있게 해 줄 일자리. 함께 기네스를 마시러 갈 수 있는 친구나 연인. 그리고 내 나라와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이 곳까지 날아와 결국은 찾아내고 싶었던 그 무엇.


더블린에서 보낸 2년 6개월의 시간은 결국 ‘그 다른 무언가’들을 찾아내기 위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더블린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리피강(River Liffey).



늘 그러하듯, 이 도시의 과거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면, 더블린은 아일랜드에서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곳이다. 450년 경, 성 파트리치오에 의해 많은 더블린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했고 이후, 이곳에서는 켈트 문화가 꽃을 피웠다. 하지만 9세기경, 바이킹이 더블린으로 쳐들어왔고 그 이후 켈트인과 바이킹은 더블린을 놓고 300여 년 간 혈투를 벌였다. 그렇지만 1171년, 이곳을 차지한 것은 잉글랜드의 앵글로 노르만인이었고 이후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게 된다.


잉글랜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은 끈질기게 이어졌고, 그만큼 아일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탄압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다 아일랜드인들의 반영 감정이 결정적으로 심해진 것은 19세기 중반에 일어난 ‘아일랜드 대기근(영어로는 'Great Famine’, '감자 대기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때였다. 당시 아일랜드에서 난 대부분의 작물을 영국이 가지고 가버렸기 때문에, 아일랜드인들은 감자를 주식으로 삼게 되었다. 그런데 아일랜드인들이 키우던 감자 품종에 전염병이 생기면서 1848년 아일랜드 대기근이 벌어졌다.


이때 아일랜드에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병사하거나 아사당했고, 또 다른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민을 떠났다. 영국의 한 언론인은 아일랜드를 두고 '전 국민이 거지들인 나라'로 묘사했을 정도로 당시 아일랜드의 상황은 처참했다. 이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아일랜드를 떠났던지, 그 이후 1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일랜드는 당시의 인구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이때 아일랜드에서 부족했던 것은 감자뿐이었고 다른 음식들은 넘쳐 났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 그 물건들을 전부 브리튼 섬으로 운반해 가버렸다는 사실이다. 아일랜드에서는 영국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는 묵살당했고, 영국은 구호품을 푸는 대신 이를 아일랜드인들의 게으름 탓으로 돌려 버렸다. 당시 기아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간 아일랜드인들의 삶 역시 평탄치 않았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얀 흑인'으로 불리며 차별받는 삶을 살았다. 아일랜드인들은 미국뿐 아니라 수많은 나라에 흩어져 힘든 삶을 영위해야 했고, 이런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차별은 매우 흔한 것이어서 1970~80년 때까지만 해도 ‘No Irish, No Blacks, No Dogs’라는 차별적 구호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영화인 <타이타닉>에도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분한 남자 주인공 '잭 도슨' 역시 아일랜드인이라는 이유로 천대받으며, '타이타닉 호'에 탑승할 때도 모든 아일랜드인들은 3등석에만 탑승하도록 하는 격리 조치가 등장한다.  


이런 아일랜드인들의 독립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그 이후 일어난 수많은 무장봉기, 정치적 싸움, 아일랜드 내전 등등을 모두 다 여기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어쨌든 아일랜드는 지난한 투쟁을 통해 1937년, 자신들이 더 이상 ‘영연방’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며 대통령직을 신설하고 신헌법을 선포하였다. 또한 2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도 ‘윈스턴 처칠’은 어떻게든 아일랜드를 연합군 편으로 참전시키려 하였으나 아일랜드는 참전을 거부하고 중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1948년, 영국 국왕의 아일랜드 내 지위를 박탈했으며 이때까지도 아일랜드의 영연방 탈퇴를 인정하지 않고 있던 영국 역시 결국 1949년 아일랜드의 영연방 탈퇴를 승인했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나라라서, 종종 대한민국과 아일랜드를 닮은 나라라고들 한다. 이웃해 있는 섬나라에 의한 식민 통치, 독립을 위한 지난한 투쟁, 남과 북이 결국 다른 나라가 되어버린 현실, 그러한 역사 때문에 생겨난 '한'의 정서, 음악과 춤 그리고 술을 즐기는 민족성까지, 닮은 점을 찾아내려고 하면 꽤 여러 가지를 찾아낼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아일랜드와 대한민국은 그리 비슷해 보이지 않는다. 한 나라에는 '자연과 느림'이 존재하고, 다른 한 나라에는 '도시와 빠름'이 존재하니까. 사실 아일랜드와 대한민국의 차이는 더블린과 서울의 차이만큼 크다. 그리고 만약 더블린이 서울과 닮은 도시였다면, 더블린에서의 삶에 익숙해지는 것은 쉬웠겠지만 더블린을 그다지 사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나에게 더블린은 서울과 무엇 하나 닮지 않아서 비록 그 도시에서 살아남는 일은 힘들었지만 이렇게 잊지 못하는 애틋함으로 남았다.

 








* 더블린의 면적은 117.8 제곱킬로미터로 우리나라 수원보다 그 면적이 조금 작다. 수원의 면적은 121 제곱킬로미터이다. 더블린의 인구는 2019년 기준으로 138.8만 명인데 수원의 인구 124.1만 명이므로 인구 밀도 역시 수원보다 조금 높다고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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