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열두 수도 이야기 - 열둘. 아일랜드, 더블린(2)
더블린에서 가장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것은 '비'와 '무지개', 그리고 '기네스'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더블린에 살면서 저 세 가지를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섬이다 보니, 바람이 많이 불고 그 바람 속에 툭하면 비가 섞여 내리는 것이 더블린 날씨의 가장 큰 특징이다. 아침에 해가 쨍쨍 비쳤다고 해서 결코 안심할 수는 없다. 아침엔 따뜻한 봄인 척하다가도 정오엔 장마철처럼 비가 내리고 그러다 비가 그치고 나면 갑자기 쌩쌩 겨울의 찬바람이 부는 곳이라, 더블린에서는 하루에 사계절을 다 겪을 수 있다고들 한다.
이런 날씨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면 한동안은 이 날씨 때문에 곤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지금 내리기 시작한 비가 단 3분 후면 갑자기 싹 그칠 수도 있고, 지금 쨍쨍한 저 하늘에서 또 3분 후면 갑자기 비가 내릴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처음엔 가방 속에 늘 우산을 넣고 다녔다. 그런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싶으면 우산을 쫙- 펼쳐 드는 나와 달리, 더블린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마냥 태연하기만 하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웬만한 비 앞에서는 우산을 찾지 않는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래도 비가 꽤 내린다' 싶은 빗줄기 속에서도 아이리쉬들은 하늘 한 번 올려다보지 않고 가던 길을 잘만 걷는다. 처음엔 마냥 신기하게만 느껴졌던 그들의 모습을, 내가 똑같이 따라하기까지는 두어 달쯤 시간이 걸렸다.
2014년 5월, 아일랜드에서 살기 시작한 지 두 달쯤 된 그 봄엔, 나도 늘 비를 맞고 다닌다. 예쁘게 고데기를 잘 넣은 머리 같은 것은, 더블린에 살기 시작한 이후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대신 언제든 후드를 뒤집어쓸 수 있도록 후드 달린 티셔츠나 점퍼가 유용해진다.
"알았어. 날씨가 엉망이지. 그렇지만 그만 투덜대.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그만 돌아가라니까."
더블린의 날씨에 대한, 얼마나 많은 불평을 들었던 것인지 나의 첫 영어 선생님은 '날씨'의 '날-' 정도만 이야기가 나와도 살짝 예민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러니까 그는, 내가 네 겹의 옷을 껴 입고 다닐 때도 반팔 티셔츠 한 장만 입고 다니던 그는, '더블린 날씨가 뭐 어떻다는 거야?'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내가 만난 그 어떤 더블린 사람들도, 자신들의 도시가 보여주는 날씨에 대해 별다른 불만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나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태도를 닮아갔다. 괜찮아. 이게 더블린이야. 더블린은 원래 이래.
그래서 갑자기 비가 쏟아져도 태연하게 건물 처마 밑으로 들어가, 곧 비가 그치겠지, 생각하며 서 있던 시간들. 우습게도 지금은 그 시간들이 마음 아프도록 그립다.
그렇게 갑자기 내린 비가 또 그만큼 갑자기 그치고 나면, 더블린의 하늘은 마법을 부리곤 했다. 한국에서 사는 동안, 무지개를 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에 없는 것을 보면, 또렷한 무지개를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더블린에 도착해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갑자기 하늘에 붉은 선이 생기기 시작하며, 그것이 빨주노초- 의 색깔로 선명해지는 것을 보았던 순간, 그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가던 길을 갔고, 하늘도 아무렇지 않게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나는 숨까지 멈추고 서서 뚫어져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쩌자고 더블린은 이렇게 아름다울까.'
그때 그 자리에 서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사실 더블린은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지만. 사실 더블린은 그냥 그런, 작고 소박하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런 도시에 지나지 않지만. 그때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내가 어떻게 이 도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었다.
더블린에서는 툭하면 무지개를 만났다. 자주 만났고, 그래서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2년 6개월이 지난 후에도 나는 무지개에 대해 덤덤해지지 않았다.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고, 볼 때마다 탄성을 질렀고, 그 탄성과 함께 무지개가 생겨났다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는 했다. 내가 '비 내리는 더블린'에 관대해진 것도 어쩌면 그 빗방울들이 공기에 숨어 있다가 결국 무지개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 때문인지도 몰랐다.
모든 것엔 값을 지불해야 하는 법이니까. 무지개를 볼 수 있다면, 소나기도 참아내야 하는 거니까.
그렇게 비가 내렸다 그치고, 무지개가 생겼다 사라지며, 하루의 해도 저물어 갈 때쯤 되면 더블린 중심가는 착하고 친절하기만 하던 낮의 모습을 살짝 벗고 내가 미처 모르고 있던 밤의 얼굴을 조금씩 드러내고는 했다. 나는 '더블린'을 이야기했을 때 '제임스 조이스'와 영화 '원스'를 가장 먼저 떠올렸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더블린 하면 '오호- 기네스!'하고 외치곤 한다는 것을 이 도시에 온 이후에야 알았다.
기네스? 흑맥주? 그게 뭐, 별거라고-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엔 내가 틀렸다. 더블린에서 사는 동안 소나기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더블린에서 살 거라면 기네스를 피해서도 안 된다. 나는 술의 맛도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고, 가벼운 와인 몇 잔을 제외하고는 술을 잘 마시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더블린에서 산 지 일 년쯤 지났을 때는 왜인지 기네스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건 기네스의 훌륭한 맛에 대한 사랑이기도 했지만, 더블린에 대한 사랑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더블린을 사랑한다면 기네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기네스를 사랑한다면 더블린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기네스는 ‘아서 기네스’가 1759년에 버려진 양조장을 임대해 만들기 시작한 맥주이다. 최초로 수학자를 고용해 제품 관리를 했던 맥주로도 유명한데, 그 이전까지는 경험에만 의존해 들쑥날쑥했던 맥주의 맛을 수학적 기법을 통해 일정하게 유지했다고 한다. 이에 따른 결과는 대성공이어서 기네스 맥주의 맛은 엄청나게 향상되었고, 그 이후 기네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맥주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약한 맛의 ‘라거(lager)’가 대세라 강한 맛의 흑맥주인 기네스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편이다. 또는 캔맥주로 기네스를 처음 만났다면, 기네스에 대한 첫인상이 그다지 좋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직접 뽑아주는 기네스를, 그 부드러운 거품과 함께 즐겨본다면 기네스에 반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질 거라고 확신한다.
기네스를 곧잘 마시는 나에게도 사실 이 맥주는 꽤 강한 편이어서 여기에 종종 '블랙커런트 시럽(blackcurrant syrup)을 더해 마시곤 했다. 블랙커런트는 베리의 일종으로, 이것으로 만든 블랙커런트 시럽은 달콤한 맛을 낸다. 대부분의 펍에서는 '기네스 앤 블랙커런트'라고 말하면 추가 금액 없이 시럽을 더해 준다. 가끔 블랙커런트가 없다고 대답하는 펍이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역시 이에 대해서도 호불호가 갈려서, 블랙커런트를 더한 기네스를 마시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맥주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블랙커런트를 더해서 마시든 그냥 마시든, 더블린까지 왔다면 기네스 한 잔 정도는 마셔보아야 한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더블린에 대한 예의이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내가, 더블린에서 살아 남기 위해 선택한 두 번째 일이 '펍에서 일하기'였다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 중 하나이다. 더블린을 찾는 관광객들이 주 손님층이던 그곳에서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다양한 취향을 가진 손님들의 주문을 알아듣기 위해서 최소한의 주류 지식을 갖고 있어야 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Lager와 Wheat Bear(밀맥주)와 Ale(에일)을 구분 못하던 나는,
"여기에 Wheat Bear 뭐뭐 있어?"
라거나,
"아이리쉬 라거 좀 추천해 줄래?"
와 같은 간단한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서 결국 술에 대해 공부하는 법을 택했다. 그래서 술을 잘 마시진 못해도 나름 아는 건 좀 있는 웨이트리스가 된 이후,
"아일랜드 맥주 중에 뭐가 맛있어?"
라는 관광객의 질문을 받으면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당연히 기네스지!"
라고 대답하고는 했다. 너 기네스 몰라? 흑맥주 안 좋아한다고? 그래도 기네스도 안 마셔보고 더블린에 가봤다고 말 못 할걸? 기네스가 너무 쓰면 달콤한 시럽을 좀 넣어서 마셔볼래?
그렇게 손님들에게 기네스를 추천할 때, 그리고 그 기네스를 마셔본 이가 '오호-'하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일 때 내가 느꼈던 그 뿌듯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기분 좋은 자랑스러움을, 더블린에 대한 내 애정을 말하지 않고 설명할 방법이 있긴 할까.
만약 기네스에 대해, 또는 그냥 맥주에 대해, 또는 그냥 더블린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Guinness Storehouse)'에 방문해 볼 수도 있다.
2000년에 개관한 이래, 수백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간 ‘기네스 스토어하우스’는 쉽게 말해 ‘기네스 박물관’ 정도로 볼 수 있다. 별로 할 것 없고 볼 것 없는 더블린에서 '기네스 스토어하우스'는 그래도 나름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 줄 만한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양조장 단지 안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에서는 기네스 맥주와 관련된 다양한 전시, 체험 등을 즐길 수 있고 또 한 잔의 기네스를 직접 따라 마셔볼 수도 있다. 건물 꼭대기 층에는 바와 레스토랑, 카페 등이 있는데 이 음식점들을 이용하지 않아도 더블린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으니, 이곳을 방문했다면 꼭대기층까지도 꼭 올라가 보자.
이곳에서 방문객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시간은 바로 직접 '퍼펙트 파인트'를 따라보는 시간이다. 펍에서는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맥주잔을 '파인트 잔'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생맥주를 시킬 때의 기본 잔이 된다. 물론 파인트 한 잔을 다 마시기가 부담스러울 때는 1/2 크기의 Small Pint를 주문할 수도 있다.
기네스로 이런 퍼펙트 파인트를 만드는 방법은 단순한 듯 까다롭다. 일단 다른 파인트 잔을 이용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다. 실제로 바에서도 자기가 주문한 맥주를 그 맥주의 파인트에 따라가지 않으면, 잔을 바꿔 달라고 요구하는 손님들이 있다. 너무 바쁠 땐, 그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든 기네스만큼은 늘 기네스 파인트에 따른다.
기네스는 한 번에 끝까지 따라서는 안 되며, 처음 따를 때 파인트 잔의 3cm 정도를 남겨 두어야 한다. 그 후, 90~120초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나머지 3cm를 채워 주어야 보기 좋은 거품을 만들 수 있다. 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기네스의 거품이 올라온 높이가 저마다 다 다르다. 잘 따른 기네스는 파인트 잔에서 2cm 정도 위까지 거품이 부풀어 오른다.
이렇게 직접 기네스를 따라 보는 건, 별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나름 재미있는 경험이다. 기네스 스토어하우스는 더블린의 중심가에서 도보로 30분쯤 떨어진, 매력 없고 무미건조한 지역에 위치해 있긴 하지만, 다들 더블린에서 별로 할 일이 없을 테니 굳이 이 도시까지 찾아왔다면 기네스 스토어하우스도 한 번쯤은 다녀와 볼 것을 추천한다.
이렇게 더블린에 와서 한 번쯤 우산 없이 빗속을 거닐어 보고, 비가 그친 후의 무지개도 만나 보고, 기네스도 한 잔쯤 마셔 보았다면 그래도 더블린을 어느 정도 제대로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후에 기분이 좋았다면, 아마도 당신도 이 별것 없는 더블린을 왠지 마음이 가는, 딱히 예쁜 곳도 없는데 괜히 아름답다고 말해주고 싶은, 나중에 생각하면 얼마쯤은 애틋한 기분이 들곤 하는, 그런 도시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