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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8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0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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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에버갤러리에서 진행된 민 작가의 개인전 [만약에 뽀뽀가 없다면]을 봤다. 대학원 친구가 토크에 참여해서 보러간 것도 있지만, 무성애에 관한 회화 작업들이라는 점이 무척 궁금했다. '무'를 어떻게 재현할 수 있는가? 이는 종종 무성애 소재의 영화들에서도 지적되는 것이다. 작년 관람한 한 국내 단편영화는 무성애가 무엇인지, 마치 위키피디아에서 긁어온 듯한 설명조 대사를 집어 넣었다. 리투아니아 영화 <슬로우>는 최근 국내 OTT에 유통되며 "섹스 없이 사랑이 되나요?"라는 부제가 붙여졌다. '무'를 시각예술로 재현하는 것은 그것을 텍스트로, 말로 설명하는 길로 우리를 자꾸만 유혹하고, 그렇기에 '무성애' 인물을 재현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겪는다. 때문에 (오늘 토크 패널로 나선) 조윤희의 글 "명사 혹은 형용사로서의 무성애"에서 주장되는 것처럼, 무성애를 '무성애' 혹은 '무성애자'로 그려내기보다 '무성애적'이라는 형용사를 대상 앞에 붙임으로써 성애에 반(anti)하는 무언가를 건져올릴 수 있다. 그러한 맥락 위에서, 민의 회화들은 놀이를 다룬다. 전시된 작품의 대부분은 가위바위보, 동동동대문을열어라, 술래잡기, 인형놀이, 손가락씨름 등 놀이를 제목으로 사용한다. 원초적인, 유년기 시절 놀이터나 친구의 집에서, 쉬는시간의 교실에서 즐기던 놀이들. 이 놀이들은 접촉을 포함한다. 놀이를 위해 우리는 신체를 가까이해야 하고, 서로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거나, 손을 맞잡기도 한다. 이 속에서 놀이는 자신이 알던 자신과 자신이 모르던 자신이 경합하는 시공을 제공한다. C. 티 응우옌이 말했던 것처럼 놀이(게임)은 우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하게 만들고, 그 행위는 반드시 기존의 우리를 대변하지 않는다. 전시를 보며 떠올렸던 것은 두 편의 영화다. 하나는 김경묵의 <나와 인형놀이>인데, 일종의 셀프-커밍아웃 다큐멘터리인 이 작품에서 감독은 여성적인 인형놀이를 즐기던 자신이 학생이된 이후 남성적인 운동 놀이들 속에 적응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성역할이 배정된 놀이들은 우리를 그 틀 속에서 움직이게끔 한다. 다른 한편으로 '놀이화'된 행위들은 놀이에 내포된 행위들을 전복하거나 전유한다. 함께 떠올린 영화 <하지만 나는 치어리더예요> 속 동성애 교정 캠프는 청소기를 사용하거나 전기톱을 쓰는 등 젠더화된 노동 행위들을 일종의 놀이처럼 보이게끔 묘사한다. 그 속에서 각각의 노동 행위는 과잉성애화된 행위들로 변모하고, 동성애 교정 캠프는 단체 소개팅으로 변모한다. 이 놀이들은 결국 접촉의 행위들을 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손쉽게 성애의 맥락으로 치환된다. (스포츠가 손쉽게 성애의 맥락에 포섭되는 상황들을 떠올려보자) 민의 회화들은 적극적으로 접촉을 재현하되 성애적 '시선'을 탈락시킨다. '카마수트라'나 성애적 이미지를 레퍼런스 삼았다는 이 그림들은 적극적으로, 혹은 페티시적이라 할 수 있는 놀이 속 접촉들을 묘사한다. 이 회화들은 성애적으로 독해될 수 있는 접촉들을 무성애적인 것으로 읽게끔 권유한다. 존재하는 접촉점은 흐릿한 색채의 덩어리진 몸들과 다채롭게 읽히길 기다리는 무표정 속에서 무성애적으로 해석되길 기다린다. 토크의 모더레이터 임다울이 뮤지컬 <레베카> 속 레베카를 무성애적인 캐릭터로 바라본 것처럼, 플레이어가 게임을 마구 헤집어주길 기다리듯 존재하는 글리치처럼.


2. 어제 윤석열의 구속 취소 소식을 듣고, 오늘 광화문으로 향했다. 광화문에서 윤석열이 석방되었다는 뉴스를 봤다. 집에 와서 쓰려고 했던 것들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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