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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jonler Jan 13. 2019

슬픔에도 크기가 있을까

1-7


 시어머니는 자신의 슬픔을, 예수님을 먼저 보내야 했을 성모 마리아의 아픔과 같은 것이라고 하셨다. 범접할 수 없는 성스러운 고통이라는 표현 속에는 남편을 잃은 사람에게 허락된 슬픔은 없다는 말이기도 했지만, 흔히 자식 잃은 슬픔이 가장 큰 것이라고 하니까 시어머니의 아픔이 나보다 더 크겠거니 생각했다.


 그즈음 반려견을 잃었을 때의 경험을 말씀하시며 내 슬픔을 이해한다고 위로의 말을 건넨 분이 있었다. 나도 반려견을 잃어본 경험이 있기에 그 아픔을 이해하고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당시에는 그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남편을 잃은 내 슬픔을 반려견을 잃은 슬픔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아 불쾌했던 것이었다. 좀 더 솔직히, 남편을 잃은 내 아픔을 어떻게 반려견을 잃은 슬픔 따위와 비교할 수 있는지 나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의 워싱턴 의과 대학의 토마스 홈즈 박사팀의 ‘스트레스 측정 정도(Holmes and Rahe stress scale)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배우자 사별이 100점으로 스트레스 지수 1위이다. 가족이나 자녀의 사망은 63점으로 그보다 현저히 낮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나는 이 지표를 시어머니에게 박탈당한 내 슬픔을 인정받기 위해 가지고 있었다. 결국 나도 슬픔에 우열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인이 당한 슬픔의 크기를 규정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거기다, 함께 보낸 시간이 슬픔의 크기를 규정하는 잣대가 된다면 그 폭력성은 더 커진다. 뱃속에 아이를 가지고 있다가 유산으로 아이를 떠나보낸 엄마의 슬픔은 상대적으로 작은 것일까? 3개월 사귀다 헤어짐을 통보받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짧게 만났는데 뭐가 슬프냐고 말할 수 있을까? 자기 세계에서 일어난 슬픔은 자기에게 가장 큰 것이다. 슬픔은 각자에게 고유하다는 것이다.


 남편을 잃은 나의 고통이 너무 크기에, 내 아픔으로 미루어 자식을 잃은 시어머니의 슬픔이 얼마나 클지 안다고 생각했던 것도 어쩌면 자만이었다. 수목장으로 치르고 7년이 지나 이미 자연으로 돌아간 남편. 그 흔적이라도 붙잡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여전히 나는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식을 기억하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는 건 안 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시부모님이 요구하신 대로 이장을 해 가시도록 해야겠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완벽하게 어떤 관계도 아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나는 남편을, 각자의 방법으로 추모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슬픔이 고유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각자의 방법으로 치유해갔으면 한다. 지금 이 순간 확실한 사실은 내 세계가 무너진 일이 여전히 아프다는 것. 나도 이제 내 마음만 생각하고 싶다.


 이제는, 내게서 나오는 분노와 슬픔의 문장들에 마침표를 찍고자 한다.



이미지 출처: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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