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스케이트 보드는 놔두고 간다. 오락실 형들한테 뺏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고 자란 게토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역시 네오지오에 들르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담임이 오질 않는다는 거다. 5교시 다 끝난 지 한참인데 또 어디서 담배 피고 있는지 늦장을 부린다. 가방은 다 싼 지 오래. 이미 등에 메고 실내화주머니까지 손에 든 채 앉아있다.
그때 앞문이 열린다. 담탱인가 싶었는데 반장이다.
“오늘 종례 없대.”
반장의 입에서 “없”과 “대”가 나오는 그 사이에 달려가는 내가 있다. 애초에 오른쪽 무릎은 책상 바깥으로 빼놓은 채였기에 안정적인 스타트를 끊을 수 있었다. 이때를 위해 대청소시간마다 내 쪽 바닥에만 집중적으로 왁스칠을 해뒀다. 뛴다. 사실 뛰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냥 그렇게 된다. 그 누구보다 빨리, 후문으로 달린다.
지금 생각하면 초등학생의 연약한 멘탈로는 버틸 방도가 없는 거리였다. 후문을 나와 매콤달콤한 떡볶이 냄새가 풍겨오면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분식집-문방구(=짱깸뽀)-슈퍼(=불량식품)-오락실-분식집2-문방구2(=대왕잉어뽑기)-놀이터-성당(=변종 놀이터)으로 이어진 길을 지나는 동안 게토의 아이들이 그중 어딘가로 새지 않을 도리 같은 건 없다.
컵떡볶이 먹고 있는 애가 있으면 한두개 얻어먹자. 부잣집놈들은 대파를 버리는 경향이 짙으므로 파도 달라고 해보는 것이 좋다. 슈퍼에선 빠삐꼬 뽕따 탱크보이 사먹는 애가 있으면 꼬다리를 요구하자. 꼬다리 나눔은 대한민국 국룰이고 인지상정이므로 이는 부탁이 아닌 정당한 요구이다.
조금이나마 배도 채웠으니 이제 저 어두컴컴하고 담배냄새 오지는 계단을 내려가자. 그곳이 내가 나고 자란 게토의 성지, 우리의 빛과 우리의 어둠, 오락실 네오지오다.
물론 게토에선 성지에 공양할 그 백원들이 항상 부족하다. 그러나 우린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킹오파를 하고 캐딜락을 했다. 지난번 놀이터편에서 지능이 거의 없는 애들이라 한 말을 취소한다. 게토의 아이들은 절실히 필요한 곳에선 비상한 지능과 창의력을 발휘한다. 오락실이라든가.
일단 가지를 나누고 대표수단만 분류해보면 이렇다.
#오락 자금 마련 방법
1. 합법적 노동
- 내부
- 용돈 받기
- 설거지 혹은 심부름 다녀오기
- 외부
- 족발집 전단지 배포
- 델몬트병 줍기
2. 비합법적 노동
- ‘소화전 동전’ 만들기
- 부루스타 찾아서 ‘똑딱이’ 만들기
3. 기타: ‘이삭 줍기’
- 오락실 바닥
- 공중전화 및 자판기
- 운동장 철봉 밑
가장 쉬운 방법은 역시 “엄마 n백원만”이다. 하지만 당시 오락실은 지옥과 악마와 저주받은 쾌락과 예견된 몰락을 세 글자로 축약한 장소였으므로 “어디 쓸건대”의 허들을 넘어야한다. 이때 “준비물”이라든지 아니면 “소설(만화책 주의) 빌려본다”든지 하는 적절한 답을 찾기 위해 집중가속사고하고 창의력을 발달하는 과정이 있었기에 내가 나고 자란 게토에선 구몬선생님이 따로 필요 없었다.
가끔 엄마 퇴근 전에 설거지를 해놓는다던지 슈퍼 심부름을 다녀온다던지 하는 노동의 대가로 몇 개의 백원들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대가가 늘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심부름값이 없다 해도 낙담 말자. 낙담할 에너지로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좋다.
다른 방법의 최상위 수단은 족발집 전단지 배포 같은 일이다. 당연히 항상 있는 건 아니다. 초등학생을 쓰는 가게는 많지 않고 있어도 적법한 임금을 다 주는 가게는 없다. 그보다 수익성은 낮지만 접근성이 좋은 일은 델몬트 주스병을 주워다 슈퍼에 파는 것이다. 델몬트병은 하나에 무려 100원을 받을 수 있는 고가의 병이었다(50원 주는 몰양심가게는 단합해서 거르자). 늘 그렇듯 부잣집놈들은 내용물을 섭취하고, 우리 게토에선 그 용기를 활용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델몬트병 무한루프’라는 현금흐름을 만들어 활용했다. A슈퍼에 델몬트병을 팔고 창고에서 꺼내 다시 B슈퍼에 파는 것(vice versa)이다. 어느 슈퍼든 주인이 병을 직접 갖다놓는 경우는 없다. 병을 주면 동전을 내주며 “저 뒤에다 갔다놔라”고 말한다. 이를 이용해 병을 회수하기 좋은 위치에 놔두고 며칠 뒤 실행에 옮기면 된다.
델몬트병마저 씨가 마르는 날엔 ‘소화전 동전’을 만든다. 소화전 동전이란, 소화전 발신기의 누름 버튼을 가리는 용도로 붙어있는 동그란 판넬을 말한다. 동전같이 생겼고, 옆으로 밀면 빙글 돌아간다.
저걸 떼어다 콘크리트바닥에 좀 갈면 100원짜리 동전과 거의 동일한 크기와 폭이 된다. 오락실 기계에 넣으면 기계가 백원이구나? 하며 경쾌한 전자음으로 날 환영해준다. 이 과정에서 들어간 노동이 아깝다면 그걸 시드머니로 활용해 문방구 짱깸뽀에서 한탕을 노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소화전 동전으로 킹오파를 재미지게 했는가. 루갈까지 다 깼으면 반드시 이름을 새겨주자. 내가 나고 자란 게토에선 자신의 이니셜과 관계없이 S.E.X라고 새기는 국룰이 있었다. 이를 존중해 꼭 ㅆㅆ라고 새겨놓자. 그날의 랭킹보드 1위~10위 중에 최소 8명 이상이 S.E.X인 진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오락실 바닥에 엎드려 기계 밑을 확인해주자. 확률적으로 그곳에 백원짜리가 있다. 길에서 보는 공중전화와 자판기의 동전토출구도 마찬가지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손을 넣어보자. 생각보다 높은 확률로 누군가 깜빡한 동전들이 거기 있다. 운동장 철봉 밑 역시 좋은 장소다. 거긴 아예 살짝 파보는 게 좋다. 게토의 놀이터엔 어차피 게토놈들밖에 없어서 파봤자 안 나오고, 부잣집놈들이 우아하게 매달리고 빙글 돌기까지 하는 학교 철봉이 핫스팟이다.
이 수단들을 병행하긴 하지만, 주무기는 역시나 ‘똑딱이’가 아닐 수 없다. 가스레인지에 들어있는 점화장치를 말한다. 이걸 떼어다 끝 부분 피복을 벗기면 스파크가 튀고 전기가 흐른다. 동전투입구 쪽에 대고 누르면 기계가 백원이구나? 하며 크레딧이 올라가게 된다.
똑딱이를 찾기 위해 게토의 어린이들은 정기적으로 옆동네까지 ‘부루스타 원정‘을 떠났다. 더럽게 못 만들어서인지 아니면 재구매를 유도하는 상술인지 세상엔 고장으로 버려지는 가스레인지가 꽤 많았다.
똑딱이 운용의 묘는 확보가 아닌 위장술에 있다. 똑딱이라면 치가 떨리는 오락실아저씨의 시야로부터 어떻게 벗어나는지가 관건이다. 나는 천원짜리를 바꿀 일이 있으면 절대 동전교환기를 이용하지 않고 꼭 아저씨한테 가서 바꿔달라고 말했다. “난 용돈으로 오락하는 선량한 아이”라는 인식을 주기 위함이었다. 오락할 때도 조이스틱 위쪽에 동전을 쌓아놓고 했다.
물론 실제론 똑딱이를 이용했고, 동전은 최대한 쓰지 않았다. 가끔 아저씨가 순찰 돌 때 보란듯이 동전을 넣긴 했지만 그런 퍼포먼스의 빈도는 최대한 줄여야 한다. 그건 컵떡볶이나 알껌바를 살 자금이었으니까. 차라리 일부러 돈을 자주 먹는 기계를 이용하면서 “아저씨 돈 먹었어요”라고 말하며 선량한 어린이 코스프레를 하는 방법이 나았다.
휴 오늘도 하루가 다 갔다. 배도 고프고 슬슬 집에 돌아가자. 내가 남긴 수많은 S.E.X들이 일제히 깜빡이며 나를 배웅한다. 내일 우리는 또 새로운 S.E.X들을 새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