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좋아한다는, 직장인 신분에 만족한다는 거짓말
어릴 때부터 나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 왔다. '해야 하는 일'을 '좋아하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기가 일쑤였다.
어쩌면 이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을 묵묵히 '참고' 해내려 시도할 때면, 아주 천지가 거꾸로 뒤집어져 펄쩍펄쩍 날뛰고 싶은 기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어떻게든 그것을 '좋아하는 일'로 둔갑시키지 않으면 해낼 수가 없었다.
그냥 타고난 성정이 지랄맞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물론 이것도 맞는 말이다), 서른이 넘어서 검사를 받아 보니 나는 ADHD였다. 싫은 걸 참지 못하는 병리학적인 이유가 있었다니 다행스럽기도 하지.
어린 시절 나는 수학이 싫었다. 하지만 입시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학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속였다. 내가 수학을 좋아한다고 말이다. 수학의 좋은 점, 이를테면 논리성을 계발해 준다든지, 수리적 사고력이 올라간다든지, 수학의 매력적인 요소들을 들이대면서, "나는 수학을 좋아한다"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실제로 나는 수학을 좋아한다고 느끼게 되었고, 수학 공부를 그럭저럭 즐길 수 있게 되었으며, 자연히 높은 점수도 얻을 수 있었다.
내 삶은 자주 그런 식으로 채워졌다.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뒷전으로 제쳐두고서, 해야 하는 일을 눈앞에 들이
대며 "이게 바로 내가 좋아하는 거야."라고 억지를 부렸다. 대학생 때는 전공 공부를 좋아한다고 믿었고, 직장을 다니면서는 직장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고 믿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라고 나불대면서 말이다.
물론 나는 수학과 전공 공부와 직장 일을 좋아했다. 부정할 수 없다. 나는 그것들을 하면서 종종 즐거웠고, 자주 성취감을 느꼈다. 나는 수학과 전공 공부와 직장 일을 좋아했다. 내가 똑똑하거나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져다줄 때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수학과 전공 공부와 직장 일이 싫었다. 그걸 통해서 내가 멍청하고 도태되고 있는 느낌을 받을 때면.
내가 진짜로 좋아했던 것은 '유능하다는 감각'과 '성장한다는 느낌'이었지, 수학이나 전공 공부나 직장 일 그 자체가 아니었다. 나는 그것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거짓말쟁이야.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비겁한 거짓말만 거듭해 왔다는 사실을. 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수학을 좋아한다고 거짓말했다. 취직을 하기 위해 전공 공부를 좋아한다고 거짓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먹고살기 위해서 직장생활을 좋아한다고 거짓말하며 살아가고 있다.
출근할 때마다 스스로를 목매다는 기분이 들면서도, 이 직장인 신분이 주는 수많은 장점을 들이대며 나 자신을 안심시켜 왔고, 만족스러운 기분을 힘써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숨길 수가 없다. 이제는 마주할 때가 되었다.
나는 직장인으로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진실이다. 이 사실을 직면할 때가 되었다. 나는 직장생활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직장에서 맡은 일들 중 일부의 일을 좋아한 적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직장생활 그 자체를 좋아한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진짜 좋아하는 감각', 즉 '사랑'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굳이 어려운 말로 정의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감각이다. 떠올리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그냥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고등학생 때 (수학과 달리) 세계사 과목을 '그냥' 좋아했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아서 기꺼이 따로 시간을 내서 인강으로 세계사를 공부했고, 문제를 틀리면 오히려 내용을 깊이 익힐 기회가 생겨서 더욱 기뻤다. 명확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인류가 걸어온 길을 조망하는 것 자체가 좋았다. 역사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그냥 좋았다.
지금의 나는 내 남편을 사랑한다. '그냥' 그의 존재가 좋다. 이렇게 이상하고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저 재미있고 좋다. 때때로 그가 나를 서운하게 할지라도, 그와의 말다툼 속에서 내가 지지리도 못난 사람이라는 걸 발견하게 될지라도, 이 마음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모든 눈물 콧물 쏟는 괴로움의 시간조차도 기쁘고 감사할 정도로, 나는 그냥 그를 사랑한다.
나는 분명히 좋아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알아차리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내 주의가 그곳에 쏠려 있는 것. 그것에 에너지를 쏟으라고 굳이 나를 설득할 필요가 없는 것. 좋아한다는 것은 그런 마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분명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좋아함'을 이용했다. 직장을 싫어하는 마음을 철저히 은폐하고, '나는 직장을 좋아한다'며 나를 속였다. 둔해 빠진 나는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로 교묘하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들과 적절히 섞어 보이면서 말이다.
나는 내가 직장생활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직면하는 것이 두려웠다.
직장인의 신분이 주는 안정감, 어렵게 얻은 정규직 일자리와 안정적인 현금 흐름을 잃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기에 이것에 만족하라고 자신을 계속 설득해 왔다. 내 삶에 만족한다고, 내 직장을 사랑한다고 그럴듯한 거짓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제는 솔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 거짓말쟁이의 삶을 이제는 그만두고 싶다.
이제부터 나는 겉과 속이 똑같은 인간으로 살 것이다. 나는 좋은 것은 좋다고 말하고,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할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인생에서 최대한 빠르게 더 많이 늘리고, 싫어하는 것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상관없도록 내 삶을 바꿔 나갈 것이다.
나는 직장생활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안정감과 자유를 맞바꾸는 인생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회사를 나갈 것이다. 회사와 상관없는 인생을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