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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니스프리 Oct 23. 2021

검은콩 두유의 무게

   일을 하던 와중에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물끄러미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무음으로 바꾸었다. 이따가 전화드려야지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할머니의 전화를 까먹고 있을 때였다. 한번 더 전화가 울렸다. 공교롭게도 이번에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화를 두 번이나 하셨다니 무슨 일이 생겼나 궁금하기도 하고 살짝 걱정도 됐다. 점심 먹고 있는 와중에 내가 사고가 났다는 보이스피싱이 할머니에게 갔었던 적이 있었다. 놀란 할머니에게서 전화를 받았던 때가 떠올랐다.


   사무실 밖으로 나와서 할머니에게 다시 전화를 드렸다. 무슨 일인지 여쭤보니 낮에 있었던 일을 말씀하셨다. 잔뜩 열이 받는다는 말로 시작하는 이야기였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좋은 일, 속상한 일이 생겼다는 말보다는 열이 받으셨다는 것에 묘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할머니는 검은콩 두유를 좋아하신다. 그것도 특정 브랜드의 것만 좋아하신다. 할머니 입이 고급이신 게 그 브랜드의 검은콩 함량이 많고 비쌌다. 할머니 두유 담당은 나인데 예전에 사드린 걸 어느새 다 드셨는지 구루마를 끌고 동네 마트로 마실을 가셨다고 한다. 먼 길을 걸어 도착해서 들어가려 하니 마트에서 들어오면 안 된다고 했단다. 마스크를 깜빡하고 나오신 거였다. 


   할머니는 한 박스만 사서 바로 가겠다고 하셨는데 마트에서는 곤란하다고 했던 모양이다. 마트는 당연히 어쩔 수 없을 터였다. 할머니는 가끔 고집을 피우신다. 그런 건 모르겠고 잔뜩 열이 받으셨다고 한다. 마스크 안 한 건 잘못인데 한 번만 봐주면 안 되는 건가 할머니 입장에서는 당최 이해가 되지 않으셨다. 그런 할머니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 웃었다. 그런 적이 몇 번 있었어서 어떤 상황이었을지 자연스레 떠올랐다.


   “할머니, 그걸 왜 굳이 사러 가셨어요. 저한테 말하면 제가 바로 사드렸을 텐데. 거기서 샀어도 문제야, 그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 가시려고. 제가 인터넷으로 바로 사드릴게요.” 별 일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 웃으며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잔뜩 미안한 말투로 “미안해서 그러지”라고 하셨다. “뭘 새삼스럽게, 할머니 두유 담당은 난데. 당연히 내가 사드려야지” 새삼스러운 일이긴 했다. 할머니 댁에 들르면 검은콩 두유가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없다는 걸 알면 내가 마트에 들러 검은콩 두유를 두 손 가득 들고 갔다. 꽤 무거웠다. 쓱배송으로 시키면 다음날 오는데 나는 굳이 양손 가득 들고 갔다.


   할머니는 잔뜩 성이 나시긴 했던 모양이다. 마트의 유도리 없는 처사에 대해 분개하며 같은 얘기를 몇 번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그러다가도 나에게 두유를 사달라 할 땐 미안해하시는 마음이 느껴졌다. 괜히 바쁜데 전화했다는 것과 떨어진 두유를 사달라 부탁하는 말이 미안하셨나 보다. 웃으며 전화를 끊고 바로 인터넷으로 검은콩 두유를 네 박스를 주문했다. 배송 메모에 기사님께 꼭 문 바로 앞에 놔두셨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다음날 저녁 퇴근길에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유는 잘 왔어요? 어, 잘 받았다. 그거 문 앞에 있는 거 안에 잘 들여놨어요? 그럼. 잘 들여놨지. 안 무거웠어요? 무겁더라. 근데 잘 들여놨어.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글을 더 잘 쓴다면 할머니의 약간 들뜬 것 같았던 목소리를 담고 싶다. 아마 그때 나는 웃으며 전화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현관문을 열고 검은콩 두유를 바로 앞에서 발견하시고 무겁게 옮기셨을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 모습을 떠올리니 기분이 좋았다. 마음의 얼마만큼을 두유의 무게만큼 달아 놓은 느낌이다. 


   두유를 나르며 할머니가 느끼셨을 무게가 손에 잡힐 듯 상상이 된다. TV도 보시면서 마시고, 계단에 앉아 바깥 구경하며 드시고, 주무시기 전에 출출할 때 드실 거다.


   할머니 집의 계단을 오르며 양손에 무겁게 든 두유의 무게. 그 무게에는 고마운 마음. 미안한 마음. 쓸쓸한 마음. 반가운 마음.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 그런 무게가 더해져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무게를 손에 직접 들어보고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가끔 나는 인터넷이 아니라 굳이 동네 마트에 들러 양손에 두유를 들고 계단을 오르나 싶다. 묵직한 두유를 할머니 집 거실에 내려놓으며 "두유가 왔다!"라며 너스레를 떨 때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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