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누워 내일을 기대하며 미소 짓는 것
2014년 언젠가 PC방에서 친구와 롤을 하고 있었다. 날이 다 저문 저녁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녀석(지금은 물리치료사를 하고 있다)과 함께 PC방에 갔다. 게임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가만히 있으면 긴장이 너무 되서 친구를 만나 게임을 하고 있었다. 최종 면접 결과 발표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거의 전부를 '학생'이란 딱지를 달고 있다가 이제 '어른'이라는 새로운 딱지를 달기 위해 큰 허들을 넘기 직전이었다. 오늘 넘느냐 아니면 다시 출발선으로 되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달리느냐.
게임을 하다가 친구에게 말도 안하고 혼자서 슬며시 바탕화면으로 돌아가 인터넷 브라우저를 켰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최종면접 발표 사이트에 접속해 인적사항을 적고 로그인을 했다. 주변에선 시끄러운 게임소리와 고함에 가까운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고요했다. 마우스로 마지막 확인 단계를 클릭하니 "축하합니다"라는 글자가 가장 먼저 보였다. 거기서도 안심하지 않고 스크롤 바도 안 생기는 짧은 글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이윽고 누군가 드디어 허락해 준 것처럼 PC방에서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나이스!, 나이스!"를 여러 번 반복해서 외쳤다. 웃기게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다들 게임에 열중해서 내는 소리인 줄 알았나 보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친구녀석에게 합격 사실을 말했더니 "진짜야? 오 진짜야?" 이 말을 몇 번 하고는 게임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친구놈의 시덥잖은 반응과는 별개로 그 날은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날이었다. 그 날 게임을 이겼는지 졌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2024년. 올해로 10년차 직장인이 되었다. 10년 동안 총 세 곳의 회사를 다녔다. 회사의 필요로 다양한 TF와 직무를 경험하였지만 이것 저것 '중략'하면 상품MD로 10년을 보냈다. 지금은 새로운 직장에서 팀장이라는 직책으로는 2년차를 보내고 있다.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운이 좋게도 좋은 소양과 태도를 갖춘 팀원을 만나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일 욕심이 있는 편이다. '워라밸'이라는 단어를 보면 나는 까탈쟁이처럼 단어 하나 하나의 의미를 뜯어 보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work와 life는 같은 등위로 비교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 생각한다. life는 work까지 포괄하는 단어이니 둘 사이의 밸런스를 잡는다는 말은 어색한 표현이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단어를 바꾸자면 work & rest, 일과 쉼의 밸런스라고 하는 게 자연스럽다 생각한다. 그리고 일과 쉼 사이의 균형에서 나는 일에 방점을 찍는 편이다. 일은 전진하는 자동차이고 쉼은 아주 좋은 연료라 생각한다. 자동차가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것처럼 일은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가고 가치를 만든다. 대부분 일을 통해서 의미 있는 가치를 만들지 쉼을 통해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을 하기 위해, 가치를 만들기 위해 적당히 잘 쉬는 것은 무엇 보다 중요하다. 둘 모두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하지만 역할이 다르다.
어디서건, 어떤 일이건 항상 평균 이상의 평가는 받았다. 회사에서 표창을 받기도 했고, 어느 회사에서든 경영자에게 일의 성과를 다이렉트로 보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변 동료들은 운이 좋게도 대부분 배울 점이 있는 동료들이었다. 그런 동료들 사이에서 같이 일하고 싶은 동료로 여러번 뽑히기도 했고, 이달의 사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보내고 있지만 이게 '나의 것'인가, 온전히 나의 힘으로 이룬 것인가, 나의 생각이 온전히 반영된 것인가라는 의문은 계속 따라 다녔다. 나의 생각이 온전히 담긴,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만들고, 그것의 가치를 인정받아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나는 무엇을 하고 싶어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글쎄. 글쎄다. 쉽지 않은 질문이다.
상품MD로서 회사의 매출을 올리는 것. 이것은 기획이다. 사실 '기획'을 하지 않고 이뤄지는 일은 거의 없다. 내가 생각하는 기획은 문제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지 설계하고, 그대로 실행을 하고, 성공할 때까지 피드백하여 다시 시도하는 것이다. 상품MD는 그것을 상품으로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상품을 설계해서, 제작하고, 출시하여, 매출을 살펴보고 다음 시즌에 적용하는 것이 MD가 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좋은 성과도 거둬 보았고, 보통의 성과도 거둬 보았고, 아쉬운 적도 있었다. 회사이기에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진행하는 것이 당연하고, 상품 외적인 아쉬운 조건 때문에 매출이 저조한 경우도 있었다. 이를테면 유니클로 불매 운동이 한창 벌어질 때 마침 내가 기획한 상품은 날개 돋힌 듯이 팔렸었다. 물론 상품을 잘 만들어서 일수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불매 운동의 영향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어떨 때는 잘 기획한 상품이 제조 과정에 문제가 생겨서 불량품이 생기고, 출시가 밀려서 판매가 굉장히 부진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힘들 때는 매출이 생각보다 안 나올 때가 아니었다. 이 상품이 왜 사람들에게 가치가 있는지, 가격은 왜 이 가격이 적정한지, 디자인은 왜 이 디자인이 좋은지, 수량은 왜 이 수량이 적절한지를 PPT를 만들어서 고객이 아닌 윗사람을 설득해야 할 때였다. 어떻게 보면 직장인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상사도 고객이라는 말도 옳다. 물론 나도 구조적으로는, 그리고 순리로는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월급을 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상품을 만드는 것은 가장 끝단에 있는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다. 미묘하지만 매우 다르고,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기 위해 고객조사를 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브랜드의 상품을 리뷰하고, 디자이너와 생산 담당자들과 의견을 맞춰서 상품을 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외한이거나 나보다 고객을 덜 관찰한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것은 비효율적이라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PPT를 만들다 '현타'가 오곤 한다.
의사결정자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상품 기획의 가설이 부족하거나, 고객조사가 미흡했던 점을 지적당하는 경우는 오히려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내가 기획하는 것의 퀄리티가 올라가고 사람들이 더 좋아할 상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의 호불호, 취향 때문에 "이건 별로네요"라는 단 몇 글자 안되는 피드백으로 수십, 수백시간이 다 타버린 재처럼 묻혀 버리는 것은 매우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과장한다면 삶의 절반 이상을 우리는 회사에서 보내는데 그 일에서 나는 어떤 가치를 만들고 있을까 이런 현타의 순간에 스스로 되묻게 된다. 회사가 기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달리는 것, 주어진 일을 잘 해내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으로 나는 '완전히' 만족하는지 되묻게 된다. 일과 쉼을 반복하며 내가 만들고 싶은 가치가 무엇일까? 어떤 사람에게 어떤 가치를 전달할 때 나는 마음 깊숙이 웃으며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을까?
야근을 끝내고 택시에 몸을 맡기며 몇 번이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바다의 파도가 모래밭까지 켜켜이 밀려 오는 것처럼 막막하지만서도 설레는 마음이 어느새 내 발치까지 밀려왔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떠올리면 설레는 마음이 생겼다.
내가 만족시키고 싶은 고객들에게 이런 가치를 가진 상품이 정말 좋다고 제안 해주고 감사를 받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든다. 주변 사람들에게 맛집을 추천해 주며 거기서 맛있는 경험을 했으면 하는 것처럼,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좋은 상품을 제안하고 거기서 가치를 만드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다. 이익을 남기기 보다 좋은 가치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단단하고 진솔한 브랜드를 만들고 좋은 동료들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가치를 공유하고 싶다. 사람들이 내 브랜드의 상품을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하고, 믿고 구매하게 된다면, 출근하는 동료들이 매일 아침 기대하는 마음으로 회사 문을 열고, 퇴근 할 때는 뿌듯한 마음으로 퇴근할 수 있다면. 그런 브랜드를 내가 만든다면 아주 멋진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매일이 행복할 수는 없다고 한다. 회사 다니며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좋은 것만 할 순 없다. 싫은 걸 해야 하기 때문에 월급을 받는 거라 한다. 물론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대체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가장 우선적인 일인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퇴근 하고 CEO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기로 했다. 브랜드를 만들고, 상품을 만드는 시도를 해보자. 잘 안 될 수도 있겠지만, 후회 없이 노력하고,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어서 내가 다가가고 싶은 고객들에게 이야기를 건네보자. 첫 아이템을 '가방'으로 해보자는 생각을 했는데 쉽다는 생각은 안 든다. 막막하고, 조금 겁이 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해보자. 어려워 보인다고, 막연히 무섭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은 정말 아쉬운 삶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식사에서 편식을 하면서도, 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묵묵히 견디고 반복하는 걸까? 왜 시도조차 하지 않는걸까? 건방지고 오만한 생각일수도 있겠지만, 나의 브랜드를 만들고 후회 없이 태워보잔 생각을 한다. 망한다면 피드백 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면 된다. 가슴 뛰지 않는 아침을 보내기에는 아직 너무나 많은 아침이 남아 있고, 너무나 소중한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