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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명숙 May 14. 2019

나의 사춘기 1

1950년 6·25전쟁이 났을 당시 나는 종로 5가에 있는 효제초등학교 6학년생이었다. 전쟁이 나자 갑자기 좌익 색채를 드러낸 일부 교사들이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학생들을 모아 놓고 학교 운동장에서 사상교육과 매스게임 훈련을 시켰다. 학교 건물은 북에서 쳐들어온 인민군들이 차지하고 있어 우린 교실 근처에 얼씬도 못 했다.


9월에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고 인민군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지만, 학교는 정상 운영이 될 수 없었다. 학생도 교사도 뿔뿔이 흩어져 살길을 찾아 떠났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그 여름을 거의 텅 빈 서울에서 끝까지 버티다 결국 1·4 후퇴 때 보따리를 싸고 말았다. 우리의 발길은 경남 진해를 향했다. 언니가 해군 약혼자 따라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부모님은 언니의 결혼식을 올려주었다. 임신까지 한 열아홉 살 어린 신부가 못 미덥기도 했지만, 형부가 극구 말리는 바람에 우린 못이기는 척 낯선 진해에 주저앉게 되었다. 3월 중순 깨에 서울은 수복됐다고는 하지만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난 그곳 도천초등학교에서 6학년을 마쳤다. 그 전쟁 통에서도 입시제도가 바뀌어 우린 국가 고사를 보았고, 성적에 따라 중학교를 선택 지원하는 첫 세대가 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부산으로 피난 와있던 이화여중에 입학원서를 냈는데 당연히 합격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저리 쫓기며 동냥질하듯 공부를 했지만, 햇수로 이 년이 흘렀으니, 밥통 아닌 담에야 어떻게 떨어지겠는가. 괴나리봇짐 싸는데 이골이 난 우리 가족은 진해에서의 삶을 간단히 묶어 둘러메고 부산으로 와 여관에 짐을 내려놓았다. 나의 입학식을 위해서 아버지가 내린 결정이었다. 초라한 운동장에서 나는 축사와 함께 배지를 받아 가슴에 달았다. 그러나 결국 그 자랑스러운 배지는 전쟁 중에 갈팡질팡 하는 가장 때문에 주인 가슴에 몇 달 매달렸던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입학식 끝내고 여관방에서 하룻밤 자고 난 후, 할머니를 비롯한 우리 다섯 식구는 드디어 서울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아버지는 청주에 이르러 발길을 멈췄다. 서울 사정을 살피며 신중하게 처신하기 위해서라지만, 내 판단으로는 아버지가 겁을 먹고 계신 것 같았다. 한강 다리 끊어지고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했던 서너 달 동안 피난을 미처 못 간 서울 시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세상물정 모르는 어머니가 동대문 시장 바닥에서 돼지 삼겹살에 고추장 발라구워 팔았겠나.


아버지도 손재주 좋다고 인근에 소문나는 바람에 운수 사납게 점령군한테 끌려가 부역을 했다. 서울 수복되고는 그때 플래카드 만든 죄로 민주청년단인지 뭔지 완장 찬 청년들에게 또 끌려가 고문을 당해 일주일 만에 업혀 나왔다. 사람 목숨이 농담 한 마디에 오락가락 할 때였다. 어른들이 쉬쉬하며 주고받는 말에 의하면, 배화여고 4학년이던 언니가 양주 한 병 구해 들고 구치소에 찾아가 울고불고 사정해 아버지를 살려냈다고 했다. 아무리 전시라고는 하지만 아버지 목숨값이 양주 한 병이라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청주는 우리에게 생판 타향은 아니었다. 아버지 외가 쪽 친척들이 살고 있어 그들의 신세를 질 수 있었다. 처음 짐을 내려놓은 집은 우암산 자락에 조그만 집인데, 전혀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아예 생각하기도 싫은 시기였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서울 탐색전이 답보 상태라 나는 조바심이 났다. 가슴에 단 이화여중 배지도 하릴없이 무색해졌다.


이럭저럭 두어 달이 흘러갔다. 집에서 빈둥거리니 덩치만 나날이 커졌다. 그동안 서울을 다녀온 아버지가 내린 결론은 일단 사회가 안정될 때까지 청주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전시인 점을 고려해 일 년 안에만 돌아오면 받아준다는 학교 측 배려에 힘입어 일단 청주여중에 전학수속을 밟았다. 그리하여 내가 이화여중 배지를 달고 청주여중을 다닌 사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첫 영어 시간에 알파벳도, 발음기호도, 모른 채 난 졸지에 청맹과니가 되어 아이들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굿 모닝 써”라고 외칠 때 교과서 첫 페이지를 더듬어야 했다.


우리가 두 번째 이사한 석교동 집은 청주 시내 끝자락에 위치한, 무심천을 끼고 있는 후줄근한 동네, 남의 집 사랑채였다. 그곳에서 몇 달 동안 난 할머니랑 둘이서 살았다. 전후사정은 모르겠고, 부모님이 남동생만 데리고 강원도 영월에 간 것만 기억한다.


난 뒤쳐진 학업을 만회 하려고 할머니가 해주는 밥이건 죽이건 마다않고 먹고는 학교생활에 적응하느라 방과 후에도 학교에 남아 얼쩡대다 어스름 땅거미가 지면 그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밥상이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송이버섯 외엔 뭐든지 잘 먹는 나였지만 밥 대신 호박범벅이나 (지금은 별미로 승격했지만) 수제비가 주 메뉴로 상위에 올라오는 것은 심각하게 생각해볼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겨울 방학 첫 날 삯바느질 하던 할머니가 무겁게 입을 여셨다. 먼 친척뻘 되는 조카 녀석이 아버지가 주고 간 생활비를 매달 이자 두둑이 준다고 호언장담 빌려 간 후 코빼기도 볼 수 없고, 소식은커녕 매일 발이 부르트도록 찾아 헤맸지만,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했다. 이제 막 어린 티를 벗은 단발머리 13살 여자애가, 이 중차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평소 탐정소설을 탐독하던 나는 대뜸 셜록 홈스가 되어 양반 가문에 품격 높은 할머니의 자존심을 위해 그 사기꾼을 잡아 한 손으로 번쩍 들어 패대기치는 상상을 그냥, 잠깐 해봤을 뿐이다. 이튿날 나는 돈을 긁어모아 간신히 여비를 마련해서 부모님을 찾아 강원도를 향해 떠났다.


청주를 벗어나려면 조치원을 거쳐야 한다. 기차를 탔는지 버스를 타고 갔는지 그건 기억에 없고, 내가 입고 있던, 구호물자 시장에서 거금 주고 산, 포도주색 반코트는 이상하게 선명하다. 강원도 영월은 해방되기 전 우리 가족이 1944년에 소개(疏開)되어 갔던 곳이고, 난 그곳에서 초등학교 입학을 한 전력이 있는 터라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정서가 그렇다는 거지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차역인지 아니면 버스 종점인지, 꽤 번화한 곳에 내려 내가 곧장 들어간 곳은 처음 눈에 띈 여관이었다. 우선 하룻밤 자고 날이 밝으면 아버지가 있다는 일동 광산을 찾아 나설 작정이었다. 여관비 따위는 걱정도 안 했다. 어떻게든 되려니 했다.


그러나 여관 주인아주머니는 나를 들이려 하지 않았다. 어린애가 건방지게 하룻밤 묶겠다고 여관을 찾아 들어왔으니 당연한 일 아닌가? 나는 여기서 하룻밤 자고 내일 아침 일동 광산에 가서 여관비를 가지고 오겠다고 두서없이 떠들어댔다. 내 말을 가만히 듣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반색하며 “윤 소장님 따님이구먼?” 하는 게 아닌가. 뭔 소린고 하니, 아버지가 가끔 지방 출장 갈 때 묵어가는 여관이 바로 요기라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아버지 단골집을 운 좋게 들어온 거지.


난 아주머니가 차려주는 저녁 밥상을 안방에서 천연덕스럽게 받아먹고 여유작작 읍내 구경까지 나섰다. 내 주머니에는 차비에 쓰고 남은 돈이 쬐끔 있었다. 시장을 기웃거리며 한 바퀴 돌고 나오는데, 길바닥에 잡지며 헌책 나부랭이가 남포 불빛 아래서 어룽거렸다. 나는 자기 전에 책이나 읽어볼까 하고 손바닥만 한 작은 책을 골라 들고 값을 물으니 마침 주머니 속의 돈과 맞아 떨어졌다. 책 표지는 빨간 장미꽃 아래 여자가 앉아 있고 제목은 <꽃 한 송이>라고 씌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소설이랄 것 까지도 없는, 동네 부인들 모여앉아 쑥덕대는 뒷담화 정돈데, 어린 나에게는 완전 딴 세상 얘기였다.


1950년대 연애소설 책표지  


남녀가 만나 수작 부리는 게 여간 재밌는 게 아니었다. 여관방에 배 깔고 누워 한참 신나게 읽고 있는데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아! 아버지”


나는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뛰어나가 아버지 품에 안겼다.


신기하기도 하지, 아버지는 다음 날 아침 출장을 떠날 예정이었는데 새벽에 볼일이 있어 미리 읍내로 나왔다고 했다. 그 밤에 아버지와 난, 아버지가 타고 온 트럭을 되돌려 엄마가 있는 산골로, 주소 대신 단단히 머릿속에 새긴 일동 광산으로 달려갔다.


우리가 한밤중에 들이닥치자 예상대로 엄마는 기절초풍했다. 못 보던 사이에 훌쩍 커버린 딸을 엄마는 서먹해 하는 것 같았다. 실은 나도 엄마를 보고 덥석 달려들 맘이 없었다. 그새 엄만 아무런 기별도 없이 아기를 낳아, 나에게 또 하나의 동생을 안겨준 것이다. 이번엔 여동생이었다. 아기는 건강하고 뽀얗고 예뻤다. 엄마도 살이 붙고 혈색이 좋았다. 내가 원래 심술이 좀 있는 편이긴 한데, 엄마의 행복한 모습을 보니 할머니와 내가 그동안 고생한 것이 (자초한 것이지만) 너무 화가 났고 엄마가 괘씸했다. 할머니가 걱정되었지만 난 모처럼 가족 품에 안겨 근심 걱정 벗어 버리고 편히 발을 뻗었다. 종일 주술에 걸린 것 같은 하루였다.


이튿날 늦잠에서 깨어보니 아버진 일찍 출장을 떠나고 안 계셨다. 난 밖으로 나가 전날 밤에 어두워 보지 못한 집 주위를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어린 동생 녀석이 새새거리며 따라붙었다. 집이라고는 내가 자고나온 집이 유일한 집이고 집 앞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폭은 제법 넓은 데도 바닥에 모래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수심 얕은 강이 병풍 같은 절벽을 끼고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상류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니 수십 명의 사람들이 엎드려 강바닥 모래를 채로 거르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유일한 외화벌이인 텅스텐 광업소가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에 있었고, 아버지는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모래에서 텅스텐을 추출해 내는 일꾼들의 관리 책임을 맡고 계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작은 집을 살 만한 돈이 모이자 그 일을 그만두셨다.


내가 까마득한 옛날 일을 어제 일처럼 기억해내기는 요즘 들어서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다. 어느 시기는 까맣게 지워지기도 하고, 그랬다는 사실 자체도 인식 못 하기 일쑤다. 그런데  어째서, 68년 전의 그 일은 한 편의 영화처럼 눈 앞에 펼쳐지는지 모르겠다. 오롯이 나만 아는 사실이니 기억이 오염됐을 리도 없고, 사진 한 장 없으니 재편집됐을 리도 없다. 단언컨대, 완전 오리지널이다.


깨알 기억을 하나 더 추가하자면, 일동 광산에서 지낼 때 밥해주는 아주머니와 심부름하는 총각이 있었는데 그 총각과 마주치면 내가 화들짝 긴장하거나 슬그머니 피해 달아났다는 거다. 그야말로 전에 없던 일이었다. 아마도 시장 바닥에서 산 <꽃 한 송이>가 그렇게 위력을 발휘한 모양이다. 돌이켜보면 그 겨울 방학 이후로 나는 질풍노도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볼 빨간 사춘기’ 속으로 자박자박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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