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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Oct 22. 2023

유교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어쩌다 유교걸》

이미 여러 번 얘기했지만, 나는 유교맨이다. 리추얼을 중히 여기고 인간의 선의를 믿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내가 정말로 공맹의 가르침을 인생의 신념이나 철칙으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유교는 내게 일종의 생존술, 그러니까 내가 이만큼 하면 남도 최소한 날 막 대하지는 않으리라는 기대에서 비롯된 자구책에 가깝다. 물론 그 기대는 종종, 아니 자주 배반당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어 그냥 밀고 나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한문을 모른다. 유교 경전을 '각 잡고' 읽어본 적도 없다. 유교를 하나도 모르면서 맹자로부터 민주주의와 양심의 기원을 찾았던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내게 유교란 레토릭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이롱 유교맨인 나와 달리, 김고은은 정말로 진지한 유교걸이다. 꽤 오랜 시간 유교 경전을 공부했고, 지금도 학생들에게 사자소학을 가르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진지하게 유교의 가르침을 믿는 동시에, 꽤나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이자 비건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또래 여성들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어가는 현실에 분개하고, 돼지 새벽이와 잔디의 생추어리 활동에 꼬박꼬박 참여한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은 오늘 같기만을 바라는, 일제시대 태어났다면 소학교 선생으로 조용히 살다 도둑같이 해방을 맞이했을 나 같은 사람과는 완전히 다르다. 세간의 상식에 비추어 보면 '고루한' 유교와 어울리는 사람은 김고은보다는 내 쪽이겠지만, 정작 유교에 훨씬 진심인건 내가 아닌 김고은이다.


김고은의 첫 단독 저서(그는 이미 여러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고, 《함께 살 수 있을까》라는 훌륭한 인터뷰집을 내기도 했다)인 《어쩌다 유교걸》은 김고은이 페미니스트-비건이자 유교걸이라는, 얼핏 모순되는 두 정체성을 끌어안기까지의 좌충우돌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유교맨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웠던, 그러니까 피식자에 가까웠던 나와 달리 김고은은 구태여 유교 없이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총명하고, 모든 일을 똑 부러지게 해냈으며, 스스로의 선택으로 대안학교에 진학하고 대학을 자퇴했다. 아마 그가 조금만 덜 정의롭고 사리에 밝은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중학생 시절 꿈인 변호사가 되어 억대연봉을 받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교는 그런 '알파걸' 김고은에게 (아마도) 처음으로 당혹감과 난감함을 알려준 존재였다. 그는 제도권 바깥의 인문학 공동체인 문탁네트워크와 길드다에서 처음으로 동양 고전 공부에 도전하지만, 꽤 오랜 시간 '열등생'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가 유교를 다시 보게 된 청소나 식사처럼, 일상을 꾸리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일들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다. 그때부터 김고은에게 유교란 이해할 수 없는 골동품에서 자신과 주변을 새롭게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텍스트로 거듭나게 된다.


김고은이 유교의 가치와 쓸모를 증명하는 방식은 어쩌면 지극히 고전적이다. 그는 유교를 둘러싼 후대의 편견과 무지를 걷어내자고, 공자가 《논어》를 처음 썼을 때의 역사적 맥락에 집중하자고 호소한다. "공자께선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어!! OOO(여기엔 주로 주자학이 들어간다)이 오염시킨 유교를 원래의 '올바른' 모습으로 복원해야 해!!"는 정약용, 오규 소라이, 캉유웨이 등 유교의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사상가들이 즐겨 채택하는 방식이었다. 유교의 역사란 곧 주석의 역사라고까지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김고은은 의식했건 그렇지 않건 선배들의 길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쩌다 유교걸》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하나의 전통으로 이어져왔고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진짜' 유교란 이런 것이라 주장하는 주석서일 뿐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김고은이 유교에 단 주석이 퍽 의미심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유교의 충(忠)으로부터 자기 배려를, 서(恕)로부터 관계성을, 예(禮)로부터 리추얼을 이끌어낸다. 가부장적, 억압적, 봉건적 등 온갖 나쁜 수식어는 다 붙는 우교를 가장 급진적으로 전유코자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유교를 구원하려는 시도에 그치지 않는다. 김고은이 발딛고 선 또 하나의 지반인 페미니즘을, 거꾸로 유교를 통해 구원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기실 김고은은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고민하고 실천해온 사람이다. 비단 또래 여성이나 비인간동물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페미니즘 진영에서 썩 좋게 평가받지 못하는 기성세대와도 대화를 거듭하며 이해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고민과 노력을 인터뷰집 《함께 살 수 있을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들 너무나도 손쉽게 손절과 혐오를 말하고, 어느 진영에 서있든 내가 낸 돈만큼 무언가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소비자주의가 횡행하는 시대에, 김고은은 유교를 통해 관계와 연대의 가치를 복원하고자 한다.


물론 그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끊임없는 고민과 갈등의 연속에 가깝다. 《어쩌다 유교걸》의 가장 큰 미덕은 그 불협화음을 숨기거나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김고은은 유교와 페미니즘을 함께 가져가는 길이, 서로를 배려하면서도 의례를 통해 관계를 이어가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유교를 통해 가장 '앞선'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으며, 이를 위한 고군분투를 이 얇은 책에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


김고은은 솔직하게 인정한다. 왜 '굳이' 유교여야 하는지는 스스로도 뚜렷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오늘날 우리의 의식세계는 명료한 서양철학을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말이다. 누군가는 그가 책에서 인용한《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나 《숲은 생각한다》를 구태여 유교라는 필터를 거쳐 읽어야 하는지, 다시 말해 이미 서양철학에도 있는 이야기를 왜 유교에서 끌어와야 하는지 질문할 수도 있다.


김고은은 이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변명하지 않는다. 유교는 우리의 무의식에 깊이 잠들어 있다는, 빤하지만 그다지 설득력은 없는 주장을 끌어오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기는 유교의 '낯설음'이 재밌다고, 이를 통해 신의 현장에서 당연해 보이는 것들에 질문을 던지고 균열을 내고 싶다고 말이다. 유교맨을 자부하면서도, 나는 유교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 (아마 김고은도 이런 거창한 목표를 꿈꾸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교의 '낯설음'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고 나아가 바꾸고자 하는 그의 도전은 존경과 애정의 마음으로 응원하게 된다. 유교에 페미니즘과 생태주의라는 새로운 주석을 달고자 하는 김고은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맺을지, 앞으로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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