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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Feb 13. 2024

사라져간 가능성들에 대한 애정 어린 탐구

『북으로 간 언어학자』

한국이 더 이상 선진국이 아니게 될 때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박근혜 정부에서 총리로 지명된 문창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왜 총리가 아니라 총리로 ‘지명된’ 사람이냐면, 문창극 씨는 청문회조차 가보지 못하고 낙마했기 때문이다. 총리의 꿈을 좌절시킨 결정적인 ‘트리거’는 그가 강남의 한 교회에서 했다는 강연이었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이라며, 하나님이 고비고비마다 주신 시련과 고난이 민족을 단련시키는 기회가 되었다고 말했다. 당시 거의 모든 언론은 문창극 씨의 이 발언을 전형적인 식민통치 미화, 혹은 식민지근대화론으로 보도했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 최소한 일제 식민지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한국에서 그가 총리가 될 수 없었던 건 따라서 당연한 일이었다.

     

 이 사건을 한 보수 기독교 인사의 ‘잘못된’ 역사관이 빚은 해프닝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문득문득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 건, 문창극 씨의 생각이 그리 예외적이거나 이상한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어린이용 학습만화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를 소재로 삼은 거의 모든 콘텐츠는 비극적인 과거가 빛나는 오늘을 위한 ‘시련’이었음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좌와 우의 구분이 없다. ‘시련’을 통해 얻게 된 ‘성취’가 경제발전이냐 민주주의냐의 차이 정도만 있을 뿐. 특히 한국이 명실상부 선진국으로 올라선 2010년대 후반부터는 보다 적극적이고, 공공연한 형태로 ‘시련 사관’이 유통되었다, 고 생각한다. 당장 문재인 전 대통령의 연설문집인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문제는 이러한 ‘시련 사관’에서, 근현대 한국이 겪은 모든 ‘시련’은 오로지 ‘성취’와 연결됨으로써만 그 의의를 인정받는다는 점이다. 일제 식민지배도, 분단과 전쟁도, 군사독재와 노동착취도 오늘날 한국의 번영을 위한 밑거름으로 간단히 치환된다. 뒤집어 말해 현재의 ‘성취’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과거의 ‘시련’은 시련조차 될 수 없다. ‘시련’과 ‘성취’라는 간단하지만 강력한 도식을 비껴나는 인물이나 사건은 역사의 저편으로 밀려나고 말이다. 그렇다면 ‘성취’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혹은 그다지 ‘시련’처럼 느껴지지 않는 역사를 구태여 발굴하고 배워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정확히 말해 대중에게 이를 설득할 수 있는가? 나아가 만일 한국이 더 이상 선진국이 아니게 될 때, 그러니까 현재가 그리 자랑스럽거나 떳떳하지 않은 날이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과거를 긍정할 수 있을 것인가?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닥쳐올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타가키 류타의 『북으로 간 언어학자』는 흥미진진하게, 무엇보다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임화의 월북을 다룬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북으로  간 시인』을 연상케 하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책은 해방 이후 월북해 초창기 북조선 언어정책을 설계하다시피 했던 언어학자 김수경에 대한 평전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김수경인가? 그가 7개 언어로 된 원서를 동시에 읽어가며 물 흐르듯 수업할 정도의 천재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오랫동안 잊혔다 최근에야 알려진 비운의 인물에 가깝다. 

     

 그렇다고 『북으로 간 언어학자』가 수많은 평전이 그러하듯, 김수경에게 ‘마땅한’ 자리를 찾아주겠다는 ‘복권(復權) 시도’는 아니다. 이타가키는 김수경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왜 그에게 주목해야 하는지 애써 강변하지 않는다. 이타가키가 주목하는 건 김수경의 ‘실패’다. 김수경은 오늘날 한국인과 일본인이 보기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실패한’ 국가인 북조선을 선택했다. 그가 북조선에서 펼친 언어정책 역시 끝내 채택되지 못했다. 말하자면 이중의 실패를 한 셈인데, 이타가키는 오히려 이로부터 현재를 상대화할 가능성을 본다. 대한민국과 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 현재 우리가 쓰는 한국어로 귀결되지 않는 숱한 시도와 가능성들이 김수경의 삶에 응축되어 있다. 일체의 역사를 현재의 ‘성취’를 위한 ‘시련’으로 여기지 않는 역사 연구, 이타가키는 이를 “비판적 코리아 연구”라 이름 붙인다.

      

식민지의 “소쉬르 보이”, 신국가의 언어를 설계하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고 활동했던 숱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조선의 지식청년이었던 김수경 역시 제국 일본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다만 그가 받았다는 영향은, 다른 지식인들과 비교해 조금 독특한 구석이 있었다. 경성제대 시절 김수경의 사실상 지도교수였던 고바야시 히데오는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를 세계 최초로 번역한 언어학자였고, 김수경은 이러한 고바야시와 “면학의 고락을 함께”하며(p.89.) 구조언어학을 폭넓게 수용했다. 구조언어학이 식민본국 일본에서도 생소한 ‘최신 학문’이었던 만큼, 어쩌면 김수경은 일본이라는 ‘매개’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언어학의 세계적 조류와 직결했던 것이다. 인도유럽어를 중심으로 수많은 언어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탐구하며,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의 구조를 발견하려는 구조언어학의 이상은 이후 김수경의 삶과 학문을 틀 지우게 된다.

     

 이처럼 조선은 물론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을 “소쉬르 보이”였던 동시에, 식민지 조선의 지식청년 대부분이 그러했듯 “마르크스 보이”이기도 했던 김수경이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일제가 패망하고 한반도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두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언어학은 그 추상성과 복잡함 때문에 종종 천재들의 유희처럼 여겨지곤 하지만, 실은 굉장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목표를 갖는 학문이다. 사람의 말과 행동을 틀 지우는, 언어에 대한 규범을 마련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특히 베네딕트 앤더슨이 일찍이 간파했듯 이른바 민족/국민(Nation)의 형성에 언어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연히 ‘국민’ 창출을 목표로 하던 두 나라는 언어학자 김수경의 재능을 탐낼 수밖에 없었고, 남쪽의 경성대학 교수였던 김수경은 이른바 “국대안 파동”을 계기로 월북하게 된다.

      

 그렇게 김수경이 선택한 북조선의 2인자가, 공교롭게도 주시경의 제자였던 김두봉이었다. ‘장군’ 김일성과 대조적으로 ‘선생’이라 불렸던 그는, 1947년 2월 서울에서 발행되던 종합잡지 《민성民聲》의 북조선 특파원이었던 박찬식이 한글과 문자정책에 대해 간단한 질문을 던지자 입에 거품까지 물어가며 문자개혁에 대한 열변을 토할 정도로 열성적인 언어학자였다. 박찬식은 “천하의 혁명가를 만나서 겨우 한글 이야기밖에 하지 못했다는 건 기자로서 여지없는 낙제”라며 한탄했지만(p.159.), 김두봉에게는 ‘정치혁명’과 ‘언어혁명’이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국가 건설이란 곧 이를 떠받칠 언어체계를 건설하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김두봉 밑에서, 김수경은 마치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으로 자신의 구상을 펼칠 수 있었다.

      

 당시 대한민국과 북조선을 막론하고 새로운 언어체계를 마련하는데 가장 중요했던 과제 중 하나는, ‘한자의 빈자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였다. 특히 북조선은 초기부터 언어생활에서 한자를 완전히 배격할 것을 선언했는데, 이로부터 발생하는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일단 국한문 혼용에서 벗어나는 순간 종래의 모아쓰기를 고집할 이유가 없어진다. 애당초 《훈민정음》부터 중국의 소리를 최대한 올바르게 받아 적기 위해, 다시 말해 한자를 전제한 상태에서 탄생한 문자였다. 한자음의 소리를 한글로 어떻게 표기할 것인지도 골치였다. 국한문 혼용 시절에는 속으로 어떻게 읽든 한자로 써놓으면 그만이었지만 순한글로 표기하는 이상 이를 어떻게 쓸지, 가령 勞動을 “노동”으로 쓸지 “로동”으로 쓸지 결정해야 했다.

      

 김수경이 내놓은 답은 풀어쓰기, 그리고 형태주의였다. 풀어쓰기란 한글의 자모음을 알파벳처럼 전부 풀어서, 그러니까 “김수경”을 “ㄱlㅁㅅㅜㄱㅕㅇ”으로 적는 방식이다. 형식주의는 실제 발음과는 다를지언정 같은 어(語)는 같은 철자로 표기한다는 원칙이다. 물론 이 두 방침은 김수경만의 독특한 발상이라기보다는 주시경 이래 조선의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언젠가는 달성해야 할 목표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수경은 특유의 어학 실력과 구조주의 언어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를 뒷받침할 탄탄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 변칙적 표기를 줄이기 위한 ㅿ, ㆆ를 비롯한 “신6자모”의 고안, 풀어쓰기를 채택할 때 적절한 끊어읽기를 위한 “절음부” '의 도입은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외부’를 잃은 ‘내부’의 귀결, 학문의 ‘주체화’

     

 앤더슨의 말마따나 한문이나 라틴어처럼 지나치게 표의적이지도, 민중의 입말처럼 지나치게 표음적이지도 않은, ‘국민’을 창출하는데 가장 적합한 언어를 고안하려던 김수경의 야심찬 기획은, 그러나 1958년 김두봉이 실각하며 좌절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언어학 논문을 발표하는 등 활동을 이어가긴 했으나, 1968년 김일성대학 문학부에서 중앙도서관 사서로 사실상 좌천되었다. 김수경의 숙청과 함께 북조선의 학술계, 나아가 사회 전체도 크게 달라졌다. ‘자주’와 ‘주체’의 구축이 지상과제로 떠오르며 소련을 비롯한 해외의 연구 업적에 대한 참조가 “외래 사상의 기계적 적용”으로 비판받게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토”에 대한 규정 변화다. “~이”, “~가”와 같은 조사를 일컫는 말인 토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북조선에서 퍽 오랜 시간 논쟁의 대상이었다. 만일 토를 독립적인 품사로 본다면 굴절어인 인도유럽어족 언어들과 구별되는 교착어로서 조선어의 ‘특수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반면 토를 접사로 본다면 조선어와 다른 인도유럽어족 언어들 사이의 ‘보편성’을 중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일단 1949년 김수경의 주도로 편찬한 『조선어 문법』에서는 토를 독립적인 품사로 취급하지 않고, 명사나 형용사 등 각 품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보조적으로 다루었다. 인도유럽어라는 ‘보편’의 맥락에서 조선어를 이해코자 했던 것이다. 당시 소련 언어학계를 주도하던 마르학파의 공식주의가 반영된 결과였다.

      

 반면 1950년 6월 20일 스탈린이 《프라우다》에 마르학파를 비판하며 언어의 전 인민적 성격을 강조하는 논문을 실은 뒤인 1954년 간행한 『조선어 문법』에서는 토를 “보조적 품사”로 새롭게 자리매김했다. 이는 이전에 비해 토, 나아가 조선어의 ‘특수성’을 강조한 것으로, 스탈린의 논문에서 “민족적 자주성”을 추출해내고자 했던 김수경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였다. 물론 이때의 “민족적 자주성”이란 어디까지나 다른 나라들과의 폭넓은 비교라는 보편적·국제주의적 시야를 전제한 것이었다. 앤더슨이 간파했듯 ‘내셔널(national)’한 것은 ‘인터내셔널(international)’ 혹은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한 지평에서만 비로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의 확립”이 중시되는 1960년대 이후에는 인도유럽어의 ‘보편성’을 중시하는 “토는 접사다”, 인도유럽어의 ‘보편성’ 위에서 조선어의 ‘특수성’을 함께 고려하는 “토는 접사지만 일부 다르다”는 종래의 주장 대신 “토는 토다”라는, 다른 언어와의 비교를 일체 거부하며 조선어의 ‘특수성’만을 강조하는 주장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나아가 어음론, 형태론, 문장론의 3부로 구성된 기존의 문법서를 말소리, 품사, 토, 문장의 4부로 구성하는 등, 아예 토를 중심으로 조선어의 문법체계를 새롭게 짜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이론적 권위의 원천을 민족 ‘내부’의 지고한 존재(수령)에게 구하고, 일체의 ‘외부’를 지워가는 학문의 ‘주체화’ 과정에서(p.366.), 외부와 내부, 특수와 보편 사이의 긴장과 균형을 잃지 않았던 다언어 구사자 김수경의 설 자리가 없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열린 것과 닫힌 것, 인물사의 어려움  

   

 식민지의 지식청년이었던 “소쉬르 보이” 김수경이 해방 이후 신국가의 언어체계 건설에 투신하고, 1960년대 학문의 ‘주체화’가 이루어지며 끝내 숙청되는 과정은 무척이나 극적이고 또 흥미진진하다. 무엇보다 이타가키는 김수경이 인생의 주요 고비마다 마주했던 여러 가능성을 풍성하게 드러냄으로써, 여러 맥락이 얽힌 ‘교차로’로서 개인의 삶을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드러낸다(p.14.). “머리말”에서 밝히듯 그는 김수경이라는 개인이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때그때 판단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역사 서술에 지배되고 있는 한반도를 둘러싼 담론에 대항해 보고 싶다”는(p.41.) 포부를 가지고 있고, 감히 평가하자면 이를 멋지게 성공시켰다.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김수경을 통해 현재로 수렴하지 않는 역사 속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복원해내는 이 책이, 막상 김수경 개인을 다룰 때는 그의 삶과 사고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전제하는 듯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 ‘무언가’란 다름 아닌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이다. 실제로 이타가키는 김수경이 경성제대 시절 고바야시로부터 구조주의 언어학을 사사한 과정을 적잖이 공들여 서술한다. 이후 김수경의 삶에서 구조주의 언어학은 계속해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통주저음(通奏低音)처럼 묘사된다. 심지어 이타가키는 김수경의 한국전쟁 수기 역시 소쉬르의 랑그와 파롤 개념에 따라 분석을 시도한다(p.228.).

      

 요컨대, 이타가키가 그려낸 김수경은 소쉬르와 구조주의 언어학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어쩌면 김수경의 삶이란 청년 시절 받아들인 구조주의 언어학을 조금씩 변주시켜가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경성제대 시절 김수경의 배움에서 일본이라는 ‘매개’가 갖는 영향력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다시 말해 그가 유럽에서 유학한 조선인 혹은 일본에서 공부한 일본인처럼 보인다는 점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에게 직접 가르침을 준 고바야시의 존재를 잊게 될 만큼, 『북으로 간 언어학자』에서 김수경과 소쉬르의 거리는 가깝게 묘사된다. (책 속에서 고바야시는 김수경의 언어적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를 격려해주며,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김수경을 그리워하는 고마운 은사로 그려진다.) 

    

 김수경과 소쉬르의 이러한 ‘밀접함’은, 인물의 삶을 다룰 때 우리가 무엇을,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이끈다. 인물사 혹은 평전을 쓰거나 읽을 때, 우리는 인물의 삶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전제하곤 한다. 이는 사실 불가피한 것이기도 한데, 그 ‘무언가’가 없다면 애당초 인물사나 평전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적절치 않은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실험을 할 때 어떤 변수는 꼭 통제되어야 하듯이, 한 인물을 통해 역사 속에 존재했던 다양한 가능성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결국 인물의 삶은 어느 정도 일관적으로 묘사되어야 한다. 『북으로 간 언어학자』가 결과론적 역사 서술에 맞서 수많은 가능성의 조각들을 발굴해낼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래서일 것이다. ‘열린’ 역사를 그려내기 위해 무언가는 ‘닫혀야’ 한다.

     

 이 역설을 어떻게 돌파하거나 극복할 수 있을지, 하다못해 우회라도 할 수 있을지, 아직까지는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하필이면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당장 써야 하는 글 역시 넓은 의미의 인물사기 때문에 더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었다. 아마 나 역시 내가 다룰 인물의 삶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글을 쓸 것이고, 앞으로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비단 ‘남의 이야기’를 읽거나 쓸 때뿐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지어낼 때도 그것이 최대한 완전하기를 바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떻게 하면 삶을 일관하는 ‘무언가’를 상정하지 않고 한 인물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을지, 계속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다.

      

선의가 모여 빚어낸 감동적인 이야기 

    

 구태여 이런 어렵고 답답한 이야기까지 갈 것도 없이, 『북으로 간 언어학자』는 그 자체로 무척이나 재밌고 또 감동적인 이야기다. 단언컨대, 학술서와 교양서를 막론하고 현재 한국어로 쓰였거나 번역된 역사서 중에서 『북으로 간 언어학자』 이상으로 흡인력 있는 이야기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책만큼 재밌게 읽었던 인물사는 스티븐 그린블랫의 셰익스피어 평전 『세계를 향한 의지』 정도밖에 없었던 것 같다.

      

 특히 남쪽에 남은 김수경의 가족들 이야기는 눈물 없인 읽기 어렵다. 김수경이 도쿄제대에서 유학할 때 만난 아내 이남재는 해방 후 남편을 따라 얼떨결에 38선을 넘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정치강습을 위해 점령 지역으로 파견된 남편을 기다리다 아이들과 시어머니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왔고, 그렇게 북으로 다시 올라온 남편과 생이별했다. 이후 이남재는 홀로 네 아이를 기르고 시어머니를 모시며 부산에 자리를 잡았고, 맏딸 김혜자가 졸업할 무렵 남편의 호적을 정리했으며, 나중에는 둘째 아들을 제외한 온 가족이 캐나다 토론토로 이민을 갔다. 이남재가 김수경과 직접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건 1986년에 이르러서였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철석같이 믿었던 남편이 일찌감치 재혼했단 소식이었다.

      

 물론 김수경의 재혼은 온 가족이 남으로 내려간 상황에서 간첩이란 의심을 피하기 위해 내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남편과 함께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만으로 살아왔던 이남재에게 남편의 재혼은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었다. 김수경이 1988년 둘째 딸 김혜영과 재회하고, 1996년 첫째 아들 김태정이 평양을 찾았음에도 정작 아내 이남재와의 상봉은 1998년에야 이뤄진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끊임없이 이남재에게 재회를 요구하는 김수경의 모습은 어딘가 이기적이고, 철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장남 김태정이 평양에 살던 시절 거주했던 “건국의 집4호”를 재현한 평면도에도 “아버지가 부엌 선반을 만든 것이 부엌일의 전부”라 쓰여 있다(p.415). 그는 가족과 함께 살 때나 떨어져 살 때나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데 서투른, 전형적인 ‘학자형’ 인물이었던 것 같다. 반면 그것이 선천적인 성격이든, 타지에서 홀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들을 기르며 후천적으로 기른 성격이든 이남재는 훨씬 강인하고 주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내가 책을 읽다 끝내 울게 된 대목도 부산에서 교사로 일하던 1971년 설에 일직을 하는 이남재의 사진이 실린 페이지였다(p.425.). 사진 속 그는 당당하고 자신만만해보이면서도, 어딘가 회한에 잠긴 모습이었다.

     

 토론토로 건너간 이남재 가족은 이타가키가 『북으로 간 언어학자』를 쓰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2010년 3월 이타가키가 북미에 거주하는 한반도(조선반도) 북부 출신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 토론토를 찾았을 때, 그를 자동차로 숙소까지 데려다준 사람이 다름 아닌 김수경의 둘째 딸 김혜영이었던 것이다. (그땐 이미 남편의 성인 임(Im)을 쓰고 있어서, 이타가키가 아버지 역시 임 씨 성을 쓰겠거니 하고 넘겨짚기도 했다.) 이후 이타가키는 김혜영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선의로 김수경에 대한 자료를 모아갔고, 결국 이 책을 완성했다. 

     

 그 점에서 몇 페이지에 걸친 “맺음말”의 감사인사는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이다. 보통 “감사의 말”은 책의 가장 재미없고 형식적인 챕터이기 마련이지만, 이타가키는 누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를 굉장히 구체적으로, 누가 읽어도 그가 정말 고마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끔 상세히 밝혔다. 본인의 말마따나 『북으로 간 언어학자』가 숱한 만남이 아니었다면 나올 수 없는 책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p.17.), 애초에 그가 선한 마음을 갖고 이 불가능해 보이는 작업을 시작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타가키의 선의에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의 선의가 공명한 셈이다. 뭔 일을 해도 누군가의 숨은 의도부터 의심하게 되는 시대에, 결국 좋은 이야기란 좋은 마음이 모여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이처럼 아름답게 보여주기도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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