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쉬이 오지 않는다.
다만 잠이 든지도 모르게 일어나면 뭔가 부자연스럽다.
잠자는 나와 잠들지 않는 내가 느껴진다.
그래서 무섭다.
잠자고 싶지가 않다.
평소처럼 피곤한 아침을 맞이했다.
세수를 하다 보니 손이 따끔거렸다.
까진 손바닥.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출근을 알리는 자명종 소리에 서둘러 옷을 입고 나선다.
까진 손바닥이 여전히 쓰라리다.
만원 버스를 타고 늘 마주하는 그녀가 있다.
매번 같은 시간, 같은 버스를 탄다.
운명이 아닐까란 생각에 몇 번 대시를 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아 실제가 아니라 상상만으로.
난 그렇게 배짱 좋은 사람은 아니니까.
그녀와 나는 사무실이 근처인 듯하다.
그녀가 내리면 나도 곧 따라 내리고 그녀가 우리 회사 앞 건물로 들어가면 나와 그녀의 출근데이트는 끝난다.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나는 무척 할 말이 많다.
궁금한 게 많고 할 얘기도 많다.
하지만 늘 상상뿐이다.
"자, 이번 일 모두 잘 마무리할 수 있게 잘 부탁해."
평소답지 않게 주 부장이 회식이 끝나고 직원들 손을 일일이 잡으며 말했다.
"선배님, 근데 손바닥이 왜 이렇게 까칠해요?"
박 차장이 친분을 과시하며 묻자,
"너희 억지로 끌고 가느라 힘들어서 그런다. 응?"
주 부장의 평소에 없던 농담에 다들 과하게 웃으며 헤어졌다.
얼마 후 사고가 생겼다.
회계상의 이슈가 감지되었다.
아무도 모르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지만 곧 감사기간이라 이를 피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자금 추적에 추적을 통해 누군가의 횡령이 의심되었고 이를 통해 회사는 물론 수많은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여러 차례 점검했고 확인했다 생각했는데 그 몇 개의 숫자 누락에 우리 팀은 난리가 났다.
"넌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한 거야, 그게 회사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주 부장은 회의실에 들어가기 전에 내게 신신당부를 했다.
난 애초에 뭐가 잘못되었는지 잘못했는지도 모르는데 다짜고짜 날 잡고 얘기하니 뭔가 문제가 있는 듯싶었다.
내 탓인가? 심히 불안해졌다.
범인은 다행스럽게도 따로 있었다.
그럼에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주 부장의 다짐이 무척 신경 쓰였다.
내가 해왔던 일들이 모두 부정되는 기분이었다.
"분명 같은 자리에서 같은 데이터로 회의를 진행했는데 그동안 관련 사실이 어떻게 누락이 될 수 있지? 원래 숫자라는 건 상호검토가 기본 아니야?"
이사님은 평소와 달리 주 부장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건 이사님이 박 차장을 전담으로 맡기라고."
주 부장이 김이사에게 책임을 돌리며 말하려는데 사장님과 법률팀이 들어오셨다.
"이사님들 제외하곤 다들 일 보세요."
대표님과 이사님, 법률팀의 회의는 금방 끝났다.
내용은 추후에 확인되었지만 자진횡령 사안을 선공시하고 담당직원 처벌과 자사주 매각 등으로 주주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했다.
"리소스 낭비, 자원 낭비"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주 부장도 오늘은 말이 없었다.
남아서 야근을 하라는 말도 없었다.
퇴근 시간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신기했다.
퇴근 후 씻고 평소처럼 잠자리에 누웠다.
하는 것 없이 피곤한 하루가 지났다는 안도감과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배고픔이 몰려왔다.
하지만 귀찮음이 배고픔을 이겨냈고 피곤함이 잠을 선택했다.
그렇게 잠이 든 것 같았다.
새벽에 자살 사건이 났다.
앞집 건물에서 생활고 비관으로 죽었다고 했다.
우리 동네와 상관없는 뉴스라 생각했는데 사건이 일어났다.
이틀 후 또 자살사건이 났다.
그리고 며칠 후 또.
이젠 자살 사건이 아니라 연쇄자살인 듯싶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남은 사람들만이 마음이 심란해지는.
글루미선데이 증후군에 의한 연쇄자살이란 얘기도 나왔다.
비도 오지 않았고 평일이었지만 그렇게 누군가는 죽어 나갔다.
아무런 유서 없이 그냥 난데없이.
며칠 동안 뉴스에 우리 동네가 조명되며 갖가지 가설이 언론에 노출되었다.
한 편에선 타살이란 음모론도 생겨났다.
타살?
내 까진 손바닥은 이미 다 아물어 있었다.
집을 나섰다.
평소와 달리 무척 밝은 하늘이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버스에 올랐다.
여전히 버스는 만원이었고 그녀는 그 사이에 힘들게 몸이 끼여 있었다.
오늘은 용기 내볼까?
"잠시만요"
사람들을 비집고 그녀 앞으로 갔다.
그녀는 아는지 모르는지 나와의 시선이 엇갈렸다.
막상 앞에 왔지만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버스에 내리려는데 그녀가 앞으로 넘어질 듯했다.
난 넘어지는 그녀를 잡아주었고 그녀는 내게 감사하다고 목례하며 서둘러 앞서 갔다.
손이 무척 부드러웠다.
기분이 좋았다.
내일은 말을 걸어봐야지.
멀리 옥상 위에 주 부장이 보였다.
잠깐 햇빛에 비춘 걸까?
그의 눈가가 순간 반짝였다는 게 느껴졌다.
우는 건가?
그리고 앞으로 스르륵?
"안돼."
잠에서 깼다.
아니 꿈에서 깼다.
왜 며칠간 주 부장이 말이 없었는지 꿈을 통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혼자 감내하고 있었구나.
그럴 수 있겠다.
혼자 해석하고 상상하니 퍼즐이 납득이 갔다.
오늘 회사에 가면 조금 더 살갑게 그를 대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너무 맑아 다시 잠이 들지 않을 것 같은 시간.
핸드폰을 보니 또 분쟁 중인 정치기사와 누군가의 자살기사와 횡령사고 찌라시들
그리고 부고 문자 한 통.
"주 00님이 불의의 사고로 인해 영면하셨습니다."
꿈이 아니었다.
나는 불현듯 손바닥을 만져봤다.
까져있다.
불을 켰다.
손바닥에 깊게 잡아끈 노끈의 흔적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