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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PI May 10. 2022

철 지난 이야기


작업실 바로 앞 편의점은 노모와 그 아들이 운영하는데

사장인 할머님은 항상 웃는 얼굴로 인사해주시고 내가 사는 물건도 기억해내서 미리 꺼내 주신다.

편의점 어플 사용법이며 포인트 적립도 어지간한 젊은 사람보다 능숙하게 사용하고

목소리도 저녁 FM 라디오에서 들은 법한 차분하고 좋은 목소리다.


그 편의점을 이용하고 나오면 늘 기분이 좋아서

나는 합정동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가도 편의점에 가고 싶으면 되도록

굳이 몇 개의 편의점을 지나치고 작업실 앞의 그 편의점으로 간다.


오늘도 점심시간에 편의점에 들렀는데

할머니가 "언제 여름이 왔대요? 봄은 만진 적도 없는데." 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연신 닦아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편의점 안은 항상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그 안에서만 지낸다면 계절이 바뀌는 것을 쉽게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봄은 말없이 가지 않았다.

찬 바람에 떨어지는 목련으로, 나뒹구는 벚꽃잎으로

작지만 분명히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작별을 말했다.

바뀌는 계절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을 철 모르는 철부지라고 한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계절이 바뀌는 것에 정말이지 둔감했다.

그저 봄이라니까 봄인가 보다. 겨울이라니까 겨울인가 보다 할 뿐이었지

철마다 바뀌는 계절의 운치를 온전히 누릴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내가 안팎으로 소란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2022년 4월 상수동


얼마 전 주말에 나는 J 양과 통화를 하며 아파트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만개한 철쭉 사이 벤치에 앉아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잠옷바람에 슬리퍼를 끌고 나와서는 색이 이쁜 꽃만 골라서 뚝뚝 꺾어댔다.

영 불편했는데 불현듯 그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중학교 1학년 시절의 내가 보였다.


13살의 내가 길가에 핀 꽃이 너무 이뻐서 몇 송이 꺾어 집으로 가져와 화병에 담았다.

그러나 꽃은 금방 시들어지고 향도 날아가버렸다.

곧 그냥 길가에 핀 그대로 둘 것을 후회했다.


얼마 뒤 산책로 꽃 밭에는 '만지지 마시오.' 팻말이 붙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철부지가 많은 모양인 것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죽었다 깨어난 예수를 보고 놀라 잡으려 하자

예수가 말한다. "나를 만지지 말라."

영화 타짜에서도 고광렬이 "죽으려면 대통령 불알을 못 만지냐." 한다.

가수 현철도 노래했다. "손대면 토-옥 하고 터질 것 만 같은 그대-."


우리는 무엇이든 내키면 만지려 한다.

잡으려 하고 움켜쥐려고 한다.

법정 스님은 그것을 욕심이라 했다.

어떤 것을 가지는 대신 그것을 쓰다듬어 누릴 줄 아는 사람이 먼저 되고 싶다.




출입금지 푯말이 있는 곳에 허락 없이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경범죄 처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공원에 따라 10에서 15만 원의 범칙금이 있다고 하니 참 씁쓸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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