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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고나 Feb 15. 2024

대구탕집 2층 공방 3 (완결)

시간을 달리는 신비로운 공방 이야기.


19. 솔직하지 그랬냐     


 지연씨는 친구 선희씨와 도마에 그림을 그리다가 너무 잠이 쏟아져서 잠깐 졸았다가 눈을 떴다. 우울증에다 수면장애도 있어 평소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선잠을 자다보니, 자고 일어나도 늘 피곤하고, 개운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잠시 졸았다가 깼을 뿐인데, 너무나 상쾌했다. 마치 오랫동안 푹 숙면을 취한 것처럼. 


'그런데 얘는 어딜 간거지? 그리고 여긴 또 왜 이렇게 어두워?'     


 지연씨는 조금전까지만 해도 밝았던 공방이 너무 어둡게 느껴져 살짝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나무 분진 냄새와 여기 저기 놓여있는 나무 자재들. 그리고 나무를 자르거나, 켤 때 쓰는 기계들이 밝을 때 친구와 함께 볼 때는 뭔가 포근한 느낌이었는데, 어두워지고, 친구가 보이질 않으니 뭔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선희야~”     


 지연씨가 선희씨를 불러봤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지연씨는 두려운 마음에 자리에서 조심조심 일어서서 공방 입구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끼이익     


 지연씨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밟은 나무 바닥의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와 지연씨는 스스로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렇게 가만히 멈춰서서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공방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지연씨는 다시 한 걸음 내디뎠다. 또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번에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해!" 


지연씨는 걸음을 빠르게 걸었다. 삐그덕 삐그덕 요란하게 소리가 나는 발걸음을 계속 옮겨 들어왔던 공방의 입구 문앞에 도착을 했는데, 뭐야? 문이 없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여기로 들어왔는데!!     


 지연씨가 문이 있었던 곳을 만져보고, 밀어봤지만 딱딱한 벽만 만져질 뿐이었다. 


"허어업!!"     


 두렵고 무서운 마음에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지연씨는 정신을 차리려 가까스로 애쓰며 호흡을 조절했다. 


'찾아야해! 여기서 나가는 문을! 내가 잠시 착각한 걸수도 있잖아? 그래. 그럴 수도 있어. 어서 찾아보자. 찾지 못하면 창문을 깨서라도.....어? 뭐야? 남편이잖아? 날 데리러 온 건가? 여보!'

     

 지연씨는 죽 늘어선 공방의 여러 창문들 중 한 곳에서 남편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급히 그곳 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어? 뭐야?.. 여기는 이곳이 아닌데?..... 지연씨가 창을 통해서 본 남편은 어느 술집으로 급히 들어가고 있었고, 내리는 비가 우산을 쓰지 않은 남편의 몸을 적셨다. 


 저긴 어디고 날씨는 또 왜 이래? 지금 비가 내리나? 지연씨가 다른 창문을 쳐다봤는데, 헉! 이건 또 무슨 조화야? 다른 창에서는 해가 쨍쨍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그 옆 창에선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지연씨는 너무 놀라 입을 떡 벌리고 멍한 눈으로 창문들을 쳐다봤다.     


“미안. 미안. 늦었지?”     


 남편의 목소리가 조금 전 남편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던 그 창에서 들렸다. 지연씨가 다시 그 창을 들여다보니 남편이 술집으로 들어서는 장면에서 어느새 술집 안으로 바뀌어 있었다.     


“괜찮아. 야. 우산 없냐? 다 젖었네.”     


어? 은우씨? 요즘 남편하고 연락을 거의 안 하던데....     


 남편이 들어간 술집에서 은우씨가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우씨는 남편과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소위 말하는 절친이었다. 가끔 부부끼리 모임도 함께 하고는 해서 지연씨도 은우씨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자주 연락하던 은우씨와 남편이 이상하게 요즘 들어 연락을 잘 하지 않았다.     


“술만 마셨다 하면 우산을 잃어버려서 그냥 놔두고 왔다.”     


“개념도 놔두고 오지 그러냐. 술 마시면 잃어버릴 텐데.”     


“당연히 놔두고 왔지. 그래도 지갑은 챙겨왔다. 가는 길에 너 집 사주려고.”     


“집?”     


“그래. 요기 옆 철물점에 신상 개집 있더라. 너 술 마시면 필요할 것 같아서.”     


“야이씨!”     


“하하하하하!!”     


 둘은 시답잖은 농담을 하면서 소주를 마셨다. 처음 농담을 주고 받으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 땐 평소와 다름 없는 모습이었는데, 술자리가 무르익어가면서 점점 지연씨 남편과 은우씨가 나누는 대화가 뚝. 뚝. 끊기면서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뭐지? 둘이 신나게 웃고 떠들다가 왜 점점 어색해 지는 거지? 벌써 술이 취했나? 


이제 둘이서 겨우 소주 한 병 반을 비웠을 뿐이었다. 한 사람당 아직 한 병도 다 마시지 않았는데, 평소 혼자서 두 병은 거뜬히 마시는 사람들이 취할 정도는 아직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 취했다면 더 많은 말을 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어색하게 말이 끊기다니.... 뭔가 이상했다.     


 편하게 술을 마시던 두 사람 사이에 묘하게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색한 몇 마디의 말이 더 지나가고, 은우씨가 결심을 한 듯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지훈아.”     


“어?”     


지연씨의 남편 지훈씨는 은우씨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긴장한 모습이었다.     


“저번에 말한 돈.”     


뭐? 돈?


“어.”     


“미안한데 이번에는 좀 어렵겠다.”     


“아... 괜찮아.”  

   

어색한 미소를 짓는 남편의 모습.


“미안하다.”     


“아니야. 아니야. 미안하긴... 부탁한 내가 미안하지.”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는 은우씨의 말에 지훈씨는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 웃음에도 아쉬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나도 빌려주고는 싶은데... 상황이 좀 그래. 요즘 경기도 안 좋고.”     


“이해하지. 이해해. 괜찮다니까. 내가 괜히 돈 이야길 해가지고. 야! 마셔! 오늘은 이 형님이 쏜다!”     


 상황을 보아하니 남편이 친구에게 돈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지연씨는 의아했다. 남편은 늘 돈이 있는 줄 알았는데, 친구에게 돈을 빌리려고 했다니. 만약 부족한 돈이 있다면 일단 카드로 결제를 먼저 하면 되는 일일 텐데, 굳이 빌려야 할 필요가 있나?      


 돈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야 둘은 다시 농담을 하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보통의 술자리처럼. 술병이 계속 늘어가고 둘의 모습에서도 취기가 오르는 것이 보였다.  더이상 돈 이야기는 서로 꺼내지 않았다.  

 

 소주를 거나하게 마시고,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연씨의 남편 지훈씨가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려는데, 계산하는 직원이 말했다.     


“계산 하셨는데요?”     


“예?”     


지훈씨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은우씨가 다가왔다.     


“야. 그냥 가. 내가 계산했다.”     


“뭐? 야이씨... 내가 계산한다고 했잖아!”     


“뭘... 누가 계산하면 어떠냐?”     


“안 돼. 안 돼. 야. 니가 저지른 일이다. 네가 계산했으니까 2차 가자.”    

 

“이렇게 많이 마셔놓고 2차는 무슨 2차야?”     


“그럼 니가 계산을 안 했어야지!”     


“괜찮아. 그냥 들어가자.”     


“에이. 왜 그래? 그냥 맥주나 딱 한잔 더 하고 들어가자. 가볍게.”     


은우씨는 계속 사양을 했지만, 남편은 자신이 계산하지 못한 걸 아쉬워하며 2차를 고집했다. 결국 둘은 짧은 실랑이 끝에 바로 옆에 있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크으~ 비도 시원~하게 내리고, 친구도 있고! 조오~타!”     


생맥주 500 두 잔을 시켜 한 모금을 마신 남편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얼큰~하게 취하셨네. 지연씨는 남편이 취했을 때 하는 행동과 말투를 잘 알았기에, 남편이 지금 제법 거나하게 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도 조~~타!!”     


은우씨도 살짝 혀가 꼬인 발음으로 맞장구쳤다. 둘 다 제법 취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은우야...나는... 니가 그렇게 상황이 어려운 줄 몰랐다...”     


“어?...뭐가....”     


“너 임마. 상황이.... 안 좋아서.. 나한테 돈 못빌려 준다며... 너 형편도 어려운데... 내가...빨리 저번에 빌린 5천 만원 갚아줄게......너무... 걱정하지마..... 이번에도.... 네가 나한테 빌려 줬으면..... 내가 아파트를 팔아서라도..... 갚아주려고 했다....”      


남편의 말에 지연씨는 깜짝 놀랐다. 


뭐? 저번에 빌린 5천 만원? 그럼, 저번에 빌리고, 이번에 또 빌리려고 한 거란 말이야?     


지훈씨의 말에 술에 취한 은우씨가 순간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피식 웃었다.   

  

“야....내가 아무리 그래도.... 지훈이 너보다 힘들겠냐....?”     


“....뭐?....”     


“....너 임마... 경수한테도...3천만 원 빌렸다며?...”     


은우씨의 말에 남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술에 취해서 살짝 감긴 눈이 똑바로 떠지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뭐야?.. 경수가 말했어?...이 새끼... 비밀로 하기로 해놓고....”     


“야 인마...그게 중요하냐?....솔직히 말해서...내가...너.. 돈도 더 빌려줄 수 있다.. 그런데.. 빌려 주고 싶지가 않아! 인마....”     


제법 취했다. 둘 다.


“...뭐?....왜? 왜 안 빌려 주고 싶은데?... 못 받을까... 봐?”     


“...하....놔.... 이 새끼..... 너 인마... 내가 처음에 너...5천 만원 빌려 줬을 때... 반드시 받아낼 거라 생각하고 빌려준 것 같냐? 어?....우리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어..... 친구사이에.. 돈 거래는 하는 게 아니라고.... 빌려준 돈이 계속 생각날 것 같으면.... 빌려 주지를 말고.... 빌려 줬다면.... 못 받는 돈이라 생각하고 잊어버리라고....진짜 친구는.... 그런 거라고....”     


은우씨의 말에 지연씨의 남편은 울컥하는 모양인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서 말인데...지훈아.... 진짜 친구니까.... 내가 말을 할게.....”     


“..뭐를?...”     


“....너 말이야...내가 이번에 돈을 더 빌려줄 수 있는데도...왜 안 빌려주는지 아냐?....”     


“....빌려준 돈이..... 생각날까 봐?.....”     


“그래... 인마.... 그런데, 왜 생각이 날 것 같은지는 아냐?......”     


“....너도.... 힘들게... 번 돈이니까...”     


지훈씨가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힘들게 돈 벌지 않는 사람 있냐?.... 너도 마찬가지고, 나도 마찬가지고.... 다른 사람들도.... 다들 힘들게 버는데....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말이... 괜히 있겠냐?...”     


“그럼...왜 생각날 것 같은데?..”     


“...바로 그 정승처럼 써야 하는 것 때문에...”     


“..뭐?...”     


“..지훈이 너.... 친구들 돈 빌려서.... 어디다 썼냐?...”     


“...그야....생활비에...썼지...”     


“..네가 생각하는 그 생활비가...보통 사람들이....생각 하는 생활비가 맞는 거냐?....”     


“...뭐야?....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남편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진짜...친구니까 내가 얘기할게.... 기분 나쁘게 듣지 마라..”     


“...해 봐... 무슨 말인지....”     


“....너...저번에 빌려간 돈으로...해외여행 간 거 아니냐?.....그리고 한 달 살기 하러 간 것도...”    

 

은우씨의 말에 남편이 어이 없다는 듯 피식 냉소했다.     


“..야....너 까지....왜 그래...? 그 놈의 한 달 살기..한 달.. 해외여행.... 그건 못 가는 사람들이 질투가 나서...”     

“아니! 그게 아니지.... 지훈아. 너... 저번에 경수한테도.... 그렇게 말했다며?.. 돈 없고, 가진 것 없는 인간들이 네가... 가족들 한 달 살기 보내주고..... 해외여행가고 하는 거.... 부러워하고, 질투 한다고.... 그게 아니야 지훈아....네가...친구들한테 돈 안 빌리고... 네가 모은 돈으로 가면... 누가 뭐라고 하냐?..... 도대체 그게 뭔데... 친구들한테 돈까지 빌려가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거냐고...”     


“.......”     


지연씨의 남편은 무거운 표정을 짓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넌 정말... 네 와이프가... 외제차 타고 다니고.... 명품 핸드백 들고 다니고... 아이들 한 달 살기 하러 보내고... 해외여행 일 년에 몇 번씩 가면.... 사람들이... 너를 부러워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네 형편을 모르고....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그런데, 우리 친구들은... 네 사정 뻔히 다 알고 있잖아?....네 형편에.... 그런 생활을 한다는 게 제정신이냐?.. 뭐, 오늘만 살고... 내일 죽을 거야?...너 하고 다니는거만 보면... 우리 회사 대표보다 더 잘 나가는.... 무슨...직장인이 아니라....... 기업 대표님처럼 보여 ......”   

  

“후우.....”     


지연씨의 남편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너를 부러워한다고 치자.... 그런 사람들한테 부러움을 사기 위해서....인생을 사는 거냐?....보여주고... 뽐내고... 형편에 맞지도 않는 자랑이나 하면서?....”     


“....아니야..그런거...”     


“..아니긴 이 새끼....야! 내가 경수 말 듣고 나서.... 뭐가 이상하다.... 싶어서.... 너네 집 등본도 떼 봤는데.... 너 사채까지 썼더라?...”

     

“뭐?.... 아니... 야이 새끼야! 남의 집 등본은 왜..... 도대체 왜 이 지랄이야!?”     


“네가 처음에 돈 빌려달라고 할 때..... 뭐라고 했냐?... 나중에 집을 팔아서라도 갚는다며?.... 그럼 당연히 떼봐야 하는 거 아니냐?....난 그냥..... 네 말을 믿었을 뿐이고...... 그래서... 그때 안 떼보고, 조금 늦께 떼본 것 뿐이다...너 지금.... 집 당장 처분해도.... 나한테 이미 빌려간 돈 5천만원도 못갚아.....그런데 돈을 더 빌려가고.... 집을 처분해서라도 갚는다고?.....이 새끼야... 나는 없는 돈이라 생각하고 그냥 주려고도 마음먹었는데, 넌 거짓말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나한테 돈을 빌리려고 했었냐?.... 부끄러운줄이나 알아 인마.....”     


남편 지훈씨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도대체... 그렇게까지 너희 애들 한 달 살기하러 가서..... 얻어 온 건 뭔데?...갑자기 성적이라도 팍 올라갔냐?.....왜 집을 저당잡히고, 사채까지 쓰고, 친구들한테 돈까지 빌려가면서.....그렇게까지 하면서 해외여행을 가야하고....외제차를 몰고 다녀야 하고.... 명품 가방을 사야하는 거냐?....지금 네 형편에, 이런 상황이면...솔직히 네 와이프도 일하러 가야 하는 거 아니야?......너네 와이프는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이런 상황에서 집에서 놀고먹는 거냐?.....”     


“야....이... 씨발....가족은 건드리지 말자.....”     


“...왜? 내가 뭐 틀린 말 했냐?...너네 어머니도 아프시기 전까지는 평생 일하셨잖냐?..... 너네 어머니는 일을 해도 되는 사람이고...... 네 와이프는 일하면 안되는 귀하신 분이냐?..... 시어머니는 일하는 사람이고..... 며느리는 집에서 놀고....먹고...여행가고..그래야 하는 사람이냐고..... 그럼, 우리 와이프는?... 못 나서 일하러 나가냐?.....나는 여태껏.... 와이프한테 명품가방 하나 사준 적도 없어....외제차는 꿈도 못꾸고.....그럼 나는 존나 못난 가장인거냐?... 한 달 살기도 못해 주고...해외여행도 일 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하고.....명품백도 못 사주고.....외제차도 못 사고..... 좋아. 좋아. 내가 존나게 못난 가장이라고 치자.... 그럼 너는? 이렇게 존나게 못난 가장한테.... 돈을 빌리러 온.... 존나 멋진 가장인거냐?”    

 

“아, 씨바!! 닥치라고!!”    

 

 지연씨의 남편이 소리를 지르며 은우씨의 멱살을 잡았다. 술집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쳐다보고, 술집 직원이 와서 말렸다. 은우씨가 지연씨 남편의 손을 떨쳐내고는 직원에게 괜찮다며 돌려보냈다.      


“이제 그만.... 일어나자.”     


은우씨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지연씨의 남편은 일어서지 않았다.     


“안가냐?”     


“먼저.. 가라..”     


 지연씨 남편의 말에 은우씨가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테이블 옆으로 나와 지연씨 남편의 곁을 지나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기 술값은... 네가 내라....앞전에 빌려 간 5천만 원 퉁치는 걸로....”     


“......”     


“5천만원....그까짓 돈... 처음부터... 받을 생각도 없었다.... 난... 오늘 네가.. 솔직히 사실을 말해주길 바랐다.... 오늘 내가 너무 기분이 ㅈ 같은 건....그까짓 돈이 아니라.... 내 친구.... 아니, 내 친구였었던.....늘 바르고....정직하고.....거짓이 없었기에.....항상 당당했던....우리 지훈이를 잃었다는 것.... 그게 너무나 슬프다.....”     

은우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     


“먼저 간다.”     


 은우씨는 술집에서 먼저 나갔다. 지연씨의 남편은 신경질적으로 남은 맥주를 입에 다 털어마시고, 한 잔을  더 주문하려다 한 숨을 쉬고 술집에서 그냥 나왔다. 지연씨의 남편이 술집에서 나오자, 공방 창문에 비치는 모습이 다시 술집 밖으로 바뀌었다.     


- 쏴아아아     


 세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술집 앞에는 택시들이 많이 있었는데, 남편은 그 많은 택시들을 놔두고 비를 맞으며 찰박찰박 걷기 시작했다. 세차게 내리는 비에 남편의 몸은 금세 흠뻑 젖었다.    

  

“끄으흐흐흑.....”     


 남편은 비를 맞고 걸으며 서럽게도 울었다. 그렇게 울고, 또 울면서, 비를 쫄딱 맞고 집까지 걸었다.    

  

- 째깍째깍     


 공방의 창문 위에서 째깍이는 시계 소리에 그곳을 쳐다보니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연씨의 남편은 집에 들어가기 전에 빗물로 세수를 하고, 심호흡을 깊이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집 앞 현관에서 다시 한번 더 깊이 심호흡을 하더니, 조심스레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조심조심 현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공방 창문에 비치는 모습은 남편의 뒤를 쫓아 함께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센서등이 팟 켜졌다. 남편은 조심조심 구두를 벗는다고 벗는데, 술이 취한 데다가, 양말이 비에 젖어 잘 빠지지가 않는지, 몇 번 덜그덕 거리며 소리를 내고서 벗었다. 구두를 벗고 나서 고양이걸음처럼 살금살금 걸어서 거실을 지나가려는데, 안방에서 지연씨가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지금 몇 시야?!”     


“..어? 여보..”     


뭐야? 나잖아? 신기했다. 창문속에서 내가 나타나는 모습이. 이렇게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뭐야? 비도 쫄딱 다 맞고 왔어? 그거 세탁은 누구보고 하라고?! 어?!”     


지연씨가 남편의 모습을 보고 신경질을 냈다.     


“미안..미안... 내가 할게. 내가 세탁소에 맡길께....”     


“어우...술 냄새. 술을 지금 이 시간까지 퍼마시고!!..... 나 예민해서 잘 깨는 거 몰라? 그리고 이렇게 잠에서 깨면 몇 시간이고 잠 못드는거 모르냐고!!”     


“아....알지...미안해..미안...일단 좀 씻을께...” 

    

“지금 샤워하면! 또 민원들어오면 어떡하려고!!”     


 여기 아파트에는 어쩜 그렇게 예민한 사람들만 사는 것인지, 새벽에 조금만 뭘 해도 바로바로 민원이 들어왔다.     


“알았어.... 적당히 씻을께.. 적당히...어서 들어가. 나 거실에서 잘게.”   

  

 2층 공방의 창으로 남편과 자신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는 지연씨는 남편의 눈이 그렇게 퉁퉁 부어 있고, 누가 보더라도 방금 눈물을 흘린 사람이 분명해 보이는 남편을 눈치채지 못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리나지 않게 조심해!”     


 지연씨는 방문을 탁 닫고 들어갔다. 지연씨의 남편은 욕실로 후딱 들어갔다. 젖은 옷을 다 벗고, 차마 샤워기를 틀진 못하고,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대충 씻은 후 비에 젖은 몸은 그냥 수건으로 대충 닦아 내고서, 마른 속옷을 입고 거실 소파에 누웠다. 소파에 웅크리고 누운 남편은 금세 잠이 들었다. 지연씨는 남편의 움츠러든 어깨가 새삼스럽게 느껴져 눈물이 핑 돌았다.                                                                                                              

20. 정부장은 꼰대     


 홍사장은 2층 공방의 창에서 정부장이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회사를 홀라당 다 태울뻔한 그 사건을 마주하고 있었다. 당시엔 너무 화가 났는데, 지금 이렇게 모든 일들이 다 지나고 나서 관망하며 보고 있으니, 젊은 시절의 자신도, 아내도, 정부장도 참 많이 어렸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이 새끼!! 진짜 가만 안 둬!!”     


공방의 창 속. 젊은 시절의 홍사장이 소리를 질렀다.     


“여보. 참아요. 좀.”     


“뭐? 참아? 지금 여기까지도 얼마나 힘들게 이룬건데!! 이걸 하루아침에 다 날려버릴 뻔했는데!! 참으라고?!!”     

홍사장의 아내가 홍사장의 손을 꼭 잡았다.     


어제를 뒤돌아보는건 그만하자. 대신 내일을 발전시켜 나가자. 누구의 말이죠?”      


“.....”     


 길길이 날뛰던 홍사장이 아내의 말 한마디에 조용해졌다. 아내가 한 말은 홍사장이 가장 존경하는 스티브 잡스의 명언이었다.     


“불은 이미 났어요. 그리고 다행스럽게 큰 피해 없이 꺼졌구요. 당신은 늘 스티브잡스는 위대한 CEO라며 추켜세우고, 우리나라의 정주영 회장은 대단하긴 하지만 성격이 더럽다고 싫어하셨잖아요? 그런 성격 더러운 정주영 회장도 공장이 불에 다 타버렸을 땐 직원들을 나무라지 않고 막걸리를 받아와서 직원들을 위로했다고 하잖아요? 당신은... 당신이 그렇게 성격 더럽다고 싫어하는 정주영 회장보다도 더 더러운 성격이 되어도 되겠어요?”     


“...거 참.. 비교도 희한하게 하는 구만.....”     


 홍사장이 조금은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하자, 아내는 홍사장의 귀에다 대고 뭐라고 일렀다. 홍사장은 영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지만, 아내가 다그치며 인상을 쓰자,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불을 낸 정부장. 그러니까 당시엔 정대운 사원이 사무실로 들어오며 울먹였다.     


“...죄송합니다...정말 죄송합니다...제가 그만 깜박 졸아서....너무 죄송합니다...”     


그에게 홍사장이 다가갔다.


“괜찮아. 다친 데 없으면 됐지 뭐.”     


홍사장은 속에서 열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아내의 말을 따라 꾹 참으며 말했다.     


“...”     


“피곤할 텐데, 얼른 집에 가서 쉬어.”     


“아닙니다. 아직 할 일이...”     


“아니야. 그냥 집사람하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자네는 들어가. 시간도 많이 늦었어.”    

 

정대운 사원도 많이 지치고, 피곤했는지 더이상 고집을 피우진 않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 얼른 들어가.”     


“.....그럼...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정대운 사원이 돌아서서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데, 홍사장이 불렀다. 

    

“이봐.”     


“예?”     


정대운 사원이 돌아서자 홍사장이 손에 봉투를 쥐어 줬다.     


“아니, 사장님. 이게 무슨....”     


“얼마 아니야. 늦은 시간까지 일한다고 고생했는데, 집에 들어가면서 먹을 거라도 좀 사서 가. 자네 집사람도 혼자 애 본다고 고생하는데.”      


“예에? 아니, 사장님....”     


 정대운 사원은 공장에 불을 저질러 놓고, 이제 어떻게 얼굴을 들고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 몇 달 치 월급을 못 받거나, 회사에서 잘리지는 않을까 온갖 생각이 다 들었는데, 뜻밖의 대우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 아니 저기 사장님... 제가 어떻게...”   

  

“괜찮아. 자, 자. 얼른 가. 얼른.”     


“아니, 사장님. 그게...”     


“괜찮다니까. 멀리 안 나가. 얼른 가. 잘 가게.”     


홍사장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정대운 사원의 등을 떠밀며 보내고는 사무실 문을 탁 닫았다. 순간 정대운 사원은 어? 혹시.... 지금 회사에서 잘린 건가? 이래놓고, 집에 도착하면 내일 출근하지 말라는 통보가.....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때, 사무실 문이 다시 열리며 홍사장이 말했다.     


“아, 그리고 미안한데.....”     


정대운 사원은 홍사장의 미안한데 라는 말이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려오며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 안돼!’     


“내일 좀 일찍 출근해주게. 창고 정리를 싹 다시 해야 할 것 같으니까 말이야.”    

 

“예? 아..출근..네....넵!! 아, 당연히 일찍 와야죠! 감사합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일찍 오라는데 무슨 감사는..... 그래. 그럼 조심히 가게.”     


 다시 사무실 문이 닫혔다. 2층 공방의 창으로 그 모습을 보는 홍사장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아내가 시켜서 하는 행동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자신이 하는 연기가 완전 발연기였기 때문이었다. 어색한 표정하며, 부자연스러운 행동. 떨떠름한 얼굴로 하는 말은 마치 로봇 같았다. 


앞으론 연기 못하는 배우들 욕 안 해야겠군.    

 

- 째깍째깍     


 창 위의 시계가 갑자기 빠르게 돌아가더니, 정대운 사원의 집으로 장면이 바뀌었다. 새벽. 집으로 정대운 사원이 조심스레 들어가는데,     


“왔어?”     


 정대운 사원의 아내가 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의 아내도 정대운 사원처럼 조심조심 방에서 걸어 나왔다.     

“은희는 자?”     


“응.”     


얼마 전에 태어난 딸 은희가 잠이 들어 있어 혹시나 깰까 봐 아내도 조심조심 거실로 나오는 것이었다. 정대운 사원이 봉투를 들어 보였다.     


“악! 치킨?! 꺄악!!”     


 아내는 숨죽인 환호성을 질렀다. 아내의 환호에 정대운 사원도 흐뭇하게 웃었다. 둘은 아기가 깨지 않도록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주방과 거실을 오가며 거실 한쪽에 상을 차렸다.     


 정대운 사원은 맥주를 아내는 사이다를 마시며 함께 치킨을 먹었다.     


“고마워 여보. 진짜 치킨 먹고 싶었는데. 자기 늦게까지 일하고 어쩌면 오늘 집에 못 들어올 수도 있다고 해서 말 안 했었거든? 근데, 어떻게 알고 이렇게 사왔네?” 

    

“사장님이 사 주셨어.”     


“뭐? 사장님이?”     


 정대운 사원은 공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아내에게 털어놓았다.    

 

“우와..... 사장님.... 정말 좋으신 분이다.”     


아내는 불이 났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가, 그런 상황에서 홍사장이 남편을 배려해준데 대해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말했다.     


“정말....사장님도, 사모님도. 내가 회사를 잘 선택한 것 같아. 여보. 나 진짜 오늘 집으로 오면서 결심했어.”     

“뭐를?”     


“이 회사에 뼈를 묻겠다고.”     


“풋.”     


 비장한 각오로 치킨을 뜯으며 말하는 남편의 모습이 귀여워 보여 아내는 웃었다. 둘은 조용히 속삭이며 새벽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재잘거렸다. 신혼의 부부. 공방의 홍사장은 둘의 모습을 보며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응애! 응애!!”     


갑자기 애기 울음소리가 울렸다.     

     

“엇! 은희 깼다!”     


 아내는 번개처럼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아기를 품에 안아 어르고 달랬다. 그러자, 아기는 언제 울었냐는 듯 엄마의 품에서 금세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정대운 사원이 방으로 걸어와 말했다.     


“우와......자기 그거 알아?”     


“뭘?”     


“아마 엄마들은 저~기 반대쪽에 자기들 애기 놔두고 달리기하면 칼 루이스 보다 빠를거란 거?”  

   

“칫..... 얼른 씻고 오기나 하세요.”     


정대운 사원은 음식을 치우고, 씻고 방으로 들어갔다.      


“자기 피곤할 텐데, 얼른 자.”     


“아니야. 괜찮아. 내가 은희 좀 안을까?”    

 

“괜찮긴 뭐가 괜찮아? 회사에서도 졸다가 불까지 내놓고... 그러니까 새벽에 은희는 내가 볼테니까 그냥 자라고 했잖아.”     


“자기 혼자서 어떻게 봐. 자기도 피곤할 텐데.”     


“하루종일 집에 있는데 뭐 어때? 낮에도 은희 잘 때 같이 자면 되는데. 근데, 자기는 일을 해야 하잖아. 일. 오늘처럼 야근도 해야 되고.”     


“그래도...”     


“뭘 그래도야? 자기 이 회사에 뼈를 묻을 거라며? 사장님이 사람 좋아서 이번엔 넘어가 주셨을지 몰라도, 다음번에 또 그러면 정말 자기 해고당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오늘 푹 자. 뭐, 지금 자도 금방 일어나야 할 것 같긴 하지만. 사장님도 내일 일찍 출근해 달라고 했다며?”     


“응.”     


“그럼 조금이라도 더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서 사장님의 은혜에 보답해야지.”     


“그럼... 그럴 까?”     


“그래. 얼른 자. 지금 당신 눈이 빨개. 나갈게~”     


“방에 있어도 되는데?”     


“옆에서 내가 이러고 있으면 잠이 오겠어? 됐어. 은희랑 거실에 있다가 자기 잠들면 들어올게. 얼른 자. 얼른.”     

정대운 사원의 아내는 아기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왜 몰랐을까? 


공방의 홍사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홍사장도 아기들을 키워봤고, 밤잠을 설쳐도 봤었다. 그런데, 신입사원이고, 아기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정부장의 눈이 당시에 왜 그렇게 아침마다 충혈되어 있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던 일인데...     


창 속의 정대운 사원은 서서히 잠이 들었고, 그를 비추던 공방 2층의 창은 점점 어두워졌다.     


“뭐 인마?! 다시 말해봐!!”     


 반가운 목소리. 이번의 목소리는 앳된 정대운 사원의 목소리가 아닌, 나이가 든 정부장의 목소리였다. 정부장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2층 공방의 다른 창에서 정부장이 부하직원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어째 평소 유순해 보이던 정부장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과장? 그리고 손대리, 임대리 아니야?     


“솔직히 회사에서 뭐 우리들한테 챙겨주는게 있습니까? 사장님도 맨날 화가 잔뜩 난 얼굴로 히스테리만 부리고.”     


“야! 이과장! 거 말 함부로 하지마! 사장님도 오죽하면 그러시겠냐? 사장님만큼 직원들 생각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정부장님은 그게 문제에요. 아니, 정부장님은 무슨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사장님 편을 드세요? 사장님하고 무슨 일가친척이라도 되는 것도 아니고. 정부장님도 우리하고 같은 직원이잖아요? 그런데, 왜 맨날 사장님 편만 드는 겁니까?”     


“내가 무슨 사장님 편만 들어?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는 거지. 그리고 너희도 사장님 입장에서 한번 생각을 해봐라. 이게 내 회사, 내 공장이라면 너희들은 너희들처럼 일하는 직원이 마음에 들겠냐?”     


“아이. 부장님까지 왜 이러세요? 부장님도 우리가 일하는 게 마음에 안드는 거에요?”


 곁에서 열심히 돼지고기 수육을 쌈에 싸서 먹고 있던 임대리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정부장이 소주를 한 잔 비우고 흘러내린 술 방울을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뭐, 너희들이 일하는 게 썩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지.”    

  

“우와~ 정부장님. 팩폭! 팩폭!! 나쁜 사람!! 폭격기!!”     


손대리가 과장된 몸짓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말하자 일행들이 웃었다.     


“그래. 그래. 미안. 근데 그게 일하는 모양이 영 마음에 안 든다. 이런 게 아니라 주인과 직원의 마음가짐이 다르다 이거야.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고. 그러니까 너희들도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해봐. 이 회사가 마치 내 회사다. 내 공장이다. 곧 내 것이 될 거다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사장님이 먼저 다르게 대우해주시기를 바라지 말고, 너희가 먼저 열심히 해 보라는 거야.”     


“...”     


“그런다고 뭐, 내꺼 될 것도 아닌데요. 그리고 정부장님은 진짜 누가 봐도 정부장님 회사인것처럼 열심히 일하시는데도 맨날 사장님한테 깨지잖아요?”     


이과장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야이씨... 깨지긴....말을 해도.... 쩝.. 뭐, 그건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사장님 마음이 영 허전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죠. 그리고 벌써 돌아가신지가 5년도 더 지났는데, 그게 말이 돼요?”     


“아이.. 몰라 이 새끼들아. 그냥 어쨌든 내 회사다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 괜히 딴 생각 하지 말고. 알았어?”     

“와... 씨. 진짜 내가 정부장님 때문에 참고 다닌다.”     


“나도.”     


 정부장은 그 소리가 싫지 않은지 피식 웃었다. 그들은 때론 웃기도 하고, 때론 심각하기도 하면서 술을 마셨다.     


 회사 직원들 술자리의 안주는 수육 보쌈과 더불어 회사와 홍사장에 대한 불만이었고, 정부장은 그럴 때마다 아랫사람들을 때론 다독이고, 때론 혼내면서 애사심을 가지라고 훈계했다.   

  

“나 때는 말이야.. 회사에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어. 내가 눈을 뜨고, 내가 일을 하러 갈 곳이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정부장님은 다 좋은데, 꼭 이런 말 하실 때는 꼰대 같아요.”     


“응. 나 꼰대야. 그러니까 내 말 좀 들어봐. 우리회사가 정 싫다는 사람은 언제든 떠나도 좋아. 하지만 명심해. 다른 어딜 가더라도 마음가짐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곳도 결국엔 지금 회사와 똑같이 출근하기 싫은 곳이 될 거야. 나와 맞지 않는 세상을 바꾸고, 나와 맞지 않는 회사를 바꾸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바꾸는 가장 빠른 방법은.... 바로 내 자신이 바뀌는 거야.”     


“오~ 정부장님 혹시.....”     


“뭐?”     


“오늘 이 말씀 하려고 연습하신 거에요?”     


“그래! 연습 많~~이도 했다! 완벽했냐?!”     


“하하하하하!”     


다들 한바탕 자지러지게 웃고는 술자리를 끝냈다. 정부장이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는데, 이과장이 놀란 눈으로 정부장을 쳐다봤다.     


“또, 또! 부장님. 회사 카드를 쓰세요. 직원들끼리 회식한 건데...”     


“이게 무슨 회식이야? 이과장이 오늘 기분 꿀꿀하다고 해서 내가 한 잔 마시자고 한건데.”     


“회사 때문에 기분이 꿀꿀해졌으니, 회사에서 돈을 내야죠. 왜 부장님 개인 돈을 씁니까? 한 두 번도 아니고. 여기 다 회사 사람들인데, 회사카드 좀 썼다고 신경 쓸 사람도 아무도 없는데...”     


이과장의 말에 정부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과장. 저번에도 말했지만, 회삿돈이라고 함부로 써도 된다. 이런 생각 절대로 하면 안 돼! 내 돈만 돈이고, 회삿돈은 돈 아니야? 내 돈 귀한 줄 알면, 남의 돈 귀한 줄도 알아야지. 그리고, 내 월급. 누가 줘? 회사가 주지. 회사가 없으면, 우리도 없는 거야!”     


정부장이 정색을 하고 말하자 이과장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 부장님... 또 사람 부끄럽게 만드시네....이제 부장님하고 술 안 마셔야겠다.”     


“거 참... 사람도. 뭐 그런 일로 삐지고 그래? 언제든 회사 일이든, 개인 일이든 술 한잔 생각나면 말해. 내가 사줄 테니까. 손 대리하고 임 대리도. 알았지?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넵!”     


 부끄러웠다. 공방의 창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홍사장의 얼굴은 부끄러움에 빨갛게 변했다. 내가 인식하지도 못한 순간순간 얼마나 많이 직원들에게 짜증을 내고 히스테리를 부렸던 걸까? 그리고 정부장은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직원들에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들어주고, 달래줬을까? 정부장.. 이눔시끼.... 지 앞가림이나 잘 하지....지도 넉넉지 않은 형편이면서....       

   

“뭐라고!! 고과장!!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이번에도 또 정부장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번엔 공방의 뒤쪽에 있는 창이었다. 홍사장은 얼른 그곳으로 다가가 창을 들여다 봤다. 회사 공장 바깥의 한쪽 외진 곳에 정부장과 고과장 둘이 서 있었는데, 고과장의 표정은 침울했고, 정부장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게.... 이번에.. 제가 단가 계산을 잘못 해서...죄송합니다. 부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야이 씨. 야! 고과장. 너 같은 엘리트가 어쩌다 이런 실수를 했냐? 아니, 그리고 나한테 결재를 받았어야지. 네가 왜 먼저 결정을 해서 이 사달을 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부장님 출장 중이실 때 우성에서 3배나 많은 물량을 주문 넣어서 얼른 그거 잡느라고......”     


“야... 이거 어쩌냐... 얼른 사장님께 말씀을 드려야...”     


“잠깐만요! 부장님. 정말 이런 말씀 드리기 염치없다는 거 알지만, 제가 실수한 거라는 말씀은 사장님껜 하지 말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뭐?”     


“제가... 혈압이 높아서.... 약을 먹고 있거든요. 만약 사장님이 아시면 앞으로 우성에 1차, 2차, 3차..... 납품이 들어갈 때마다 저한테 길길이 날뛰실 텐데.... 그럼 저 진짜 쓰러질지도 모르거든요... 아직 아이들도 어린데....”     


고과장이 울먹이며 말했다.       


 홍사장은 둘이서 나누는 대화를 듣고 지난번 정부장이 단가 계산을 잘못해서 우성과의 거래에서 큰 손실이 나게 되었다고 말한 그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시 정부장은 본인이 잘못을 한 것처럼 이야기를 했고, 결국엔 그것이 정부장을 사표까지 쓰게 만든 일이 되었었는데, 지금 보니 고과장이 실수를 한 것이었다.   

   

 고과장. 명문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회사가 조금씩 커 나가자 홍사장은 인재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제법 높은 연봉을 걸고 신입사원을 모집하자 명문대학교 졸업생들도 입사 지원을 했다.  

   

 고과장은 그 지원자들 속에서도 선택된 인재였다. 홍사장은 뿌듯했다. 명문대학교 졸업생들도 자신의 회사에 입사하고 싶다고 지원을 하고, 그들 중 몇 명을 선택해 회사의 직원으로 고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여보. 그런데, 명문대를 나왔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거에요?”     


홍사장의 아내가 물었었다.     


“그럼. 중요하지. 우리가 뭐, 대학교 어디 나왔는지, 토익점수는 얼만지 이런 거 말고 다른 걸로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도 없잖아?”     


“뭐... 그렇기도 하네요.... 그런데 여보. 만약에 말이에요... 만약에 당신한테 능력있는 직원하고, 인간성이 좋은 직원하고 둘 중에 한 명을 고르라면 어느 쪽이에요?”     


“그걸 말이라고 물어? 당연히 능력있는 직원이지. 인간성이 아무리 좋으면 뭘 해? 능력이 없으면 아무 쓸모도 없는 놈이지. 여긴 회사야. 회사에서는 무조건 능력이지.”     


“그래요? 근데, 저는 잘 모르겠네요. 능력 있고, 명문대를 나온 직원들보다 실수를 자주 하고, 가끔 사고를 쳐도 정대운씨 같은 정 많고, 인간미 느껴지는 직원이 전 훨씬 좋아요.”    

 

“아이고, 대운이 그놈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프니까.”     


 홍사장의 말에 아내는 웃었었다. 당시엔 아내가 세상 물정을 참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조금 아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리트 고과장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질 생각은 하지 않고, 사람 좋은 정부장을 지금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용하는데 성공했다. 여태껏 홍사장은 정부장이 잘못한 줄 알고 있었으니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고, 자세히 들여다 봤다면 누구의 실수이고, 잘못인지 알 수 있었을 텐데. 으레 정부장의 잘못이겠거니 짐작을 했었다. 저 멍청한 놈! 그냥 나한테 솔직히 다 말하면 되었을 것을!!     


“휴우....그래. 어쨌든 내 선에서 알아서 말씀드릴 테니까 고과장은 그냥 일이나 열심히 해. 앞으론 이런 실수 하지 말고.”     


“예. 부장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과장이 허리를 90도로 숙여 울먹이면서 정부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정부장은 고과장의 어깨를 다독였다.     


“괜찮아. 괜찮아. 직장생활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고과장도 잘해보려다가 그렇게 된 거잖아. 암튼 스트레스 받지 말고. 고과장이 혈압이 있는 줄은 몰랐네. 뭐니뭐니해도 건강이 제일 중요해. 고과장 말처럼 아이들도 아직 어린데, 건강하게 오래오래 일해야지!”     


“예...부장님... 감사합니다.”     


“그래. 담배 한 대 피우고, 바람 좀 쐬고 천천히 들어와. 나 먼저 들어갈 테니...아, 고과장 담배도 이제 줄여야겠다. 혈압이 있으니까.”    

 

“...예...부장님.. 줄이겠습니다.”     


“그래. 천천히 들어와. 먼저 들어간다.”     


 정부장은 고과장에게 미소지으며 돌아섰지만, 사무실로 돌아가는 그의 얼굴은 홍사장에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근심 가득한 표정이었다.    

 

 정부장이 들어가자마자 조금 전까지 죄인 같은 얼굴을 하고서 울먹이던 고과장의 표정이 싹 돌변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지가 내 건강 걱정할 때야? 사장 새끼한테 맨날 깨지는 병신 새끼가.”    

 

고과장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당겨, 한 모금 길게 들이마셨다가 후 내뱉었다.     


“아~ 씨바. 이번에 잘 됐으면, 저 새끼 제끼고, 사장 새끼한테 바로 말하려고 했는데....”     


 홍사장은 평소 회사에서 엘리트라고 아끼던 고과장이 자신을 지칭하는 사장 새끼라는 호칭에 뒷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충격적이었고, 고과장이 그동안 본인의 성과를 어떻게 챙겨왔을지 짐작이 가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이번 일도 만약 잘만 되었다면 정부장을 거치지 않고, 본인의 성과로 만들었을 것이다. 


와... 저 새끼...저노무 새끼가....     


- 쿠당탕!     


“허업!!”     


 요란한 소리에 홍사장이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공방의 바닥에 만들다 만 나무도마가 떨어져 있었다. 홍사장이 탁자에 엎드려 잠을 자다가 밀어 떨어뜨린 것이었다. 홍사장은 얼른 바닥에 떨어진 나무도마를 주워 탁자에 올려놓았다.      


홍사장은 고개를 돌려 공방의 창문을 눈으로 훑었다. 어디에도 시계는 보이지 않았고, 창마다 보이는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꿈이었나.....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다. 창밖으로 서서히 붉은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뭐야?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잠이 들었었다고? 처음이었다. 평소 5분에서 10분 정도 낮잠을 자던 홍사장이 몇 시간씩이나 낮잠을 잔 적은. 홍사장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후다닥 공방을 나섰다. 지금 당장 만나야 할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21. 회복     


 “축하드립니다! 아드님이 깨어났어요!!”     


 주경씨는 의사의 말에 심장이 터질 듯 기뻤다. 아직은 안정을 취해야 하고, 언제 다급한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 중환자실에 있다가 이번 주말 전에는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주경씨는 중환자실 앞 의자에 앉아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주경씨는 울면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고, 남편도 울먹이는 목소리로 다행이다, 다행이다를 연발했다.     


 중환자실의 면회시간이 되었는데, 주경씨는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동안 아들 승원이가 자기 때문에 힘겨워했을 시간들을 떠올리자 아들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젯밤 남편에게 승원이가 짧은 일기를 쓰고, 구겨버린 종이들을 보여줬다. 그것을 본 남편도 눈물을 흘렸다.      


“조금 더 많은 추억을 만들어 놓을걸.”     


“뭐야? 마치 승원이가 죽기라도 할 것처럼!”     


남편의 말에 주경씨가 버럭 화를 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당연히 승원이는 깨어나야지... 분명 깨어날 거야...이번에 승원이가 깨면 우리 여행 가자. 그리고 조금 더 많은 추억 만들어보자.”     


 남편이 말했고, 주경씨도 그러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또 울었다. 희망차게 말은 했지만, 마음 한구석엔 언제 승원이가 죽었다고 병원에서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승원이가 정신을 차리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 함께 여행을 가는 꿈같은 일이 일어날 수만 있다면 세상 어떤 것도 다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젯밤에만 해도 그것은 말 그대로 꿈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승원이가 의식을 회복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어떤 것보다 더 간절한 꿈이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렇게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될 줄이야.   

  

 몰랐다. 정말. 살아있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고, 건강한 것도 당연한 것이었고, 엄마 말 잘 듣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만들려 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었다. 공부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것, 건강한 것, 엄마 말을 잘 듣는 것도 당연한 것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동안 주경씨는 몰랐었다.     


 중환자실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면회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주경씨는 가까스로 용기를 내 아들을 보러 들어갔다.     


“엄마!”     


산소호흡기를 뗀 아들은 주경씨를 보자 환하게 웃으며 엄마를 불렀다.     


엄.마.     


 주경씨는 아들의 입에서 엄마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그토록 흘리고도 아직도 어디에 눈물이 그렇게 남아있었던 것인지 샘이 솟듯 펑펑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엄마 같은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 같은 미안함. 엄마라는 언어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여겨버렸던 것 같은 죄책감.    

 

“승원아!!”     


주경씨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꼭 잡았다.

     

“내 아들.... 내 아들....얼마나 힘들었니....”     


“난 괜찮아 엄마.”     


 환하게 웃는 아들의 얼굴. 순간 주경씨는 자신의 앞에선 미소를 짓다가, 방문을 닫고 나오자 우울한 표정으로 변하던 2층 공방에서 봤던 아들의 모습이 떠올라 더 눈물이 났다.     


“미안해 아들.... 너무 미안해....”     


“엄마가 왜 미안해?”     


“으응?....아니...그냥. 다. 전부 다. 전부 다 미안해..... 승원이가 다치는 걸 지켜주지 못한 것도....”     


그러자 아들 승원이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엄마도 참.... 그걸 엄마가 어떻게 지켜줘? 무슨 보디가드처럼 늘 내 옆에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있었다고 해도...엄마가 블랙위도우도 아니고..”      


“응?...블랙...위도우...?”     


주경씨는 어리둥절했다.     


“아.... 엄마.. 어벤져스 안 봤어?”     


“들어는 봤는데, 아직 보진 못했어.”     


“음... 그러니까 엄마 때 그....원더우먼 같은 거? 그런 아줌마랑 비슷한 거야. 엄마도 참... 아빠랑 영화도 좀 보고 그래. 맨날 일만 하지 말고.”     


 주경씨는 승원이가 사고가 나기 전보다 조금 더 밝아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분 탓인가? 어쨌든 어두워진 것 보다는 밝아졌다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 알았어. 아빠랑 그리고 너랑 이젠 같이 자주 영화 보러 가자.”     


승원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경씨를 쳐다봤다.     


“면회시간 다 되었습니다.”     


 간호사가 주경씨에게 말했다. 중환자실이라 어쩔 수 없었다. 주경씨는 승원이 곁에 더 머물고 싶었지만, 중환자실에서 나왔다.     


 며칠 지나지 않아 아들은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었다. 주경씨는 아들이 사고가 난 이후로 캄캄하게 어두워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던 세상이 지금은 너무도 찬란하게 빛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보였다.     

 아들이 일반 병실에 있었기에 이제 면회시간과 상관없이 주경씨는 하루 종일 아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아들과 하루 온종일 함께 있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젖을 떼고 난 이후로는. 승원이가 젖을 떼자마자 어린이집을 보냈다. 그리고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아들이 자라는 동안 주경씨는 악착같이 일을 했다. 이제 막 젖을 뗀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낸다고 할 때 남편이 물었다.     


“저렇게 어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다고? 말이 돼?”     


주경씨는 남편을 쏘아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당신 하루종일 정비소에서 일하고 얼마 벌어오는데?”     


“어?...그야 뭐... 생활비 정도는....”     


“당신 지금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그런 말이 나와? 한여름에 에어컨도 없이 엔진 열기가 훅훅 풍기는 자동차 수리를 하면서도?”     


“옆에 대형 선풍기 틀어놓고 일해.”     


“한겨울에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드러누워서 자동차 밑에 기어 들어가면서도?”     


“한쪽에 히터 틀어놓고 하는데 뭐.”     


“지금 나랑 말장난 하냐?!”     


주경씨가 버럭 화를 냈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일을 하는 거랑 승원이 어린이집을 보내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고?”     


“우리가 지금 악착같이 벌어서 승원이 뒷바라지 할 준비를 해야지. 안 그랬다간 자기나 나처럼 살게 될지도 모른다고!”     


“뭐? 우리가 사는 게 어때서?”     


“그럼 당신은 승원이도 자기처럼 기름 냄새 풀풀 풍기면서, 한여름 한겨울 야외에서 온갖 고생 다 해가면서, 그렇게 밥 벌어 먹고 살았으면 좋겠어?”     


“...”     


남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스스로가 정비소에서 일을 한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한 적은 없었지만, 아들이 이런 일을 하는 것만은 말리고 싶었다. 아내의 말처럼 얼마나 고생스러운 일인지 잘 알기에.     


“나 식당 알바 구했어.”     


“뭐? 아니 왜!”     


“방금 내가 말했잖아. 악착같이 벌어서 승원이 뒷바라지를 해야 된다고. 이제 시작이야. 승원이가 다 클 때까지 당신이랑 나랑은 뒤도 돌아보지 말고, 죽어라 열심히 일하자. 승원이를 위해서.”     


뭔가 대단한 결심을 하고 파이팅이 넘치는 주경씨와는 다르게, 남편의 표정은 썩 좋지가 않았다.     


“내가 넉넉하게 벌어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승원이 어린이집 보내는 것보다는 당신이랑 같이 집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안일한 소리 하지도 마. 다른 사람들은 벌써 어린이집에서 영어도 가르친다는데, 어린이집에 맡기지도 말라고? 그럼 우리 승원이만 뒤처지는 거야! 알아?!”     


“뭐? 그게 말이 돼? 아니, 한글도 아직 못 익힌 애한테 무슨 영어야?”     


“원어민처럼 영어를 하려면 한글 익히면서 영어도 같이 익혀야 한데. 암튼, 우리 승원이는 벌써 뒤처지고 있는 거야. 다른 애들은 영어하고 한글을 같이 배우고 있는데 우린 그럴 형편은 안 되잖아.”     


“참...나. 그게 말이라고...”     


“암튼. 당신도 승원이 생각해서 죽기 살기로 열심히 일 해. 우리가 승원이를 위해서 해줘야 할 것들 다 해줘야 하니까. 그래야 나중에 승원이가 크더라도 우리도 후회가 없지. 당신 나중에 승원이 자라면, 어렸을 때 해주지 못한 것들 때문에 후회하고 싶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해주고 싶다면 해주는 게 맞는데, 우리가 벌써 승원이가 뭘 배울지, 뭘 할지 정해줘야 하는 건 이르지 않아?”     


“승원이 어린 애야. 그런 애가 지금 뭘 배우고 싶은지 어떻게 알겠어? 우리가 정해주고, 이끌어 줘야지.”    

 

“그래도 이건 좀....”     


“시끄럽고! 무.조.건. 열심히 일이나 해.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해! 알겠어?”     


“이야...일단 알았어. 알겠는데.... 역시 엄마는 다르네..... 자기 승원이가 생기기 전에는 몰랐는데, 승원이 일에 관해서는 정~~말 무서운 여자네.”     


“그럼. 엄마가 아무나 되는 줄 알아? 난 승원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구!”     


“대단하다 진짜....”    

 

“그나저나 당신도 복 받은 거야.”     


“뭐가?”     


“난 그래도 승원이 어린이집에 맡겨 놓고 일하러 가잖아.”    

 

“그게 뭐?”     


“그게 뭐라니? 난 일을 하기 위해서 승원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거란 말이지. 다른 엄마들처럼 삼삼오오 모여서 카페 가서 시간이나 죽이고, 낮부터 맥주 마시면서 시시덕거리려고 어린이 집을 보내는 게 아니라.” 

    

“그런 엄마들이 정신나간 엄마들이지.”     


“대한민국에 정신나간 엄마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시나 봐?”


“모르지. 그런데, 자기 말처럼 정말 그런 엄마들이 많다면... 슬픈 일이네. 애들이 뭔 죄냐?”     


“그러니까. 그래서 당신이 복 받은 거란 말이야. 그런 여자들은 일도 안 하면서, 자기들이 애 보기 싫어서 어린이집에 맡겨 놓고, 실컷 낮에 놀러 다니다가, 어린이집에서 조금이라도 애가 다치거나 하면 난리가 장난 아니라니까? 그럴거면 자기들이 돌보면 될 텐데, 그러긴 싫어서 맡기는 거잖아. 자기 애인데도.”    

 

“그래. 아주 감사하다. 감사해. 어쨌든 식당일 힘들다던데..... 당신 진짜 괜찮겠어?”     


“그럼. 승원이를 위해서라면.”   

  

“알았어. 근데, 혹시라도 힘들면 언제든 그만둬. 괜히 힘들다 말하기 곤란해서 억지로 일하지 말고. 알았지?”     

“걱정마. 조금이라도 힘들면 당장 그만둘 테니까.”   

   

 그렇게 주경씨는 난생 처음 식당에서 일을 시작했다. 힘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주방일과 홀서빙 하는 일이 구분되어 있지 않은 식당에서 홀과 주방을 오가며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일을 한다는 건 짐작한 것보다 곱절은 더 힘든 일이었다.


 손님이 밀려들어 급하게 자리를 치울 때는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가 얼굴에 튀기도 했고, 일회용 식탁보를 걷어 휴지통에 꾹꾹 눌러 담을 때는 쓰고 버린 이쑤시개에 손가락이 찔려 피가 흐르기도 했다. 반말을 서슴없이 던지며 하인을 부리듯 부려먹는 손님도 있었고, 오래 일했다고 텃새를 부리는 동료도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만둘까 고민을 했던 주경씨였지만, 끝까지 버텨냈다. 아들 승원이를 생각하며. 


 남편과 자신이 그동안 이루어 놓은 것도 없었고, 가난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넉넉한 형편은 또 아니었기에, 남에게 뒤처지지 않게 아들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벌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정말 악착같이 버텨냈다.     


그렇게 승원이를 위해 시작한 일은, 이번에 승원이의 사고가 나면서 그만두게 되었다.  

    

일반병실로 옮기고 나서 아들 곁에 계속 머물러 있으니, 아들이 물었다.     


“엄마. 오늘은 일 안 가?”     


“엄마 일 그만뒀어.”     


“정말?”     


“응.”     


“정말 잘 됐다.”     


아들이 활짝 웃었다.     


“응? 뭐가 잘 돼?”     


“엄마 일 그만둔 거. 이제 엄마랑 더 오래 있을 수 있단 말이잖아. 헤헤.”     


“엄마랑 있어서 좋아?”     


“당연하지. 히히.”     


주경씨는 해맑은 아들의 표정을 보며 마음이 먹먹해졌다. 승원이 어린이집을 보낸 그때부터 여태껏 일을 쉬지 않았으니 얼마나 엄마의 사랑에 목이 말랐을까.... 아들을 위한 일이라고 해놓고 아들을 뒷전으로 했던 것은 아닐까... 


자식을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 떠는 엄마들과, 자신이 다른 건 뭘까.... 그녀들은 놀고, 나는 일한다는 거? 자식이 뒷전이었던 건 똑같았던 것 아닐까? 어린이 집에 맡겨 놓으면 자식의 교육이 절로 된다고 생각하는 그녀들과, 과외를 시켜 놓으면 공부는 알아서 잘 하겠지라고 생각하는 자신이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승원이가 종이에 끄적거렸던 것처럼 그것은 결국 부모의 만족감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과외를 시켜주지 않았느냐 하는 만족. 나중에 해줄건 다 해줬다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 같은.     


“근데, 우리 승원이. 사고가 났는데도 씩씩하고 밝아 보여서 좋네?”      


“어? 그래 보여?”     


“응. 이전보다 훨씬 더 밝아 보이는데?”       


정말 그랬다. 예전에도 잘 웃는 얼굴이긴 했는데, 지금처럼 밝은 느낌은 아니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혼자 고민이 많던 아들이라는 것을 이젠 주경씨도 알 수 있었다.      


“엄마랑 같이 있어서 그런거 아닐까?”     


아들의 말에 주경씨가 피식 웃었다.      


“정말 그래서 그런 거야?”     


“응. 아, 그리고..... 꿈을 꿨어. 정말 기분이 좋은 꿈.”     


“그게 뭔데?”     


“음..... 엄마한텐 안 좋을 수도 있는데.....”     


“그게 뭔데? 말해봐.”     


“엄마가 이제 일 그만둬서 돈이 없다고.... 그래서 과외 못할 것 같다고......”     


“뭐? 그래서... 그게 기분이 좋다고?”     


“응. 꿈이었지만.... 좋았어. 그리고 꿈속에선 엄마 아빠랑 다 같이 거실에 함께 있었거든... 평소엔 거의 나 혼자 방에 있었는데.... 그래서 기분이 좋았어.”     


주경씨는 아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마음이 짠해졌다.     


“아, 그리고 좀 신기한 것도 있었는데....”     


“뭐가?”     


“그게.... 내가 길을 걷는데, 엄마가 하늘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어.”   

  

“하늘?”     


“응. 근데, 그게 하늘에 엄마가 그냥 막 떠 있고 그런 건 아니고, 하늘에 어떤 창틀 같은 게 있었는데, 그 속에서 날 보고 있었어.”     


“창틀?”     


“응. 엄마가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또 기분이 좋았어. 신기해. 이번에 내가 정신을 잃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 시간 동안 꾼 꿈들이 다 기분 좋은 꿈들이야.”     


‘창틀.... 설마?’     


 승원이는 재잘재잘 즐겁게 말했는데, 주경씨는 문득 대구탕가게 2층 공방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름부터가 이상했다. 시간을 달리는 공방. 그리고 그곳에서 겪은 일들. 만약 집으로 왔을 때 승원이가 쓰고 버린 종이에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다면, 그냥 이상한 꿈을 꿨던 것이구나 하고 치부해버리고 말았을 텐데, 공방의 창문에서 봤던 그 일이 집으로 돌아와서 보니 분명 일어난 일이었었다. 만약 이게 우연일 수도 있기는......개뿔! 이건 우연일 수가 없는 일이 분명했다!!     


“엄마?”     


“으...응?”     


 승원이가 멍하니 생각에 잠긴 주경씨를 몇 번 부르고 나서야 주경씨는 공방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주경씨는 조만간 공방에 다시 한번 들러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2. 내 돈!     


 철웅씨와 정섭씨는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발인을 하루 앞둔 장례식장의 마지막 밤. 정섭씨가 어릴 때만 해도 장례식장에선 화투도 치고, 왁자지껄 술도 마시고 밤새도록 떠들다가 아침 발인을 나가곤 했었다. 그런데 이젠 사람들은 대부분 집으로 돌아가 아침 발인시간에 맞춰서 장례식장으로 왔다. 그래서 지금 장례식장에는 장인어른의 아주 가까운 친척 몇 분만 저쪽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고, 술과 음식을 먹는 사람은 정섭씨와 철웅씨밖에 없었다. 이틀 동안 손님을 맞이하며 술을 거의 마시지 않으며 늠름한 모습을 보여줬던 정섭씨는 3일 상이 거의 끝나가는 장례식장에서 군대 동기와 편안한 마음으로 앉았다.     


“어떻게 알고 왔어?”     


“너 태진이랑 연락하잖아. 태진이한테 소식 들었지.”     


태진이는 같은 부대의 후임이었었다. 그런데 정작 태진이는 오지 않고, 철웅이가 왔다.     


“너 태진이랑은 연락하고 있었어?”     


“가끔...”     


“와~~~ 태진이 이 새끼! 니 이야기 꺼낼 때 나한테는 전혀 모르는 척 하더니!!”     


“가끔 연락만 했지 만난 적은 없으니까.”     


“근데, 도대체 나한테는 왜 연락 안 했어?”     


“아,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물어 봐? 많이 바빴다니까!!”     


“야.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너랑 나랑. 우리 인연이 어디 보통인연이냐?? 어??”     


“그래.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마셔. 마셔.”     


철웅씨가 얼른 소주잔을 들어 정섭씨 잔에 부딪치려는데, 정섭씨가 잔을 싹 피했다.     


“장례식장에선 잔 부딪치는 거 아니야. 이 무식한 새끼야.”     


정섭씨가 말하고 나서 키킥 거리며 웃었다. 덩달아 철웅씨도 웃었다. 둘은 함께 웃으며 술을 입안으로 털어 넣고 꿀꺽 삼켰다.     


 군대를 전역했던 날 함께 국밥을 먹은 이후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나누고 싶은 이야기나 너무나 많았다.


한참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장례식장의 한쪽 불이 꺼졌다. 불이 꺼진 곳 바닥에는 잠을 자기 위해 몇 명의 사람들이 자리에 누워있었다.     


정섭씨가 아쉬운 표정으로 철웅씨에게 말했다.     


“좀 일찍 오지 인마!”     


철웅씨도 불이 꺼진 곳과 빈소를 번갈아 쳐다봤다. 사람들이 한쪽에서 잠을 자려는데, 둘이서만 술을 마시고 떠들기가 머쓱해졌다.      


“진짜 우리 어릴 때랑 장례식장 분위기가 너무 달라졌다. 그치?”     


“그러게.”     


 정섭씨는 아주 오랜만에 만난 동기와 이대로 그만 마시자니 무척 아쉬웠고, 여기서 계속 마시자니 사람들의 눈치가 보였다.     


새벽 1시.      


정섭씨는 고민하다가 빈소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다가갔다.     


“장모님은?”     


“주무셔.”   

  

“처제도?”   

  

“응. 왜?”     


“음...저기....”     


정섭씨가 망설였다.     


“왜? 말을 해.”     


“아니, 당신도 알다시피 철웅이 내가 진짜 얘기 많이 했잖아.”     


“그랬지.”     


“저놈 내가 군대 전역하고 처음 만나는 거거든. 근데.... 여기 다들 주무시고 하니까 철웅이도 불편해하는 것 같고 해서...”     


“그래서?”     


“이제 올 사람도 없잖아? 잠시만 요 앞에 나갔다 오면 안 될까?”     


“뭐? 미쳤어? 당신 지금 상주야!”     


“잠시만 있다가 올게. 어차피 지금 아무도 올 사람도 없는데. 그리고 뭐, 이제 그럴 일도 없을 것 같지만, 누가 오면 나한테 전화하면 바로 올게. 진짜 바로 앞에 있을 거야.”     


“하아....”     


아내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모습을 공방 2층의 창에서 바라보는 정섭씨는 가슴을 팡팡 쳤다. 내가 미친놈이지!! 내가!! 그냥 술은 그만 처마시고 잠이나 잤어야지!!     


 아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당시의 정섭씨는 본인이 장례식장에서 이틀 동안 상주로서 든든한 모습을 보여줬기에 아내가 그렇게 침묵으로 허락해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빨리올게.”     


 아내는 정섭씨를 원망스런 눈빛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이미 정섭씨는 상주 완장을 떼며 돌아서고 있었다.    

 

 정섭씨는 철웅씨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철웅씨는 깜짝 놀라며 정섭씨를 만류했으나, 제법 취기가 오른 정섭씨는 철웅씨를 끌고가다시피 데리고 나갔다.     


 공방에서 그 모습을 보는 정섭씨는 기분이 이상했다. 오래전 기억이었지만, 분명 자신이 철웅이에게 끌려갔던 것 같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철웅이가 밖에서 술을 마시자고 하도 졸라서 하는 수 없이 장례식장에서 나갔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자기가 철웅이를 끌고 나가고 있었다. 


그래. 이건 사실이 아니야.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거겠지? 꿈이니까 이런 걸 거야. 분명 철웅이가 날 끌고 밖으로 나갔어!     


 장례식장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근처에서 마실 만한 술집이 없어 한참 동안 걸어가서 마침내 한 소주방을 발견했다.     


“야! 너 진짜 괜찮냐?! 상주가 이래도 되는 거냐?!”     


“지금 이 새벽에 올 사람이 어디 있다고? 괜찮아. 괜찮아. 들어가자!”    

 

 정섭씨가 먼저 소주방으로 들어섰고 철웅씨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따라 들어갔다. 둘은 자리를 잡고 술과 안주를 주문해놓고, 장례식장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고맙다. 그래도 동기가 좋긴 좋네. 군대 다른 선, 후임들은 처가쪽 상이라고 오지도 않는데, 넌 밤늦게라도 와줘서 고맙다.”     


“당연히 와야지 인마.... 경사는 못챙겼지만... 조사는 챙겨야지.. 정말 미안하다 너 결혼식에 꼭 가려고 했었는데....”     


철웅씨도 술이 제법 올랐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나도 너 결혼식 때 안가면 돼!”     


“뭐?”     


둘은 킥킥 거리며 웃었다.      


“자, 짠! 여긴 장례식장 아니니까 괜찮지?”     


철웅씨가 정섭씨의 잔에 술잔을 부딪쳤다. 둘은 씩 웃으며 또 한 잔씩 마셨다.     


“사실... 네 결혼식 때 내가 갈 수가 없었다.”     


술을 입에 털어 넣고 철웅씨가 한숨을 토해내듯 뱉은 말.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     


“......형편이 너무 좋지 않았다.”     


“야이씨.... 그냥 몸이라도 오면 되는 거지... 내가 뭐, 부조금 했는지, 안 했는지, 했으면 얼마나 했는지 확인하고... 막 섭섭해하고 그럴 줄 알았냐?”     


“야..말은 쉽지...너였으면... 내 결혼식에 빈 손으로 올 수 있었겠냐?”     


“...”     


 정섭씨는 대답할 수 없었다. 만약 자기가 봉투하나 챙겨갈 수 없는 입장이었다면.... 아마 자신도 비슷한 결정을 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다 지난 일이잖아! 그냥 잊어 인마! 그리고 오늘 이렇게 장인어른 장례식장에도 와줬잖아. 자! 마셔!”     


둘은 또 술잔을 시원~하게 비웠다.     


철웅씨가 술잔을 탁자에 탁 내려놓음과 동시에 말했다.     


“..그래서 온 거야.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떳떳했다면... 너네 아버지도 아니고, 장인 장례식인데 꼭 가야하나라고 잠시 고민이라도 했을 텐데.. 너한테 진 빚이 있어서 소식 듣자마자 꼭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다고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너한테 진 마음빚을 덜려고. 결혼식에도 못가고... 미안해서 연락도 피하고....”     


“아이 새끼. 술맛 떨어지게! 난 생각도 안 한다니까! 빚은 원래부터 없었던 거고! 있었더라도 이제 다 없어진 거야! 알았어? 그러니까 이제 다 잊어라. 그리고 너 앞으로 연락 끊어지면 죽는다. 그게 더 미안한 거야 인마! 난 너한테 하도 연락이 안 되길래 내가 뭘 잘못했나? 도대체 나한테 마음 상할 일이 뭐가 있었지? 하면서 온갖 생각을 다 했는데... 뭐? 미안해서 연락을 못했어? 지랄 말고, 이제 연락은 꼭 하고 살자! 알겠냐?”     

철웅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래.”     


“뭐, 그래서 이제 형편은 좀 괜찮아졌어?”     


“크게 나아진 건 없지만, 그때처럼 부조금이 없어서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부조금. 부조금의 정의는 얼마라고 해야 하는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기에 참 애매했다. 5만 원권이 발행되고 나서부터는 더욱더. 한 장을 넣자니 부족한 것 같고, 두 장을 넣자니 부담스럽고, 이렇게까지 할 사이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경우까지.     


“그나저나 너는... 괜찮냐?”     


“뭐가?”     


“....일부러 알려고 한 건 아니고, 태진이한테 네 소식 들었다고 했잖아.....”     


철웅씨가 말하길 망설였다.    

 

“그래. 소식 들었는데 뭐? 말을 해!”     


“....그게....너 공사장에서 일한다며. 여관방에서 생활하고....”     


“뭐? 아....그거? 크크큭....크하하핫....”


 정섭씨는 웃음이 나왔다. 분명 얼마 전, 아니, 불과 오늘 장모의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만약 정섭씨에게 철웅씨처럼 이렇게 물었다면 표정이 어두워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젠 아니다. 정섭씨의 머릿속에는 아까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10억이 돌아다니며 그를 황홀하게 만들고 있었다.     


“뭐야? 왜 웃어? 힘들어서 그냥 막 실성하기로 한 거냐?”     


“지랄... 이 새끼...철웅아. 진짜 인생은.... 모르는 거다. 그치?”     


“뭐야?.... 웬 뜬금없이 인생 철학이냐?...”     


“흐흣.....이야....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섭씨의 입이 근질근질했다.     


“...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말 안하는 사람 한 명도 보질 못했다. 그냥 말해..”     


“...그런가?..헤헤..”     


정섭씨는 철웅씨에게 장인의 보험금 이야기를 했다. 철웅씨는 깜짝 놀랐다.     


“진짜?”     


“그래. 그러니까 나도 이제 여관방 생활은 끝이다. 이참에... 그냥저냥 괜찮은 직장도 좀 알아볼까 싶기도 하고.”     


 정섭씨 본인은 지금의 일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지만, 평소 아내는 명현이가 자라면 아빠의 직장이 부끄러울 수도 있다고 했다. 그말을 듣고 처음엔 아내에게 자신의 직업이 무시당하는 것 같아 불같이 화를 냈지만, 명현이가 점점 크는 걸 보면서 정섭씨의 마음도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그래? 장인어른 장례식이라.. 이런 말하기가 참 그렇지만.....정말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철웅씨는 진심으로 다행스러워했다. 철웅씨가 사는 곳은 구도심 지역이었다. 그래서 그곳에는 오래된 여관이나 모텔이 많았다. 가끔 지나가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차량이 여관이나 모텔에 아이들 등, 하교 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곳에서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자신의 군대 동기도 그렇게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었다. 부조금이 없어 동기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스스로의 처지도 불쌍했지만, 본인 하나만 건사하면 되는 자신과 다르게 딸린 식구들과 함께 여관을 전전하며 지낸다는 동기의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 마음이 짠했었다.     


그때 술집에서 팝송 피아노맨이 흘러나왔다.     


“어? 야... 대박. 너한테 딱 어울리는 노래다. 너 진짜....바(bar)를 떠나는 존(John)이 되었구나....기억나?”     

“뭐?....아... 이 새끼 너 요즘에도 하루 종일 팝송 틀어놓냐?”     


“야. 당연하지... 뮤직 이즈 마이 라이프 인마... 크큭..”     


 철웅씨는 팝송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군생활을 할 때도 늘 팝송을 시끄럽게 틀어놓고 살았었다. 그중에서도 피아노맨 노래를 아주 좋아했는데, 가사 중에 존이 이곳, 그러니까 바(bar)를 떠날 수만 있다면 무비스타가 될 거라는 부분을 좋아해서 자주 불렀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는 존처럼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며, 그냥 음악이나 들으면 될 것을 쓸데없이 인생 철학을 펼칠 땐 진짜 재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정섭씨가 소리를 질렀다.     


“야! 너 피아노부터 배워 인마! 피아노도 칠 줄 모르는 놈이 맨날 피아노맨이야?!”     


 아.... 그때. 정섭씨는 가끔 그 시절이 그리웠다. 사람들은 군대 생활이 싫다고 하지만, 두들겨 맞든, 깨지든 어떻게 되든 해야 하는 일 외에 다른 현실적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곳. 하루일과를 무사히 잘 넘겼다는 것만으로 다른 걱정 없이 편히 잠을 이룰 수 있는 곳. 현실이 버겁게 느껴질 때마다 그곳이 생각나곤 했었다.     

 둘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술을 마셨다. 추억에 젖어 음악에 젖어. 그렇게 둘은 만취해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창을 통해서 보는 공방 2층의 정섭씨는 가슴을 팡팡 쳤다. 장인어른의 장례식이었다. 저렇게 미친 듯이 마실 일이 아니었다. 아니, 저렇게 마셨더라도 잠은 장례식장으로 돌아가서 잤어야만 했다. 정섭씨는 철웅씨에게 기어코 모텔방을 잡아준다고, 편하게 자고 가라며 함께 모텔로 갔다. 그리고는 그렇게 술에 취해서 또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 모텔방에서 더 마시다가 채 반병도 못 마시고 둘 다 쭉 뻗어버리고 말았었다.   

   

정섭씨는 그 날의 아침을 떠올렸다. 두 번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날의 아침.


 눈이 부셨다. 머리는 깨질 듯 아팠고, 들숨과 날숨에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마른 땅이 갈라지듯 목이 쩍쩍 갈라지는 느낌에 힘겹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물을 마셨다. 물을 마시고 나서 다시 몸을 침대에 턱 눕힌 정섭씨는 순간 화들짝 놀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부재중 전화 32건


문자 9건


톡 12건     


 시간은 10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새벽 6시에 발인. 장례식장에서 발인식을 끝내고, 화장장에서 화장까지 모두 이미 끝냈을 시간이었다.      


정섭씨는 그날의 아침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지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서서히 공방의 창에서는 정섭씨가 자리를 비운 장례식장을 비춰줬다.     


 초조한 아내의 모습. 다들 잠들어 있는 어두운 장례식장에서 아내 혼자만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홀로 빈소에 앉아 있었다.      


-째깍째각     


 소리가 나는 창 위의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아내는 불안한 표정으로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아마 자신에게 거는 전화였을 것이다. 공방의 창으로 보는 아내는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신호가 울리는 소리는 크게 들렸다. 오랜 신호음에도 받지 않는 전화.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아내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문자를 보냈다. 정섭씨는 아내가 어떤 내용을 보냈는지 궁금했다. 그러자 카메라 줌을 당기듯 창에서 보이는 화면이 아내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스마트폰의 문자 내용이 보였다.     


- 언제 와? 6시에 발인이야. 곧 어른들도 일어나실 거고.     


정섭씨가 그날 잠에서 깨어나 보았던 수많은 문자들의 내용 중 하나. 정섭씨가 한맺힌 주먹으로 창을 쾅쾅 쳤다. 주먹으로 세게 친 창에는 물결의 파동처럼 잔잔한 파동만이 잠시 일어날 뿐이었다. 

    

아내는 또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하고.... 또 전화를 했다. 창틀 위의 시계가 빠르게 돌아갔다. 


창 속의 어두운 장례식장에서 하나, 둘 불이 켜지고, 집안의 어른들이 일어나고, 손님들도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갔던 사람들도 발인을 위해 장례식에 모여들었다.     

 

 아내는 빈소에서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눈물을 흘렸다. 장모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아내에게 뭐라고 하는데, 정섭씨는 도저히 그 말을 들을 용기가 없어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숙이며 공방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정섭씨는 무서웠다. 그 시절을 다시 돌아보는 것이. 자기 자신이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고, 조금만 돌이켜보면 분명히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 외면해왔던 그 순간을 들여다 본다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정섭씨는 한참 동안 헉헉거리며 눈을 떼굴떼굴 굴리다가 귀를 막고 있는 손을 내린 후 조금씩 허리를 펴고 다리를 세워서 창문으로 훔쳐보듯 상황을 살폈다.      


“엄마! 왜 이래?!”     


빈소 옆의 작은 방. 아내가 장모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시끄러 이것아!! 넌 가만히 있어!!”     


장모가 아내를 밀쳐내며 정섭씨의 어린 아들에게 말했다.     


“명현아! 이젠 네가 상주다! 어차피 할아버지도 너를 제일 아꼈으니, 니가 할아버지 가시는 길 보내드려라!”


“네?”     


“엄마!”     


장모는 정섭씨가 놔두고 간 상주 완장을 정섭씨의 어린 아들 명현이의 팔에 채웠다.     

 

“할머니.... 왜 이러세요? 아빠는요?”     


“너네 아빠는... 이제 없다고 생각해!”     


“엄마!! 애한테 그게 무슨 말이야?!”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그러면 그렇지! 다른 날도 아니고!! 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니?!!”     


 장모는 분노에 가득찬 얼굴로 정섭씨 아들을 데리고 방에서 빈소로 나갔다. 곧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정섭씨의 어린 아들을 상주로 한 발인식이 시작되었다. 아내와 장모는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서럽게 하며 울었다. 정섭씨는 아내의 울음에서 장인어른에 대한 그것과 동시에 자신에게 한이 맺히고, 사무치게 애끓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섭씨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아이고....아이고... 정섭씨의 입에서 절로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장인어른의 장례식장. 거기서 아내는 곡을 했고, 그 모습을 보며 정섭씨는 2층 공방에서 당시에는 하지 못했던 곡을 했다.      


 발인식이 끝나고 버스를 타고 화장장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아내는 계속 정섭씨에게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냈다. 장모의 눈치를 보고, 처제의 눈치를 보면서.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계속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이때만이라도 연락이 되었었더라면... 화장이 끝나기 전에만이라도 연락이 되었더라면... 하지만, 결국 정섭씨는 화장이 모두 끝나고, 납골당에 유골함을 안치할 때까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장례식이 모두 끝나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친지들이 돌아가고 난 후 장모가 아내에게 말했다.      


“짐 싸서 우리 집으로 들어와.”     


“뭐?”     


“그 인간 하고는 이제 정리해!”     


장모의 말에 아내가 아들의 귀를 막았다.     


“엄마 진짜!! 명현이 듣는데!! 정리하긴 뭘 정리해?!”     


“넌 지금 이 상황에서도 니 남편 편을 드는 거니?! 그게 인간이야?!!”     


“내가 언제 편을 들었어?.... 물론 오늘 일은 조서방이 잘못하긴 한 거지만.... 오랜만에 군대 동기가 와서 기분 좀 내다가 술에 취해서......”     


“뭐? 기분? 기분?!!! 뭔 놈의 기분을 장인어른 장례식장에서 내니? 어?! 세상에 내 살다살다 상주가 사라져버린 장례식은 처음 본다!! 남의 장례식도 아니고, 네 아버지 장례식에서 이런 꼬라지를 보다니!! 아이고~ 내 팔자야~~ 아이고~~!! 너도 이제라도 정신차려 이것아!! 정신!!”     


장모는 울며불며 아내의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다. 아내도 장모에게 맞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엄마. 그래도... 명현이가 있는데... 아빠 없이 키울 순 없어....”     


“평범한 아빠라면 그렇지! 그런데 지금 조서방같은 아빠는 명현이한테 차라리 없는 게 나아!”     


“엄마 쫌!!”     


- 띠리리리     


장모와 아내가 다투는데,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는 스마트폰의 액정화면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남편이었다. 아내가 안절부절 하다가 한쪽으로 얼른 뛰어가서 전화를 받으려는데, 장모가 외쳤다.

     

“여기서 받아!! 내 그 인간이 뭐라고 하는지 한 번 들어나 보자!!”     


아.... 안 돼!! 정섭씨는 술이 덜 깬 그날의 아침이 너무나 잔인하게도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아내에게 전화를 하고, 장모에게 소리를 질렀던..... 아... 정말...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아내의 전화를 탁 뺏더니 장모는 스피커폰을 눌러 아내에게 다시 건넸다.     


“...여...여보세요?”     


아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여보...미안. 정말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어제 철웅이하고....아...진짜 할 말이 없다 여보. 너무 미안해..”     


“...흑....흐흑......으흐흑...”     


정섭씨의 말에 아내는 울기만 했다.     


“...진짜 여보...철웅이랑....딱 한 잔만 더 하고....”     


아내는 계속 울었고, 정섭씨는 계속 핑계를 읊었다.     


저런 상황이었구나.... 저 때가.... 


자신이 창을 통해서 듣고 있는데, 술이 덜 깨서 혀가 꼬인 발음으로 너무나 구차하고 치졸하게 변명을 하는 자기 자신을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아내의 곁에서 듣고 있던 장모는 화가 나서 치를 떨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다 순간 아내의 전화기를 홱 낚아채며 말했다.     


“조서방! 아니, 조정섭씨! 이제 우리 딸 볼 생각 하지마! 알았어? 명현이도 마찬가지고!”     


“어? 아..장모님. 정말.. 죄송합니다..제가..”     


“죄송이고 뭐고, 이제 우린 남남이니까. 알아서 잘 사시고, 내 딸하고 명현이는 볼 생각도, 연락도 하지 마!”     

“엄마! 쫌!”     


아내가 장모손에 있는 스마트폰을 뺐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장모는 끝까지 폰을 놓지 않았다.     


“...정말...미안합니다...근데..저도..사정이...”     


“사정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장례식이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내가 자네랑 결혼한다는거 그렇게 말렸는데.... 이제 좀 사람구실 하나보다...했는데... 역시 사람은 변하는 게 아니었어.. 자네같은 인간은 평생 공사장에서 굴러먹고 그렇게 살아! 내 딸하고, 손자 고생시키지 말고. 알았어?!”     


안 돼!! 안 돼!!! 제발....!!! 정섭씨는 그 다음에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잘 알았다. 누군가 자신의 평생직장인 공사현장을 무시하면 자기도 모르게 불쑥 발끈하는 그 성질이 술에 취한 그의 몸에서 아무런 제지도 받지 못한 채 불쑥 튀어 나와버렸다.    

 

“하...참나...뭐라고?!”     


“뭐?! 지금 자네 뭐라 그랬나?!”     


“그러는 당신은! 뭐? 내가 공사장에서 굴러먹어?! 그게 뭐?! 내가 그렇게 굴러먹어서 집도 짓고, 아파트도 짓고 그랬다! 왜?!!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없으면 뭐, 어떻게 당신 같은 인간들이 집에서 살 건데?! 동굴에서나 살아야지!!”     


“뭐? 당신?...하....어머..어머....”     


장모는 정섭씨의 막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뒷목을 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좋다! 씨바! 누군 아쉽냐? 데려가! 딸 데려가고, 손자새끼까지 데려가! 그것들이 거기서 살고 싶다고 하는 모양이지?! 나 그것들 없어도 하나~~도 신경안써! 근데!! 그것들은 데려가더라도 돈은 떼먹을 생각하지 마! 돈은 꼭 받을 테니까!! 알았어?!”     


“뭐, 뭐? 이.. 이 인간이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니?”     


“장인 보험금!! 10억 이라며! 당신 딸이나, 당신 손자는 데려가건 말건 난 모르겠고, 10억은 절대 포기 못하니까 무조건 내놔!!”     


장모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풀썩 주저앉으며 쓰러졌다.     


“엄마!! 엄마!!!”     


 아내의 울부짖는 소리.... 


아내는 그 뒤로 집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정섭씨는 장인의 사망 보험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공방2층의 정섭씨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통곡했다. 한참을 통곡하며 이제 더 이상 흐를 눈물이 없을 정도로 많은 눈물을 쏟아낸 후, 정섭씨가 딸꾹질하듯 가슴을 들썩거릴 때 다른 쪽 창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응애!! 응애!!"

     

 정섭씨는 아기 울음소리에 이끌리듯 바닥에서 일어나 소리가 나는 창으로 갔다. 그곳에는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아들과, 아내가 보였다. 더 오래된 과거를 보여주는 창에서 아내는 세상 행복해 보였다.    

 

“오늘 장목수가 약속 깬 게 그렇게 좋냐?”     


“응. 거기다 오늘 자기가 술도 안 마시고, 명현이하고 이렇게 둘이 나란히 누워있으니까 세상 다가진 것처럼 너무 좋아.”     


“체... 이런 여관방에서... 뭐가 좋아?”     


“오히려 더 좋지 뭐. 좁은 공간이니까... 우리 셋이 더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거잖아?”     


“참...어떻게 너는 생각을 정말 이상하게 한다? 암튼 좀만 기다려봐. 내가 그냥 뽝!! 큰 거 한 건 터트려서 좋은 집으로 이사 갈 테니까.”     


“큰 거 이런 거 바라지도 않아. 난 진짜 괜찮다니까?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데 뭐.”     


“야! 이게 뭐가 행복하냐? 여관방 전전하면서 사는 게!”     


“여관방이라서 행복한 게 아니고, 당신하고 명현이가 같이 있어서 행복한 거라고.”     


“돈이 많으면 더 행복하겠지.”     


아내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돈이 많으면 뭘 할건데?”     


“여행 가야지. 좋은 집도 사고, 좋은 차도 사고.”     


“그리고?”     


“뭐.... 맛난 음식도 먹고.... 오붓한 시간도 보내고.....”    

 

“그럼 우리 지금 돈 많은 부자 되면 할 수 있는 거 하나는 하고있는 거네?”     


“뭐?”     


“오붓한 시간. 우리 지금 보내고 있는 거잖아.”     


“뭐? 참 나.... 넌 참.... 아이고, 됐다. 됐어. 사람이 욕심이 있어야 발전이 있는 거지...넌 발전이 전~~혀 없겠다.”     


정섭씨의 구박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는 생글생글 웃었다.     


“발전이 전~~혀 없어도 괜찮아요! 명현이하고 당신만 이렇게 곁에 있으면. 히히.”     


 아내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비좁고, 너저분한 여관방에서도. 그때 아내에게는 그곳이 행복이 가득한 곳이었고, 아들에게는 그곳이 세상의 전부였다. 당시 그곳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섭씨 밖에 없었고, 이제 와 그곳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정섭씨 밖에 없었다.      


정섭씨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23. 시간     


홍사장과 정부장이 횟집에서 마주 앉았다.      


홍사장은 공방 2층에서 꿈을 꾸고 난 후, 당장 정부장을 만나러 달려왔다.     


“지금 당장 나와!”     


홍사장이 정부장의 집 근처에 이르러 전화를 하자, 정부장은 우물쭈물했다.  

   

“어.... 사장님. 저기.. 제가 지금 일이 있어서...”     


“회사도 안 나오는 놈이 일은 무슨 일!! 그럼 내가 집으로 쳐들어갈까?!”     


“아, 아닙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홍사장이 당장 집으로 쳐들어올 기세로 윽박지르자 정부장은 마지못해 홍사장을 만나러 나왔다.   

   

홍사장과 정부장의 술자리. 홍사장의 아내가 세상을 뜨고 나서는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거의 6년 만에 마주하는 술자리였다. 며칠 전부터 회사에 나가지 않는 정부장은 가시방석이었다.    

  

‘도대체 왜 찾아오신거지? 설마.... 이번에 회사에서 입은 피해를 내가 손해배상해야 하는 건가?’     


 의외였다. 홍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올 거라곤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동안 홍사장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마지막 사직서를 건넸을 때의 반응을 봐서는 절대 연락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집 앞까지 찾아왔다. 그리고 찻집이 아닌 술집으로 불러냈다. 분명 뭔가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정부장이 머리를 굴려봤을 때, 큰일은 얼마 전 우성과의 계약밖에 없었고, 그것 때문이라면 자신에게 회사 피해를 물어내라는 것 밖에 없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정부장은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고과장의 실수라고 일러바치는 것도 치졸해 보였다.     


‘나의.....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지.’     


홍사장과 정부장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아마 둘 다 술이 몇 순배는 돌아야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밑반찬과 소주가 먼저 나왔다. 홍사장은 소주를 들어 뚜껑을 열었다.     


“제가 먼저 드리....”     


“그냥 받아.”     


 정부장이 술을 먼저 따르려고 했으나, 홍사장은 정부장이 먼저 술을 받길 권했다. 정부장은 홍사장이 따라주는 술을 먼저 받았고, 술병을 넘겨 받아 홍사장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마셔.”     


“아, 예.”     


두 사람은 잔을 살짝 부딪치고 소주를 마셨다.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홍사장이 입을 열었다.    

 

“정부장...”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홍사장은 무슨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불쑥 책임지겠다는 정부장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음?....뭐를?”     


“제가 이번에 회사에 손실 나게 한거.....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뭐?”     


홍사장은 헛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이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한번 지켜나보자.     


“그래? 그럼 정부장이 뭘 어떻게 책임질건데?”     


“회사에서 난 손실만큼....제가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그럴 돈은 있고?”     


“집을 담보로 잡고....대출을 내면 어느 정도는......”     


“그럼 내일 회사로 와. 각서 써야지. 나중에 딴소리 할 수도 있으니.”     


“예....”     


‘역시 그것 때문이었구나....’ 정부장은 시무룩해졌다.     


“그건 그렇고. 내가 사표 수리하지도 않았는데, 왜 정부장 마음대로 회사를 안 나와?”     


“...”     


“회사가 무슨 애들 장난이야? 처음 입사할 때 죽기살기로 하겠다 마음을 먹었으면, 죽어도 회사에서 죽는다는 각오로 일을 해야지!”     


“....죄송합니다....”     


“진짜 그만둘 거야?”     


정부장은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흠.... 그래. 알겠어. 어쨌든 내일 회사에는 나와. 알겠어?”     


“네..”     


 아쉬웠다. 솔직히 홍사장이 집 앞에까지 찾아왔다고 하기에 회사로 돌아와달라는 말을 하러 오진 않았을까? 하는 기대로 조금은 했었다. 그렇다면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못 이기는 척 회사로 돌아갈 마음도 있었다. 그럼 그렇지... 홍사장이 그런 아쉬운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정부장은 잘 알고 있었다.      


“주문하신 고급회 나왔습니다~”     


주문한 회가 나왔다. 정부장은 흠칫 놀랐다.      


“고급회...요?”     


“네.”     


“혹시 주문이 잘못.....”     


“음... 어? 여기 맞는데요?”     


횟집 직원이 주문표를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말했다.   

  

홍사장이 주문을 했기에, 정부장이 홍사장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저기.... 이분은 고급회를 절대 주문하실 분이 아닌데...”     


“야!”     


홍사장이 정부장을 노려보며 소리지르자 정부장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그냥 놔두고 가세요. 제가 주문한 거 맞습니다.”     


홍사장이 직원에게 말하자 직원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회를 놔두고 갔다.     


“휴우.... 내가 암으로 죽기 전에, 너 때문에 혈압으로 죽겠다.”     


 기분이 묘했다. 아직 자식들도 모르고, 병원을 고소하기 위해 말했던 황변호사를 제외한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암에 대한 이야기를 정부장에게 이렇게 털어놓게 되다니.     


“예?...그게 무슨.... 사장님 설마.... 혈압있으세요?”     


홍사장은 어이가 없어 입을 턱 벌렸다. 


아~ 이 새끼....     


“안주 나왔는데... 그냥 술이나 마셔!”     


“예?...아, 예.”     


둘은 술잔을 비웠다.     


 정부장은 오늘따라 홍사장이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집까지 찾아온 것도 그렇고, 횟집에서 일반회와 고급회 중에 절대 고급회는 시키지 않는 사람이 고급회를 주문한 것도 그랬다. 홍사장은 고급회라고 붙여놓은 것 자체가 문제라며 지적하곤 했었다.     


“그럼 고급회 아닌 회는 저급회인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걸 붙여놨는지... 쯧쯔.... 그냥 비싼거 먹으라는 말이잖아? 어차피 똑같은 건데.”    

 

 정부장은 불편한 마음으로 술을 마시고, 홍사장의 눈치를 살폈다.  

   

 홍사장은 젓가락을 들더니 머뭇머뭇거리며 회가 아닌 밑반찬쪽으로 향했다. 


머지? 평소 안 시키던 고급회를 시키더니 부담스러우신가?     


 홍사장은 의사가 날음식은 피하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몇 번 젓가락이 엉뚱한 곳으로 향하다가 홍사장은 피식 웃었다. 


술도 피하라고 했는데, 술은 술술 마시면서 날음식을 못 먹을 건 뭐람? 곧 죽을 거면서.     


 홍사장은 술을 몇 잔 마신 후 작심한 듯 회를 푹 떠서 와사비 간장에 찍어 입에 텁썩 물었다. 그리고 쿰척쿰척 맛있게 씹었다. 그제야 정부장도 조금은 불편한 마음을 풀고 회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홍사장은 정부장과 마주하며 술을 마시면서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선고받고, 삶의 끝을 정리하며, 인생의 마지막 술이라고 생각하는 자리를 정부장과 둘이서 하게 될 줄이야.    


 홍사장은 이곳으로 오면서 정부장과 술자리를 어디서 할지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정부장이 평소 회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횟집으로 정했고, 이왕이면 마지막이니만큼 좋은 걸 먹이고 싶었다. 물론, 고급회라는 것이 상술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여전했지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미웠다. 정부장이 일하는 것을 보면. 조금만 더 일머리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리고 짠했다. 그렇게 일머리도 없는 놈이 어떻게든 일을 해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이런 놈도 한 가정의 가장이라고 직장에서 늘 싫은 소리 들어가면서도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악착같이 일하는 것을 보면... 바퀴벌레보다 더 독한 놈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지독한 놈....”     


“예?”     


“아니다. 그냥 마셔.”     


“아...예....”     


 정부장은 홍사장에게 여러 가지로 섭섭할 때도 많았지만, 그에 대한 미움보다는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이 더 컸다. 특히나 홍사장이 아내가 죽은 이후로 사람이 더욱 날카로워지고, 삭막해져가는 모습에서 많이 외롭고, 쓸쓸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정부장은 홍사장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했지만, 홍사장은 그만큼 더 멀리 떨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홍사장이 안타까워 보이는 건 여전했다. 자신에게 거래처에서 피해를 입은 일에 대해 책임지라고 전화만으로 이야기를 해도 될 텐데, 옛정이 있어 일부러 술을 한 잔 받아주시는구나, 그러면서도 마음에 담은 표현은 못해 저렇게 퉁명스럽게 행동 하시는구나 하는 마음에 정부장의 마음이 찡했다. 거기다..... 무려 고급회까지?    

 

정부장이 피식 웃었다.     


“뭐야? 너 왜 웃어?”     


“아니...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데? 어서 말해봐.”     


소주 2병째. 홍사장도, 정부장도 슬슬 취기가 올라왔다.     


“음....좋아서요.”     


“뭐가?”     


“사장님과 이렇게 술을 마신다는 게.”     


“좋긴... 개뿔.... 만날 나한테 싫은 소리만 듣는 놈이! 그래서 회사도 그만 두겠다는 놈이 좋긴 뭐가 좋아?!”     

“그렇게 싫은 소리도 하시고..... 회사도 그만 두겠다는 놈한테... 회를 사주시잖아요... 무려 고급회를...” 

    

“허헛.... 회 두 번 사줬다간 때려도 좋아하겠다?”     


“이미 자주 때리셨는데요...히히...”     


 홍사장은 뜨끔했다. 맞다. 툭하면 정부장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게 예사였다. 홍사장의 눈길은 저절로 테이블 아래 정부장의 다리로 향했다. 여름으로 치닫고 있는 6월. 정부장이 칠부바지를 입고 나와서 정강이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수많은 흉터들과 최근에 생긴 멍 자국. 회사에선 늘 긴바지만 입고 있어서 볼 수 없었던 정부장의 정강이를 보자 홍사장의 얼굴이 빨개졌다. 저 수많은 흉터들이 누구의 작품인지 본인이 가장 잘 알았기에.     


“야. 정부장.”     


“예?”     


“너 인마.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나 고소할 생각은 안 해봤냐?”     


“안 해봤겠어요?”     


밉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애증이 넘치는 홍사장을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술기운도 제법 올랐고, 어차피 이제 회사도 안 다닌다 생각하니까 농담도 편하게 나왔다.   

  

“어쭈?”     


“근데, 그러면 회사가 어려워질 수도 있잖아요. 제 직장인데... 회사가 사장님 살린 겁니다.”      


“아~ 그래? 그럼 이제 회사도 그만뒀겠다. 나 고소할 수도 있겠네?”     


“음....”     


정부장이 잠시 생각하는 시늉을 하더니 씩 웃었다.     


“아뇨.”     


“왜?”     


“거기에 저만 있나요... 심대리, 고과장, 윤지씨..... 다들 거기가 직장인데...”     


정부장이 누구보다 회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았기에 홍사장은 마음이 뭉클했다. 어쩜 이놈은 회사 주인인 나보다 회사를 더 아끼는 거 같을까?     


“그런 놈이 회사를 그만둬?”     


“사장님 때문이죠 뭐..... 이렇게 해도 사장님은... 저한테 다시 오라는 말씀은 안 하시잖아요?”     


정부장은 일말의 희망을 담아 속내를 털어놓았다.     


“회사로 와.”     


“정말요?”     


정부장이 반색했다.     


“그래. 아까 말했잖아. 내일 각서 쓰러 오라고.”     


정부장은 다시 풀이 죽었다.     


“너무해....”     


“술이나 마셔 인마.”     


술병이 또 한 병 늘어나고, 둘은 점점 더 취했다.     


“그래도... 좋네요...”     


“뭐가?”     


“사장님하고 아니, 이제 그만뒀으니까 형님이라고 하겠습니다.”     


“뭐? 형님?”     


“그래요. 홍.유.인. 형님. 왜요? 회사도 안 다니는데... 사장님 소리 듣고 싶어요?”     


“하..... 됐다. 그래. 그냥 편하게 불러라. 어쨌든... 뭐가 좋은데?”     


“이제... 편하게 술 한잔 마실 수 있다는 거요?”     


“언제는 불편하게 마셨냐?”     


“그게 아니라... 형님하고요... 홍.유.인. 형님하고요...”     


홍사장은 피식 웃었다. 정말 오래되었다. 아내가 죽고 난 이후로 처음 갖는 정부장과의 술자리.    

 

“사장니..아니, 형님. 이제... 또 이런 자리는 없겠죠? 내일 각서쓰고 나면... 저 보러 안 오실 거죠?”     


“그래....뭐 그래도 앞으로 한, 두 달은 볼 수도 있겠지? 이런 술자리는 못하겠지만.”     


홍사장은 죽기 전 오늘 마시는 술이 마지막이라고 마음 먹었기에 이렇게 말했다.      


“한..두 달이요? 그럼... 그 뒤에는요?”     


“평생 볼 일이 없을 거다.”     


“너무해! 형님...정말 너무해.....”     


갑자기 정부장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야...정부장... 사람 사는 거 다 시절인연이야. 인연이 돼서 만나고, 때 되면 헤어지고, 또다시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지 뭐, 별거 있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모님이셨다면 그렇게 말씀 안 하셨을 텐데....헙!! 죄, 죄송합니다!”    

 

정부장은 자기도 모르게 홍사장의 아내가 생각나 말했는데, 깜짝 놀라서 얼른 입을 틀어막으며 사과했다.    

 

“괜찮아..말해도 괜찮아..벌써 오래 됐는데 뭐...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홍사장은 정말 이젠 괜찮았다. 만날 날이 얼마 안 남았기에.     


“...그래요?...사실 그동안 사모님 이야기 하고 싶어도 조심스러워서.....”     


“조심스러워?.. 정부장이?...허이구.......근데, 나한텐 형님이라고 하면서 왜 사모님이야? 형수님이라고 하지?”     

“음.....형수...아, 안돼요. 형님은 되는데, 사모님은...그냥 사모님..”     


“....”     


“회사를 다니면서도 그리웠는데.... 이제 그만 두니까 더 그립네요.....”    

 

둘 다 잠시 말이 없었다.     


“매운탕 먹을 거지?”     


어느새 회 한 접시가 거의 다 비어 있었다. 회를 먹고 나서 먹는 매운탕. 너무나 당연한 절차였으나, 정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사장님.”     


“어? 뭐라고? 안 먹어? 진짜?!”     


“오늘 술자리가 마지막이라면서요.”     


“그렇겠지.. 술자리는.”     


“그럼 당연히.... 노래방이죠!”     


“뭐? 노래방?”     


“그래요. 사모님이 여기 계셨다고 생각해보세요!”     


 맞다. 정부장의 말처럼, 홍사장의 아내는 회식을 할 때, 흥이 오르면 함께 어울려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사모님이 부르는 시간.... 듣고 싶다. 사모님이 진짜 그 노래 좋아하셨잖아요....사장님은 노래방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홍사장이 피식 웃었다. 정부장의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이 재밌어 보여 웃었고, 정부장이 모르고 있는 는 사실이 있어서 또 웃었다.     


“가요! 형님! 노래방은 제가 쏩니다!”     


“여기는?”     


“....예?...”     


“여기도 내가 산다고 한 적은 없는데?”     


“....어.... 그게..”     


정부장이 당황스런 표정을 하자, 홍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어 인마. 이제 집 담보로 빚까지 내야 할 놈이 무슨...”     


홍사장의 말에 정부장이 뾰로통했다. 횟집에서 계산을  마치고 나온 홍사장이 말했다.


“앞장서.”     


“뭐를요?”     


“노래방 가자며.”     


“정말요? 정말 가시려구요??”     


 정부장은 회사 회식 때에도 노래방에 가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있다가, 직원들이나 사모님이 수차례 권하면 마지못해 한 곡 부르고 다시 얌전히 앉아 있던 홍사장이 정말 노래방에 갈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럼. 안 갈래?”     


“아니요! 가야죠! 얼른 가요!”     


조금 전까지 뚱해 있던 정부장은 금세 기분이 들떠서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참 단순했다. 사람이. 그래서 좋았고, 그래서 싫었다. 단순함과 순수함은 때론 홍사장을 흐뭇하게 했고, 때론 홍사장을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들었다.     


“사장님. 이쪽이요.”     


정부장이 앞장서 걸었다. 휘적휘적 보무도 당당한 정부장의 모습.     


“정부장 동네에 오니 걸음걸이부터가 다르네?”     


“당연하죠. 헤헤. 그런 말도 있잖아요. 똥개도 자기 동네에서는 오십 프로 먹고 들어간다.”     


“뭐? 그런 말이 있어?”     


“그럼요. 아, 참고로 저는 팔십 프로 먹고 들어갑니다. 여기 토박이거든요. 자, 얼른 가요!”    

 

 정부장은 자주 가는 곳인지 당당하게 한 단란주점으로 들어갔다. 단란주점의 주인이 반갑게 정부장에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안내했다. 맥주 몇 병과 마른안주를 주문하고 정부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사장님 먼저 노래한곡....을 권하고 싶으나! 분명히 또 너부터 노래하라고 말씀하실게 뻔한 관계로~~ 저부터 한 곳 뽑아 올리겠습니다!!”     


“그래. 잘 아네.”     


정부장은 노래방 기계에 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고는 시작 버튼을 누르기 전에 넥타이가 없는 걸 아쉬워하며 휴지를 풀어 머리에도 두르고, 목에도 감았다.     


“야. 정부장.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거야?”     


“에이~~ 사장님은.... 꼭 노래방에서도 샌님처럼 놀려고...”     


“뭐 인마?”     


정부장은 대꾸하지 않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화면에 글자가 뜨면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악에 맞춰 정부장이 통통한 몸을 공이 튀기듯 통통 튀며 춤을 췄다.     


어젯밤 이야기 / 소방차     


“어젯밤에 난 네가 미워졌어! 어젯밤에 난 네가 싫어졌어!!”     


 미워졌어와 싫어졌어에 유독 목소리에 힘을 실으며 ‘네가’ 라는 가사에 맞춰 홍사장을 향해 삿대질을 하듯 손가락을 쭉쭉 찔러댔다.     


“저, 저눔시키가!......어휴....”     


 홍사장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정부장은 토라지듯 홱 돌아서며 엉덩이를 좌우로 실룩실룩 움직였다. 나풀나풀거리는 휴지의 하늘거림과 정부장의 흐느적거림이 참 잘 어우러졌다.    

  

 때때로 홍사장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대는 것을 잊지 않고 부지런히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 전곡을 완창한 정부장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노래가 끝나자 홍사장이 박수를 쳤다.     


“이야.... 소방차 처음 나왔을 때, 정원관처럼 통통한 가수가 춤추는 걸 보고 깜짝 놀랐는데... 정부장 추는 거 보니까 그건 애교 수준이었구만.”     


칭찬인지 놀리는 건지 모를 애매한 말에 정부장이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장니..아니, 형님. 전에도 그런 비슷한 말씀 하셨거든요?”     


“내가? 그랬었나?”     


“통통 튀어다니는 게, 프라이팬 위에 칼집 안 낸 줄줄이 비엔나소시지 터지는 것 같다고.”      


홍사장은 순간 뜨끔하면서 무안한 마음에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크허험! 자, 나도 노래 한 곡 해야지!”     


“예? 아니, 어쩐 일로 누가 권하지도 않았는데 노래를......”     


“이봐. 정부장. 자네는 우리 집사람이 시간이라는 노래를 좋아해서 많이 부른 줄 알고 있지만, 사실 그거 내가 연애할 때 18번이었어.”     


“뭐라구요?”     


“내가 그 노랠 좋아하니까... 그런데 부하직원들 앞이라고 부끄러워하고... 뻘쭘해 하면서 노래를 안 하려고 하니까 우리 집사람이 대신 불러준 거라고.”     


홍사장의 말에 정부장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홍사장이 시작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제목과 가수 이름이 나왔다.     


시간 / 김도향     


 홍사장은 오늘 만큼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뻘쭘해하지 않으며 죽기 전 마지막으로 노래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이 자리에는 세상에서 가장 만만한 정부장만 있었다.     


“나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난 어디로~ 돌아갈까.....”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는 홍사장의 모습을 정부장은 멍하니 쳐다봤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홍사장은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술에 취해. 음에 취해. 노랫말에 취해.    

  

시간... 정말... 마지막으로 돌아갈 수 있는 순간이 허락된다면... 언제를 선택하게 될까? 아내가 건강할 때로? 처음으로 회사 제품이 수출 나갔을 때? 회사를 처음 차렸을 때?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내를 처음 만난 날? 군대를 갓 전역했을 때? 어머니 품에 안겨 잠이 들던 어린 시절로?... 그런데.. 지나온 그 많은 시간들 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 있는가...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있었나... 돌이켜 보니.. 모든 날이 좋았다. 좋아서 좋았고, 나빠서도 좋았다. 기뻐서 좋았고, 아파서 좋았다. 수월해서 좋았고, 어려워서 좋았다. 나쁨도, 아픔도, 어려움도.... 그러한 순간 또한 인생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이젠 알 수 있었기에.      


“가~슴 한 켠 숨어있는 후~~회도~ 내가~ 흘러 갈~ 세월~이 가려~ 주~겠지~”     


시간의 마지막 부분을 흐르는 홍사장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아이~ 참. 주책맞게 이게 뭐하느.....”     


“흐어엉!!!”     


홍사장이 불쑥 흘려버린 눈물에 쑥스러워하는데, 갑자기 정부장이 울음을 터트렸다.     


“뭐, 뭐야? 왜 이래? 정부장! 왜 울어?”     


“흑....모르겠어요.”     


“뭐? 울고 있는데, 우는지를 왜 몰라?”     


“그냥....형님 노래가 슬프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구슬프기도 하고...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고...여러 가지로 복잡해요. 그리고....”     


홍사장은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훔치고 자리에 앉으며 맥주를 한 잔 쭉 들이켰다.

     

“그리고?”     


“형님이.... 노래를 부르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알 것 같은 기분?”     


“그래?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데?”     


“글쎄요... 그냥 기분이 그렇다는 거죠. 기분이.”     


“그래... 기분도 그런데... 노래 한 곡 안 해?”     


“조금만 이렇게 있다가요.”     


“그래. 그럼.”     


 정부장과 홍사장은 잠시 노래를 멈추고, 말도 멈췄다. 두 중장년의 남성이 노래를 부르지 않고 앉아 있는 어색한 방에는 코훌쩍이는 소리만 간간이 울렸다.      


홍사장은 눈물을 흘리는 정부장을 보며 평소 자신이 즐겨 하던 스티브잡스의 명언이 또 생각났다.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인생에서 큰 결정을 할 때 도와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당신이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건 우리가 아직 잃을 게 많다는 착각으로부터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다.     

 

홍사장은 내일 자신이 하게 될 결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봤다. 다행이었다. 큰 결정을 앞두고 죽음이라는 도구가 도와줘서. 홍사장이 씩 웃으며 맥주를 또 한 모금 마셨다. 두 사람의 밤이 깊어갔다.                                                                                                                   

24. 함께. 서로. 같이.     

 

어두웠던 공방이 환해지며 순간 지연씨의 눈이 부셨다.     


“다 잤냐?!”     


 친구 선희의 목소리.     

지연씨는 부신 눈을 서서히 빛에 적응하며 떴다. 훅 풍겨오는 나무냄새. 그렇지. 여긴 공방이었지. 대구탕집 2층 공방. 거기서 도마 만들기를 하다가.... 잠이 들었나?     


“넌 무슨 애가 낮잠을 자면서 막 흐느끼고.... 아침 드라마 보는 줄?”     


“어...그랬어?”     


“그래... 그나저나 너 아침드라마 참 좋아했는데... 수능 끝나고 대학 들어가기 전에 너 알바하러 다니던 공장에도 맨날 아침드라마 보고 가다가 늦어서 혼나고...아, 그때가 좋았는데... 그치?”     


“응?... 내가?...”     


“뭐야?... 너 설마!.... 기억이 안 난다고는 하지 마 이년아! 혹시라도 하려거든 치매보험이라도 들어놓고 말해!”     


 맞다. 선희씨는 수능이 끝나고, 반친구들 중에서도 제일 먼저 공장에 파트타임을 구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까마득한 먼 일인 것 같고, 전혀 다른 사람의 일처럼 느껴지다니...     


“맞아....그랬지....”     


갑자기 지연씨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또르르 굴러내렸다.     


“머....뭐야? 지연아. 너 왜그래?”     


선희씨가 갑작스러운 친구의 눈물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 지연씨는 눈물을 손으로 훔쳤다.     


“아니야. 아무것도. 하아..... 그냥. 그 시절이 너무 그리워서.... 정말... 나 왜 이렇게 못나게 변했을까?.. 그치?”     


 지연씨가 웃으며 친구 선희씨를 향해 물었다. 지연씨의 웃는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안타까웠다. 친구의 슬픈 미소가. 이럴 땐 평범한 위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선희씨는 잘 알았다.     


“아니라고 하진 않을께. 너 못난 거.”     


“...”     


“아, 정정. 그냥 너가 아니라. 지금의 너. 지금의 너가 못난거지, 그 시절의 너는 정말 찬란했어. 저기 쏟아지는 햇살처럼.”     


‘그 시절의 너’ 라는 말이 시리도록 아프게 지연씨의 가슴에 꽂혔다.      


“.....정말?....”     


“그럼. 누구보다 당당하고, 멋졌었지.”     


 당당하다는 말. 그 말이 마치 이제는 모두 개발되어 사라져버린 어린 시절의 고향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그 시절... 좋았다. 가진 것이 없어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살며,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이 나다!! 라고 세상에 떳떳할 수 있어 좋았다.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았다.     


 그런 지연씨의 당당한 모습보다 더 당당한 사람이 있어 지연씨를 놀라게 만든 사람이 바로 남편이었다. 가진 것도 없고, 별로 잘난 것도 없는 사람이 뭐가 저렇게 당당하지? 지연씨는 남편의 모습에 때론 당황스러웠다.      

“지연씨. 지연씨는 가진 게 많은 사람은 뽐내고 잘난 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요. 그런 사람은 재수 없죠.”     


“맞아요.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가진 사람이 잘난 척하는 것도 재수 없지만, 없는 사람이 움츠리고 있으면 그것도 꼴 보기 싫은 거죠. 당당해야 합니다. 없는 사람도. 그런 사람이 가졌을 때도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 거에요. 돈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무슨 논리인지는 몰라도 그 당시엔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래서 끌렸다. 배경의 위세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의 당당함을 자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남편에게.     


 그렇게 당당한 둘이 만났는데. 둘이서 가슴을 쫙 펴고 세상을 당당하게 마주하면 무서울 것이 없을 거라 믿었는데. 지금은 자신도, 남편도.... 한없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지연아. 그건 이제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첫 직장 다닐 때, 누가 뒤에서 나 욕하고 다녀서 엄청 힘들어 했을 때, 내가 그 인간 누군지 잡아서 죽여버리겠다고 했을 때 니가 나한테 그랬잖아. 돌에 맞았으면, 돌 던진 새끼가 누군지 잡으려고 피 철철 흘리면서 휘젓고 돌아다니지 말고, 얼른 상처부터 치료를 하라고.”     


기억이 났다. 그래.... 그때의 나는 그런 말도 할 줄 알았구나...     


“....내 상처는....그럼 뭘로 치료할 수 있을까?”     


“아주 쉬워.”     


지연씨는 쉼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친구의 얼굴을 쳐다봤다.      


“다시 돌아가면 돼. 왔던 길을 거슬러서. 지금의 너도 지연이고, 그때의 너도 지연이니까.”     


“...내가 정말.... 그때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럼. 여기까지 걸어온 길은 처음 걸어본 길이라 가끔 엉뚱한 곳으로 빠지기도 했지만, 그게 반복되다 보니까 점점 길을 걷기가 두려워졌겠지만, 돌아가는 길은 쉬울 거야. 한 번 걸어본 길이니까.”     


 선희씨가 지연씨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진부한 말. 그런데 그 말이 사무치게 지연씨의 심장을 파고 들었다. 지연씨는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계속 쏟았다. 선희씨는 친구가 원없이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모든 후회를 흘려내도록 묵묵히 기다렸다. 지연씨의 울음 속에서 모든 공간의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시간을 달리는 공방.      


“선희야...고마워...”     


“고맙긴...오히려 내가 고마워...”     


“...뭐..가?..”     


“뭐랄까....나도 조금은 두려웠거든. 그 시절의 내 친구를... 앞으로 다신 만날 수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동안 너에게 수없이 말을 해봤는데, 마치 꽉 막힌 벽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했던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런 나에게도 오늘 희망이 생겼네? 헤헤.”     


수줍게 웃는 선희씨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또 미안했다. 지연씨는 자신이 또 고마워해야 하고 미안해 해야 할 사람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 당장 무엇을 해야 할 지도. 지연씨는 빨리 집으로 가고 싶어졌다.     

     

 밤 11시. 오늘도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지연씨의 남편 지훈씨는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아내는 잠이 들었을까? 그냥 조금 더 일을 하고 올 걸 그랬나? 아니, 아니지. 그러다 새벽에 들어갔는데 잠들었던 아내가 깨면 그게 더 피곤하지. 


아내가 너무 멀쩡해도 안되고, 잠에서 깰 때도 안되고, 적당히 피곤한 시점에 집으로 들어가는게 포인트였다.      

 그렇다고 꼭 아내를 피하기 위해서만 야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다. 물론, 야근수당 얼마를 더 보태도 생활비를 충당하기엔 턱도 없었지만, 그거라도 벌어야만 했다. 벌고... 또 벌고... 새벽에 배달 아르바이트라도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도저히 잠을 안자며 일을 할 자신은 없었다. 


 새벽이 어려우면 주말 배달 알바라도 해보자! 주말에는 아이들과 함께 어디라도 다녀오자고 마음먹고,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늘 어디든 나들이를 다녀왔지만, 이젠 더이상 그럴 여력이 없었다. 아이들에겐 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더 미안한 일이 생기기 전에 뭐라도 벌 수 있는 벌이는 다 해봐야 했다.     


“휴우.....”     


 집 현관문 앞에 선 지훈씨는 습관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 전 자신이 꿈꾸던 집.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이들과 아내가 반갑게 맞이해주는 곳. 야근으로 늦은 퇴근을 하면 아이들은 잠들어 있고, 아내는 맛난 음식과 술을 한 병 준비해 함께 오붓한 시간을 즐기는 곳. 하루가 저물고, 날이 어두워지면 환하게 불이 켜진 집에서 맛있는 음식 냄새와 하하호호 어른들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번지는 곳. 밖에서 무엇을 하던 빨리 돌아가고 싶은 곳. 그런 곳이 바로 집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거실의 불이 늘 꺼져있는 곳.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그 누구의 웃음소리도 없는 곳. 야근을 하고 늦게 온 날은 대충 씻고 바로 잠들어야 하는 곳. 늦은 시간 조심조심 들어가다가도 아내가 깨면 혼나는 곳. 불안함과 어두움이 가득한 곳. 늘 현관문 앞에서 한숨을 쉬고 들어가는 곳. 그런 곳이 집이 되어버렸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지훈씨는 점점 버거워져가는 날들에 자신이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두려웠다. 지금처럼, 여태껏 흘러왔던 것처럼 상황이 흘러간다면, 결과는 불보듯 뻔했기 때문에, 머지않아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릴 것이 명확했기에, 그 날이 온다면 자신은 그 시간들을 견딜 수 있을지, 아내는 참아낼 수 있을지, 아이들은 얼마나 혹독한 시련을 맞이하게 될지, 그 모든 것들이 두렵기만 했다. 거센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피할 수도 없고, 함께 용기 내어 버텨줄 사람도 없이 홀로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외롭고, 무서웠다. 제발.... 아이들이 클 때 까지만이라도 무사할 수 있기를....    

 

- 띠리릭


지훈씨는 무거운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어? 평소와는 뭔가 다른 느낌! 지훈씨는 코를 킁킁거렸다.     


현관에 들어섰는데 늘 퀴퀴한 냄새가 나던 신발장에서는 향긋한 향기가 나고, 코끝을 스치는 음식 냄새! 이 시간에?! 최근 몇 년 동안 이 늦은 시간 집에서 음식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었는데? 뭐야? 그리고 캄캄해야 할 집이 밝았다. 거실의 불은 여전히 평소처럼 켜있지 않았지만, 주방의 불이 환하게 밝았다.  

   

이상했다. 기분이 묘하게 좋았다. 집에서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온기가 느껴졌다. 지훈씨는 습관이 되어 조심조심 집으로 들어갔다.    

 

“왔어?”     


아내의 목소리. 지훈씨는 화들짝 놀랐다. 이것 역시 습관처럼.     


“어? 어. 그런데.... 뭐야?”     


“뭐가?”     


“아니.....지금.. 뭐하는 거냐고?”     


“지금? 자기 야근하고 와서 먹을 거 좀 차려뒀는데. 왜? 배불러?”     


배가 부를 리가 없었다. 요즘 스트레스로 밥맛이 없어 오늘 저녁도 거른 지훈씨였다.      


“여기 소주도 한 병 사뒀는데.”     


지연씨가 김치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며 씩 웃었다. 왔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지훈씨는 뭔가 큰일이 벌어진 것 같은 불안이 엄습했다.     


“씻고 와.”     


“어? 어.”     


 지훈씨는 일단 씻으러 들어갔다. 세면대에서 물을 틀고, 손을 씻는데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의 아내가 이번에 또 무슨 말을 꺼낼지 몰랐다. 또 뭐가 필요한 걸까? 그건 또 얼마나 할까? 더 이상 돈을 마련할 곳도 없는데... 안된다고 하면 아내는 또 얼마나 화를 낼까?      


짧은 시간 씻으면서 지훈씨는 여러 가지 생각에 근심이 가득했다.     


“앉아.”     


 씻고 나온 지훈씨에게 지연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연씨의 표정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지훈씨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분명 뭔가 돈이 들어갈 일이 분명했기에!


- 쪼르르     


지훈씨가 주방의 식탁 의자에 앉자 지연씨는 미리 준비해 놓은 소주잔에 소주를 부어주었다. 식탁 위에는 지훈씨가 좋아하는 소세지야채볶음과 메추리 알 장조림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연씨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기는? 맥주 안 마셔?”     


“응. 난 당분간 술은 안 마시려고.”     


“왜?”     


“그냥.... 이제 술은 그만 마시고, 그 시간에 운동하려고.”     


아뿔싸! 이거구나! 운동! 아내 성격에 그냥 헬스장을 다니겠다는 말은 아닐테고, PT를 끊어야 한다고 말하겠지? 회당 5만원에서 10만원 정도한다고 들었는데... 아내는 10만원 정도 하는 PT를 한다고 하겠지? 아니면 그것보다 더 비싼 걸 하겠다고 하려나? 10회만 해도 100만원. 10회를 끊으면 1회 정도는 서비스로 더 해준다고 나에게 자랑을 하겠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갑자기 입맛이 싹 사라졌다.    

  

“한잔 해. 난 안 마셔도 되니까.”     


“어?... 어.”     


 지훈씨는 일단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얼마 만인가? 집에서 술을 마신 적이. 그것도 아내가 차려준 상에서. 예전엔 일상이었던 일이, 더이상 일상일 수 없게 되어버린 현실이란... 지훈씨는 자신이 겪는 현실과 예전의 일상이 머릿속에서 오버랩 되어 콧등이 시큰해졌다.     


지훈씨는 소주잔을 테이블 위에 탁 놓았다. 털어놓은 소주가 목구멍에 쓴맛을 확 뿌렸다. 지훈씨가 입을 꾹 닫고 콧구멍으로 숨을 흥 내쉬었다. 시큰해졌던 코에 뜨거운 기운이 훅 불었다. 지훈씨는 젓가락을 집으려다가 말았다. 좋아하는 안줏거리들이 식탁에 놓여 있었지만, 아내가 어떤 말을 꺼낼지 짐작이 되어 손이 가지 않았다.     


“당신이 하려는 운동 그거.... 안 하면 안 돼?”     


조용히 말을 꺼냈지만, 지훈씨에겐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다.     


“뭐? 왜? 그게 어떤 운동인지 어떻게 알고?”     


 부끄러웠다. 다른 것도 아니고, 운동을 하겠다는데, 하지 않으면 안 되겠냐고 물어봐야만 하는 현실이. 그렇지만 이제 더이상 뭔가를 해줄 수 있는 여력도 없는데, 무턱대고 운동을 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미안해....”     


지연씨는 남편이 왜 이러는지 이미 짐작했다.   

  

“걱정하지마. 돈 들어가는 운동 아니니까.”     


“어?.....어...뭐?”     


살짝 당황했다. 아니, 많이 당황했다. 아내가 돈이 들어가지 않는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는 사실에 당황했고,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당황했다.     


“그리고, 연희 치아 교정하는 거 안 하기로 했어.”     


“뭐? 아니 왜?”     


 사춘기라 교정기가 보이지 않는 인비절로 해야 한다며 6백만 원에 가까운 비용이 들어간다던 치아교정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반갑기는 했지만, 아내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뭔가 엄청난 돈이 들어갈  일이 생겨버린 것인가?!!  지훈씨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냥. 애들 커가면서 상태도 점점 달라질 텐데, 크면 자연스럽게 변할 수도 있는 거고, 보기 싫으면 다 커서 해도 되는 거니까.”     


지훈씨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데 지훈씨가 놀랄 일은 이것뿐만이 아니라는 듯 지연씨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선희 알지?”     


“응?.. 당연하지. 당신 절친.”     


“선희가 나 알바 구해줬어.”     


“뭐? 아니, 당신이 왜?!”     


이 정도 되니 지훈씨의 놀라움은 그것보다 더 큰 두려움으로 바뀌어버렸다.     


“뭘 그렇게까지 놀라? 나도 집에만 있기 갑갑해서 그런 건데.”     



“아니...그게....”     

이상했다. 여태껏 집에서만 지내던 아내가 갑자기 일을 하러 가겠다니!     


지연씨가 지훈씨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여보. 나도 이제 도울게.”     


“뭐...뭘 도와?”     


“자기 그동안 혼자서 많이 힘들었잖아. 뭐,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고,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노력해볼게.”     


 순간 지훈씨의 심장이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처럼 요란하게 덜컹거렸다. 그리고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함께. 같이. 서로. 라는 감정.      


 아내가 일하러 나가서 얼마를 벌어오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설령 나가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더라도 그것 또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지훈씨에게 중요한 것은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외롭고, 어둡고, 끝 모를 어두운 터널을 혼자 걸어가는 게 아니라, 곁에 누군가 함께 걷고 있다는 그 기분. 그것이 너무나 간절했었다.      


 모든 사람이 방관자 같았다. 그냥 방관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방관자들. 자신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를 멀리서 구경하며, 언제 무너져내릴지를 예측하며 베팅하는 방관자들. 그리고 그런 방관자들 속에 아내도 함께 있었다. 방관자들의 군중 속에 어울려 그들과 함께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 아내가 그곳에 서 있다는 사실이 지훈씨를 너무나 외롭고 지치고 힘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랬던 아내가 군중속에서 자신을 향해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함께하기 위해! 같이 하기 위해! 저쪽에서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 저쪽으로 함께 같은 곳을 쳐다보기 위해!! 그리웠다. 이 기분이.      


 지연씨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눈물에 녹아 흘러내렸다. 둘은 한동안 서로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았으나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침묵 속에서 울었다. 서로 묻지 않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흐르는 눈물 속에서 천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앉아 있다가 지연씨는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힘든 상황은 지연씨가 짐작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월급보다 생활비가 더 많이 나가니까, 그리고 그동안 생활비를 지원해주시던 시어머니도 지금은 병원에 계셔서 오히려 병원비까지 더 들어가고 있으니까. 그런데 정말 남편이 은우씨에게 돈을 빌렸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단지 공방에서 꿈을 꾼것 뿐이었다. 그 꿈이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지연씨는 이것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근데....”     


지연씨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당신 요즘 왜 은우씨하고는 연락 안 해?”     


“어....그냥....은우도 바쁘고....어? 자기 혹시 오늘 이러는 거 은우가 무슨 말 한 거야?”  

   

남편의 반응을 보니..... 꿈에서 본 내용이 사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 은우씨가 나한테 연락을 왜 해? 그냥 당신 요즘 너무 사람들 안 만나는 거 같고, 은우씨랑은 절친인데, 연락도 잘 안 하는 거 같아서.”     


“절친은 무슨....”     


 남편은 은우씨 이야기에 갑자기 뿔난 표정이 되어 소주잔에 소주를 채워 마셨다. 남편의 행동에 확신한 지연씨는 너무 궁금해졌다. 과연 그 공방에서 꾼 꿈은 뭘까? 그리고 거기 공방은 뭘 하는 곳이고, 어떤 공간일까? 공방에 대해 의아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곧 다시 찾아가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25. 꽃다발    


 - 쿠르릉!!    

 

“왁!!”     


정섭씨가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벌떡 깼다.    

 

“하아....후우.....”     


 정섭씨는 놀란 마음에 숨을 헐떡였다. 그가 놀란 건 천둥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꿈속에서 있었던 일들. 장인어른의 발인도 지키지 못하고, 보험금 내놓으라고 소리소리 지르던 모습. 애써 잊으려고 했던 그 장면을 마치 TV를 보듯 다시 보고 나니 자신이 놓쳤던 장면까지 모두 보게 되어 미칠 듯이 괴로웠다.      


죽어버릴까?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짐승 같았던 아니, 짐승만도 못했던 자신의 행동에.     


근데 이제 와서?     


죽으려면 그때 죽었어야 했다. 시간이 이렇게 지나버렸는데, 그때의 부끄러움으로 지금 죽는다는 건 너무 시간에 어울리지 않았다.     


보고 싶다.     


그 시절 여관방에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누워있던 장면을 보고 나니 아내와 아들이 사무치게 보고 싶어졌다. 그 시절 전혀 행복하다 느끼지 못했던 자신에게, 아내가 너무 행복하다 말했던 그 의미를 이젠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았다.     


근데 이제야?     


 조금 더 일찍 찾았어야 했다. 아내와 아들을. 물론, 조금 더 일찍 찾아갔다고 해서 아내와 아들이 자신을 만나줬을지 아니었을지는 몰랐지만, 홀로서기 힘들었을 아내에게, 아버지의 부재가 너무나 컸을 어린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일찍 찾아갔어야 했다.     

 

그럼...마지막으로... 한번만 만나고.... 죽을까? 아니야. 그냥 지금 이렇게 살았던 것처럼 살자. 그래도 꼭 한번 보고 싶기는 한데... 만날까? 아니, 아니. 만나고 나서 꼭 죽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염치없는 짓은 아닐까? 그놈의 염치! 있어서 이렇게 살았냐? 그래도 죽기 전에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아, 씨바! 모르겠다!! 모르겠어!!     


 정섭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비가 내리는 저녁 불이 꺼진 공방은 무척 어두웠다. 어둠을 헤치며 공방의 나무에 툭툭 부딪치면서 공방에서 나왔다.      


- 쏴아아     


 비가 쏟아졌다.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잠시 하늘을 올려다 봤다. 시원했다. 2층 계단 앞에서 1층을 내려다보니 대구탕 간판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비가 내리는 어두운 저녁이라 그런지 하얀 간판의 불이 더욱 밝게 느껴졌다. 대구탕 가게에는 브레이크타임이 끝나고 저녁 손님들로 분주했다. 정섭씨는 대구탕 매장의 꿀막걸리가 생각나서 왔지만 발길이 그곳으로 이어지지가 않았다. 

    

 그때 자동차 한 대가 들어왔다. SUV 차량에서 가족들이 내렸다. 아빠, 엄마, 아이 둘, 할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엄마는 우산을 쓰고 매장으로 들어갔고, 아빠와 아이 둘은 비를 피해 뛰어서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구탕 매장에서 들려오는 하하호호 웃음소리. 

     

정섭씨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 봤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정섭씨의 얼굴에 떨어졌다.  

   

 저들은 저렇게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고, 난 이렇게 불행하기 위해 태어난 것일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 것이다. 평소 같았다면.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나의 아내와 나의 아들은 하필이면 불행한 나를 만나 불행하게 되었을까? 저렇게 행복할 수 있는 가정에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정섭씨는 안타까웠다. 아내와 아들이. 자신의 인생이야 스스로가 저지른 잘못들로 마땅히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었지만, 아내와 아들의 잘못이라면 자신의 가족이라는 것 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대구탕 가게를 정섭씨는 멍하니 비를 맞으며 쳐다봤다. 브레이크 타임은 끝이 났지만, 밝고 환한 대구탕 가게로, 행복이 넘치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정섭씨는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대구탕 가게는 산에 있어서 한참을  걸어야 했는데, 그는 산속에 난 도로를 따라 하염없이 걸어 내려갔다. 비를 맞으며 걸어 내려가는 정섭씨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연신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한참을 걸었다. 비를 맞으며. 산에서 다 내려와 차들이 다니고, 버스와, 전철이 다니는 곳까지 내려와서도 그냥 걸었다. 터벅터벅. 몇 시간을 그렇게 걸어가던 정섭씨는 초조한 표정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했다. 짧은 통화를 하고, 전화를 끊고 나서 길가에서 무언가를 사서 품속에 감췄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어느덧 밤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한 아파트 단지 앞에서 정섭씨는 담배를 꺼냈다. 담배도 제법 축축해져 있었지만, 불이 붙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후우~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빗속으로 하늘하늘 사라지는 뿌연 연기. 


연기는 참 좋겠다. 자연스레 사라질 수 있어서. 


담배를 연속으로 두 개비나 피우고 아파트 단지 속으로 걸어갔다.   

  

 멀리서 한 여인이 우산을 쓰고 걸어왔다. 아내 아니, 전 아내. 그러니까 정섭씨의 전 부인이었던 미정씨. 그녀가 우산을 쓰고 정섭씨를 향해 걸어왔다. 정섭씨는 뒷짐을 지고 서서 물끄러미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을 쳐다봤다.    

  

“오랜....만이네?”     


정섭씨가 자신의 앞에 와서 선 미정씨를 보고 어색하게 말했다. 미정씨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는 마치 정섭씨가 비를 쫄딱 맞고 왔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라도 했던 듯 수건이 들려 있었다. 정섭씨는 물끄러미 그 수건을 쳐다봤다. 


이 여자는 어떻게 내가 하는 행동을 보지도 않고 모두 다 알까? 


여관에서 함께 살 때도 늘 느꼈던 거다.     


“닦아.”     


“응?....어.”     


 정섭씨가 수건을 건네받아 비에 젖은 머리를 닦았다. 순간 수건에서 밀려오는 향기. 그것이 어떤 종류의 세제인지는 몰랐지만, 아내와 함께 여관방을 전전하며 살 때, 늘 맡았던 그 냄새가 수건에서 퍼져와 코끝으로 밀려들었다. 모든 것들이 아련해지며 그때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향기에 스며있는 시절의 추억.


 아내와 함께 여관방에 짐을 들이던 일, 조리할 도구가 변변치 못해 가스버너를 두 개나 사서 하나는 국을 끓이고, 하나는 생선을 굽던 일, 아내가 임신을 한 몸으로 엘리베이터도 없는 여관방 3층을 오르내리던 일, 아들이 태어나고, 그 비좁은 공간에서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던 일. 당시 정섭씨에겐 그런 모든 일들이 못마땅하고, 불편하고,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날들이었는데, 수건으로 그때의 향기를 맡은 지금의 정섭씨에게 그 시절은 사무치도록 그리운 날들이 되어버렸다.     


 코끝이 찡해졌다. 정섭씨는 얼른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척 표정을 가렸다. 다행이었다. 비가 내려서.      


“잘... 지냈어?”     


 오랫동안 얼굴을 닦고, 그렇게 닦는 동안 묵묵히 기다려준 아내에게 정섭씨가 물었다. 미정씨는 대답은 하지 않고 정섭씨의 눈을 쳐다보았다.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면서까지 집에서 뛰쳐나와 살림을 차리고, 아이를 낳고 살다가 이혼을 한 여자에게 그것이 물을 말이냐는 듯.     


“장모...아니, 어머님하고 처제는?”     


 정섭씨는 빤히 쳐다보는 아내에게 민망해 눈빛을 피하며 물었다. 더는 장모가 아니었기에, 얼른 말을 수습했다.   

  

“당신 만나러 가지 말라고 하던데?”     


“뭐?! 아니, 나 만나러 나온다고 말했어?! 왜?!”     


정섭씨는 그녀들이 자신을 벌레보다 더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만나러 가니까 만나러 간다고 한 거지! 내가 거짓말까지 하면서 나와야 해?”     


“...”     


정섭씨는 닦던 수건을 아내에게 내밀었다.     

 

“그냥 들고 가. 또 비 맞으면서 갈 것 같은데.”    

 

정섭씨는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손으로 수건을 꼭 쥐었다.   

   

“뭐라고 하셔?”     


“뭐가?”     


“장..아니.. 어머님이 뭐라고 하셨냐고? 나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나가지 말라고 하지! 미친놈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고....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지 아냐고!”  

   

“....그랬구나.... 그런데 왜 나왔어?”     


“내가 언제 엄마 말 들었어? 그랬으면 당신하고 결혼도 안 했지.”    

 

아내 아니, 전 아내의 말에 정섭씨는 피식 웃었다.      


“나와줘서 고마워. 이거...”    

 

정섭씨가 품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순간 미정씨는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정섭씨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미정씨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었다.     


“자. 받아.”     


정섭씨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꽃다발이었다.      


“이게.... 뭐야?”     


“뭐긴.. 자기 좋아하는 꽃이잖아. 오는 길에 꽃집이 없어서 편의점 앞 자판기에서 샀어. 비록 조화이긴 하지만..... 자기가 좋아할 것 같아서.”      


미정씨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정섭씨로부터 꽃을 건네받았다. 순간 전해지는 서로의 온기. 그 짧은 온기. 얼마 만에 느껴보는 서로의 따스함인가.     


“며칠 전 아빠 납골당에 다녀왔어.”     


정섭씨는 뜨끔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있었기에.     


“거기 가는 길에 이렇게 적혀 있더라.”     


“뭐...라고?”     


“조화는 그냥 플라스틱 쓰레기라고.”   

  

정섭씨의 얼굴이 순간 화끈거렸다.     


“...어?..어...그러니까..그게....”     


정섭씨는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버벅거렸다. 아, 씨. 조금 더 발품을 팔아서 생화를 사왔어야 했나? 그런데 이 시간에 파는 곳이 있었을까?     


“근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조화를 만드는데도 누군가의 정성이 들어가잖아? 그렇게 정성이 들어간 물건을 쓰레기라고 부르는 건 너무 무례한 일인 것 같아.”     


아내의 말에 정섭씨는 그래서 지금 이 꽃다발이 어떻다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고마워.... 처음이네? 당신한테서 꽃다발도 다 받아보고... 당신 아는 형인가? 그 사람이 꽃으로 맞을 뻔 했다면서 꽃다발 한 번도 안 사왔잖아.”    

 

 부끄러웠다. 아는 형의 이야기를 그렇게 써먹을 필요는 없었는데.     


 현장에서 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린 정섭씨에게 함께 일하던 형 한 사람이 말했다. 결혼기념일이라 꽃을 선물했는데, 아내가 다음부턴 돈으로 들고 오라고, 꽃 사들고 오면 꽃으로 맞을 줄 알라고 했다고. 여자들은 무조건 꽃보단 돈이라고. 그래서 아내에게도 꽃을 선물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꽃 대신 돈을 이벤트처럼 건넸던 적도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준 것이 없었다. 그 형의 경험을 빌미로 꽃 선물을 하지 않았을 뿐. 

    

“그래도 난 꽃이 좋은데.”     


“아직 니가 어려서 그래. 세상을 몰라서. 돈이 최고지!”     


당시 아내의 말에 정섭씨는 언제나 돈. 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꽃은 왜?”     


“....그냥.. 오늘은 꽃이 계속 눈에 띄어서....”     


 정섭씨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먼 여행을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바로 이것이었었다. 마음을 먹었다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지만 해주지 않았던 것. 소박하지만 그 어떤 화려하고 호화로운 것들보다 진심이 담겨 있는 것. 이 꽃다발 하나를... 비로소 떠날 결심을 하자 꼭 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너무나 큰 비용이 들거나,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해서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 그냥 하지 않은 일이었다.     


“용건은?”     


“....용건?....”     


“그래. 당신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 시간에 나를 이렇게 찾아왔을 이유는 없잖아.”     


 아내의 말에 정섭씨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구나. 지금까지 아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용건? 용건은 없었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싶었고, 그래서 비를 맞으며 여기까지 찾아왔지만, 그것이 이유는 될 수 있어도, 용건이 될 수는 없었다. 

 

“...저기....그게....”     


“...?....”     


마땅한 핑곗거리가 생각나지 않은 정섭씨는 궁색한 질문을 던졌다.    

 

“아, 그...아버님 보험금 말이야...”     


정섭씨의 말에 아내의 표정이 금세 싸늘하게 바뀌었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니가 인간이니? 라는 표정. 


혐오와 경멸의 표정이 아내의 얼굴에 나타났다.     


“아! 진짜 저어어엉~~말 오해하지 마! 난 그 보험금 아무런 생각도 없어! 진짜! 진짜야!”     


아내의 변하는 표정을 보며 정섭씨는 본인이 꺼낸 이야기에 스스로도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럼 뭔데? 그걸 왜 묻는 건데?”      


“아니....그러니까 아버님 돌아가시고...보험금으로 말이야.... 더 크고, 좋은 집으로 얼마든지 이사를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아직까지 여기 이렇게 살고 있는 건지 궁금해서.....”     


“휴우.....”     


미정씨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정섭씨를 딱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왜? 여기 집이 어때서?”    

 

“.....”     


 정섭씨는 대답할 수 없었다.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 그렇다고 해서 안 좋은 아파트라고 말하기엔 본인 스스로는 여관방을 전전하는 처지라 말하기가 좀 그렇고..... 참 애매했다.    

  

“더 크고,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면... 행복해지니?”     


미정씨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나한텐.... 아무리 크고, 넓고, 좋은 집도... 당신하고 명현이하고 함께 지냈던 그 여관방 한 칸 보다 못해.”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내의 말을. 그런데 지금 아내가 건넨 수건을 한 손에 들고, 비를 맞으며 듣는 이 순간에, 아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섭씨는 너무나도 가슴 아리도록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미...안해.”     


정섭씨의 목소리도 떨렸다.     


 미정씨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정섭씨는 미정씨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아 손에 쥐고 있는 수건만 더욱 힘주어 꽉 쥐었다.  

   

“갈게.”     


정섭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뭐?..오늘 왜 왔는데? 무슨 용건이 있을 거 아니야?!”     


“용건은 무슨.... 그냥 왔다니까.”   

  

정섭씨의 말에 미정씨는 불안이 엄습했다. 이렇게 꽃만 건네기 위해 올 사람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잘.... 지내.”     


 정섭씨가 돌아섰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빠르게 돌아섰다. 돌아서자마자 걸었다. 빗속을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뒤에서 미정씨가 외쳤다.     


“살아!!”     


정섭씨가 걸음을 멈췄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 쏴아아아     


세차게 비가 쏟아졌다.     


“세상 어디에 있든, 살아! 비겁하게 도망치려 하지 말고! 당신은....”     


미정씨가 울먹였다.     


“당신은... 나하고 명현이한테는.... 하늘이니까! 폭풍이 몰아치고, 비바람이 쏟아지는 지랄맞은 하늘이라도.. 하늘이니까! 그러니까... 어디서든... 어떻게든 살아!.. 하늘이 없는 세상은 없잖아.... 그 하늘 마저 없앤다면 당신은.... 정말.. 나하고, 명현이한테 지금까지 잘못한 것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거야!!”     


 뒤돌아 서 있는 정섭씨의 어깨가 심하게 들썩였다. 수건으로 얼굴을 감쌌다. 수건에서 아내의 냄새가 났다. 좁디좁은 세 사람의 여관방 냄새가 났다. 수년 만에 만났어도, 우산을 안 쓰고 왔을 거란 걸 알고 수건을 들고나온 아내였다. 정섭씨의 수상한 행동에, 아내는 그가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도 알아채고 말았다. 


정말 못났다. 나란 인간은. 끝까지 아내에게 실망만.......      


아내의 마지막 말이 정섭씨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실수투성이 인생이었다. 그래서 아내와 아들에게 지금까지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그들의 인생에서 조용히 사라져 주는 것이 그나마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는 그것이 더 큰 잘못이라 말하고 있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미정씨는 우산을 쓴 채로, 정섭씨는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은 채로 서로 거리를 두고 한참을 서 있었다. 밤은 더욱 깊어졌고, 비는 그칠 줄 몰랐다. 뒤돌아선 정섭씨의 어깨는 한없이 들썩였다.      


26. 행복하라! 지금!     


 정부장은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기 전 길게 한숨을 쉬었다. 주차장 한쪽에 회사의 자문 변호사인 황변호사의 차량이 보였다.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 각서.. 아니, 변호사가 와 있으니 공증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내가 다 감당할 수 있을까? 그 큰 돈을. 아내에게는 뭐라고 말하지? 


어제 술을 마시며, 홍사장에게는 큰소리를 쳤지만 걱정이 태산이었다.     


 정부장이 회사 사무실로 들어가자 직원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부장님! 역시! 그만두신 거 아니시죠? 다들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아세요?”     


“어? 어...그게...”     


 정부장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말을 망설이는데, 고과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부장을 쳐다보며 다가왔다.     


“뭐에요? 그만둔 거 아니었어요?”     


 누구 때문에 지금 이 사달이 났는데, 말하는 모양새가 영 싸가지가 없었다. 정 부장이 회사에 안 나와도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던 고과장이었다. 그제야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제 와 고과장 저 새끼가 저지른 일인데요? 라며 고자질을 하기엔 정부장은 너무나 사람이 좋았다.      


“어....”     


말을 망설이는데 그때 홍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뭐 해?! 어서 들어와!”     


“아, 예!”     


 홍사장은 회의실 입구 앞에 서 있다가 정부장이 허둥지둥 뛰어오자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실 안에는 황변호사가 앉아 있다가 정부장이 들어오자 일어나서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뭐지? 여태껏 황변호사가 나한테 이렇게 정중했던 적은 없었는데? 빚 갚으라는 종이에 사인하지 않을까 봐 저러나?     


“아, 예. 안녕...하세요?”     


밝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황변호사와는 반대로 정부장은 머뭇거리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저쪽에 앉아.”     


 홍사장이 정부장에게 황변호사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거기엔 서류 몇 장이 놓여있었다. 정부장이 그곳으로 가서 앉았다.     


“정부장은 거기 사인해. 황변은 정부장한테 설명하고.”     


 빚 갚으라는 얘기를 무슨 미사여구로 포장하려고, 설명까지..... 


정부장은 자신이 책임을 진다고 했기에 회사에 오긴 왔지만,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 피할 생각은 없었다. 홍사장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했지만,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외로워서 저런 걸 거라고 생각하기로 노력했다.      


“휴우.....”     


 길게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내려다 봤다. 


금액이 얼마나 되려나? 


빚이 얼마나 될까 걱정이 가득한 눈에는 글보다 숫자가 먼저 들어왔다. 뭐야? 1억5천? 물론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우성과의 거래에서 3차까지 납품만 해도 발생하는 손실이 1억8천이었다. 다른 비용까지 합하면 2억은 훌쩍 넘는 액수가 될 것이었고. 정부장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적은 금액이었다. 


뭐지? 그래도 양심은 있는 건가? 정부장이 순간 고개를 들어 홍사장을 쳐다봤는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홍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어색했다. 사장과 직원이 아닌 채권자와 채무자의 눈맞춤이란. 

    

 정부장은 얼른 고개를 숙여 다시 서류를 봤다. 숫자를 먼저 확인했으니, 이번엔 글자를 확인할 차례였다. 서류엔 채무자.....란 말은 없었고, 연봉? 이.....이게 뭐야? 대표이사 정.대.운 어? 뭐?!! 뭐야? 도대체!! 


정부장이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홍사장을 쳐다보는데, 황변호사가 말했다. 

    

“네. 그럼 지금부터 대표이사 변경 건에 대한 짧은 설명을 드리고, 절차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홍사장의 회사는 주식회사였다. 소규모 회사라 100퍼센트 지분이 홍사장에게 있었고, 감사나 임원들도 모두 친인척이었기에 홍사장의 결정이 곧 회사의 결정이었다.    

 

“이....이게 뭐, 뭡니까? 사장님?”     


“형님이라며?”     


“아, 형니......아니, 이게 아니지!! 지금 그런 말장난할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도대체 이게 뭐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놈이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어?!!”     


홍사장이 소리를 지르자 황변호사가 중재를 했다.     


“자자, 진정들 하시구요. 정부장님. 홍사장님께서는 정부장님이야말로 회사를 이끌어갈 적임자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제가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금 저기 저 사장님이 저를 얼마나 싫어하시고 멸시하시는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장님?!”     


정부장이 홍사장에게 손가락질을 해가며 외쳤다.    

 

“아... 진짜 이 자식 이거는 끝까지... 여튼... 할 거야 말 거야?!”     


“뭘요?”     


“회사대표!”     


“그야!..... 하면.... 좋죠. 그런데 도대체 왜요? 영문은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그리고 제가 대표를 하면, 그럼? 사장님은요? 어디가세요? 혹시, 벌써 은퇴를 하실 건가요?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해가 안 되잖아요. 회사에서 가장 싫어하던 저를.... 사장님이 좋아하시는 엘리트들도 수두룩한데.... 그 사람들을 다 놔두고 저를...아!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그냥... 장난치는 거 맞죠?!”     


정부장의 말에 홍사장이 한숨을 크게 쉬고 말했다.     


“그냥 정부장이 이제부터 회사 대표해. 우리회사에서 제일 오래 근무했잖아.”     


“그건... 그렇죠. 그렇다고 대표 자리를 그냥 주시는 건가요?”     


“그래. 난 자식들한테 회사 막 물려주고 그런 것 싫어. 우리 애들 중에서도 아무도 이 회사 맡아서 하고싶어하는 녀석도 없고. 그러니까 정부장이 맡아서 해. 그리고.... 나 암이야. 이제 얼마 못살아.”     


“예에?!!”     


 정부장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난 이제 내일부터 회사에 안 나올 거야. 정리할 것들도 좀 있고, 몸에 통증도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서.”    

 

“아니! 도대체!! 왜 말씀 안 하셨어요?!!”   

  

정부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따져 물었다.     


“뭘 말 안 해? 어제 말했잖아?”     


“어제 언제요?!”     


“너 때문에 암보다 혈압으로 먼저 죽겠다고 했잖아!”     


“....?....”     


“그러니까 너 나보고 혈압 있냐며?”     


순간 어제 횟집에서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야.... 사장님이 저랑 이야기만 하면 암 걸릴 것 같다고 하시면서 늘 암을 입에 달고 사셨으니까 그러려니 했죠.....”     


홍사장은 평소 자신의 언행이 눈앞에 선해 뜨끔했다.     


“뭐.....내 말이 씨가 되긴 했네. 어쨌든 그리됐으니까 그렇게 알아. 그리고.... 그동안 고생 많았어. 앞으로도 더 고생 좀 하고. 회사 잘 이끌어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홍사장을 쳐다보던 정부장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크흡....”     


“뭘 그렇게 울고 호들갑이야?”     


“크흐흑.... 으아아아앙!!!”     


 정부장은 울음을 참다, 참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지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우렁차게 울어버렸다. 회의실 밖에서 직원들이 웅성거리며 회의실 쪽으로 난 창을 쳐다봤다.     


“황변. 블라인드 좀.”     


“아, 네.”     


 홍사장의 말에 황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블라인드를 내렸다. 내려가는 블라인드 밖으로 비치는 사람들의 시선. 그들은 홍사장이 정부장에게 엄청난 잔소리를 퍼부었거나, 줘 팼나보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계속 그렇게 울거야?!”     


“흐어어엉.....죄...죄송해요 사장님....끄흑......그런데....눈물이... 멈추질 않아요....흐흑.....으앙!!”     


홍사장은 정부장이 우는 모습을 계속 쳐다보다가 말했다.     


“우는 모습도 참 밉상이다....무슨 애야? 내가 지금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너 우는 모습이나 보면서 시간을 보내야겠어?”     


 홍사장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부장은 계속 울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걸 왜 이제 말해줘가지고.     

“어휴....”     


 정부장이 한참을 우는 동안 홍사장은 여러 생각들을 했다. 저렇게 여린 사람에게 회사를 맡기는 것이 정말 잘하는 일인지. 아내와 자신이 힘들게 여기까지 이룬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회사를 좀먹는 인간은 없는지.....어? 좀먹는 인간? 맞다! 회사를 유익하게 만드는 직원도 중요하지만, 회사를 좀먹는 인간을 골라내는 것도 중요했다.     


 홍사장은 자신이 공방 2층의 꿈속에서 봤던 내용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속의 일일뿐. 아직 현실에서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었는지 확인을 해보진 못했다. 홍사장이 정부장을 슬쩍 떠봤다. 다행히(?) 홍사장이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정부장의 마음도 어느 정도 가라앉아 울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오늘 내가 정말 각서 쓰라고 부른 줄 알았어?”     


“....네.....”     


“근데, 이게 정부장이 각서를 쓸 일이야?”    

 

“.....네?....”     


“왜 남의 잘못까지 다 정부장이 떠안으려고 하는 거냐고. 그게 정말 부하직원을 위하는 거라 생각해?”     


“....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정부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납품단가 그거. 고과장이 그랬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홍사장은 혹시나 하면서 정부장의 반응을 살폈다.     


“아, 아니! 그걸 어떻게?!..... 혹시 고과장이 말했습니까?”     


정부장의 반응을 보니. 꿈에서 본 내용은 사실이었다. 홍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놈이 말했겠어? 정부장이 덤터기 썼다고 좋아하고 있었겠지...... 지금까진.”     


정부장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서 놀라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도대체 그 공방은 뭘 하는 곳이지? 나의 지난 시간들과, 내가 보지 못했던 그 시간들을 어째서 난 그곳에서 보게 되었을까?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친 일들을 그곳에서 창을 통해 봤고, 지금처럼 그렇게 창을 통해서 봤던 일들은 꿈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홍사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난 가볼 때가 있으니까, 나머진 황변하고 정부장 둘이서 알아서 해.”     


“예? 아니.... 갑자기 어딜 가신다고...”     


정부장이 퉁퉁 부은 눈으로 홍사장을 따라 일어섰다.     


“따라 나오지 말고, 그거 서류 작성 마저 해!”     


“예? 아...예.”     


홍사장이 서둘러 회의실을 나서며 문을 닫아버렸다.     


정부장은 도대체 뭐가 뭔지 어리둥절해서 멍하니 서 있었다.    

 

“자, 여기 서류를 보시면서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황변호사가 정부장에게 말하자 정부장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인상을 구기진 않았지만, 이렇게 밝은 얼굴을 보인 적이 없는 황변호사가 오늘따라 깎듯이 행동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황변호사님.”     


“아이구. 대표이사님이 되실 분께서..... 그냥 홍사장님처럼 황변이라고 짧게 불러주시면 됩니다. 길면 불편하잖아요.”     


“아...네. 그렇게 할께요. 황변...... 근데.... 장이 굉장히 튼튼하실 것 같은 호칭이네요. 헤헤.”     


정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에 머쓱해 어색하게 웃었다.    

 

“네? 아....하하하하하!! 아이쿠. 새로 취임하실 대표님께서는 유머감각도 있으시네요. 그래도 설변 아닌 게 어딥니까? 하하하하!!”     


 황변호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농담을 던지고 일부러 크게 웃었다. 그런데 그게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정부장은 황변호사의 이야기를 듣고, 서류에 서명을 하면서도 사장님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하는 궁금함으로 가득했다.          




 아내와 헤어져 여관으로 돌아온 정섭씨는 며칠을 앓았다. 몸이 아파 앓았고, 마음이 아파 앓았다.     


“형. 일 안 할거에요?”      


영준이 전화를 걸어 물었다.     


“나 아파.”     


“또 술병 났어요?”     


“하아... 이 새끼가.. 나 지금 농담할 상태가 아니다.”     


“언제 상태 좋았던 적이 있었나?”     


 평소 같으면 정섭씨가 또 한바탕 퍼부어 줬을 텐데,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운이 없어 그냥 끊었다. 정섭씨는 자신의 지난 일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보지 못했던, 아내가 겪었을 그 시간들에 대해서도. 처음이었다. 아내가 어떻게 살았을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것은. 어쩌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여태껏 외면해 왔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려면 늘 그랬든 술로 재워버렸다. 생각을 재웠고, 스스로를 재웠다.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에...      


 그렇게 외면했던 시간들을 대구탕 가게의 2층 공방에서 보게 되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그렇지만 너무나도 생생한. 뭐지? 뭘까? 그 가게는 도대체 뭐하는 곳이지?   

  

정섭씨는 이불을 팍 걷어찼다.      


“아야...”     


 온몸이 뻐근하게 뼈 마디마디가 쑤셨다. 오늘 같은 날은 계속 누워 있어야 했다. 몸이 아프니까. 그게 맞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시 그 공방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있는 게 분명해! 

    

정섭씨는 얼른 옷을 걸쳐 입었다.     


 대구탕 매장 앞에 도착하니 몇 대의 차가 서 있고, 그 사이로 냉동탑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대구탕 사장이 거래처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거래명세서 여기 있습니다. 크~~ 이것 보십시오! 명세서가 이렇게 깔끔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동안 미수금이 쫙 깔려 있어서, 명세서가 지저분했는데, 오늘 이렇게 정리를 다 해주셔서 명세서가 깔끔하니, 너무 아름답습니다! 하하하!!”    

 

“사장님이 가져다주시는 매끈~한 대구만큼이야 아름답겠습니까? 아하하하!!”     


둘은 크게 웃었다.     


 뭐지? 저 븅신들은? 이상한 대화를 주고받는 대구탕 사장과 거래처 직원의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렸다. 냉동탑차가 출발하자 정섭씨가 대구탕 사장에게 다가갔다. 그런 정섭씨를 보며 대구탕 사장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 안녕하세요?”     


“아...예. 저기 뭐 좀 물어보려고.....”     


“그런가요? 2층으로 올라가실래요? 먼저 오신 분들이 계셔서. 저도 곧 올라가겠습니다.”   

  

“....?....”     


대구탕 사장은 바쁜 듯 가게로 휙 들어갔다.     


뭐야? 내가 무슨 말을 물어볼지 알고? 그리고..... 먼저 오신 분들?     


정섭씨는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으로 올라가자 오늘따라 유난히 맑은 파란 하늘과 푸른 숲이 울창한 산이 눈에 들어왔다. 테라스에 놓인 탁자와 의자도 운치가 있었다.    

  

이야~ 이런 테라스에서 진짜 술 한 잔......    

 

 정섭씨는 지난번과 똑같이 입맛을 다시며 공방입구를 향해 다가갔다. 입구의 현판에 쓰여있는 시간을 달리는 공방이라는 글자가 눈을 찌르듯 달려들었다.정섭씨는 순간 몸을 뒤로 젖히며 화들짝 놀랐다.  

    

뭐야?!!     


그런 생각을 해서 그런지는 몰랐지만, 이상하게 그 글자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정섭씨는 현판과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듯 잠시 노려봤다가 공방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지난번처럼 나무 냄새가 훅 풍겨왔다. 공사장의 토루판 냄새와 비슷해 익숙하고, 친숙한 냄새. 그래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냄새. 킁킁? 그런데, 이건 무슨 냄새지? 조금은 이질적인 냄새가 섞여 있어 정섭씨가 코를 벌렁거렸다. 


기름 냄새?     


저쪽을 보니 화이트보드 근처에 몇 명의 사람들이 앉아서 나무에 뭔가를 칠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구탕 사장이 말한 먼저 오신 분들인 모양이었다. 정섭씨는 어슬렁거리며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나무에 오일을 바르고 있었다.    

 

그들도 정섭씨를 발견하고는 서로 짧은 눈인사를 교환했다.     

 

“나무도마를 만드시나 봐요?”     


“아, 네. 이제 오일만 바르면 완성이에요.”     


그들 중 한 여자가 말했다.     


 정섭씨는 현장에서 오래 일했기에 나름 나무에 대해서 좀 안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그래서 아는 척을 좀 하고 싶었다.     


“딱 보니 오크나무네요. 단단해서 도마로 만들기에 딱 좋죠. 탁!탁!탁! 칼질하면 손맛도 크~~”     


“오크나무는 맞는데, 오크나무를 칼질 도마로는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어느새 올라왔는지 대구탕 사장이 정섭씨 뒤에 서 있었다. 정섭씨는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예? 아니, 왜요? 지금 이거 도마 만드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도마 만드는 거. 근데, 칼질도마가 아니라, 플레이팅 도마로 쓸 거예요. 오크나무는 단단하지만 탄닌성분이 많아서 칼질하면 줄이 쫙쫙 그여서 보기 싫거든요.”     


“뭐....뭐요? 플.....뭐?”     


대구탕 사장이 살짝 웃었다.      


“뭐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저쪽 자리에 앉으세요.”    

 

 대구탕 사장이 한쪽 빈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정섭씨는 그곳으로 걸어가며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그리 중요한 게 아니면 그냥 넘어가면 되지. 뭐하러 사람 쪽을 줘?   

   

정섭씨가 풀썩 의자에 앉자, 대구탕 사장이 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오신 것을 보니 이제 때가 되었나 봅니다. 다들 오늘 여기 왜 오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물론 궁금한 것도 많을 거구요. 하지만, 저는 거기에 대한 대답을 지금 드릴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말을 여러분들이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바로 홍사장, 주경씨, 지연씨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아온 정섭씨였다. 이들은 모두 꿈속에서 2층 공방의 창으로 봤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줘 소름 돋았던 현상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대구탕 사장은 이런 그들에게 2층 공방에서 만들던 도마를 마저 만들고 있으라고 했다. 조금 전 대구탕 사장의 말에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겪었을 거라 서로 짐작했다.     


“저기.... 허선생. 우리가 허선생의 말을 믿을지, 믿지 않을지는 들어봐야 하지 않겠소?”     


홍사장이 물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시지 마세요. 내일 이곳에 오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내일....이요?”    

 

주경씨가 물었다.     


“네. 내일 여기에 와보세요.”     


“그럼... 뭐가 있는데요?”    

 

이번엔 지연씨였다.     


“그건 와보면 알겠죠?”     


대구탕 사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거 참! 그냥 말하면 될 텐데, 뭐 그게 어렵다고!”   

  

정섭씨가 버럭했다. 하지만 대구탕 사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는 이만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좀 있으면 점심시간이라서요. 식사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저기.... 여기 오신 분들의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만약 저와 비슷한 경우라면... 우리한테는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요. 뭐라도 좀 말씀을....”     


주경씨가 점심식사를 준비하러 가야 한다는 대구탕집 사장의 말에 조금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저한테도 점심식사 준비를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인데요?”     


“사장님이 점심장사를 해서 얼마를 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벌어서 재벌이 될 것도 아니고, 그냥 이야기 좀 나누면 안 됩니까! 우리도 여기 손님이잖아요?!!”     


정섭씨가 언성을 높였다.     


“아,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돈을 버는 것.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저에게는 점심식사 준비를 하고, 판매를 하는 그 행위 자체가 더 중요한 일이고, 행복한 일입니다. 단순한 금전적 보상과 비교할 수 없는 일이죠.”      

“그럼 돈은 못 벌어도 된다는 말입니까? 그런 말 하는 사람치고 돈 욕심 없는 사람 없던데?”  

   

정섭씨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왜 이것이 아니라고 하면 저것이라고 생각을 하시는 거죠? 저는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다고 분명히 말씀을 드렸는데... 일을 하는 그것 자체로 행복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말이 돈을 못 벌어도 된다는 말로 해석이 되는 건가요?”     


“...”     


 정섭씨가 조금 전 대구탕 가게 사장이 했던 말을 되짚어보자 분명 그렇게 말을 하긴 했다. 


그런데, 돈보다 판매하는 행위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잖아? 분명히? 그게 돈보다 더 중요하다는 건 가식적이잖아? 완전 재수 없어!     


“그쪽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물어보죠. 만약 돈을 벌지 못했다면, 내가 어떤 노동을 했더라도, 가치가 없는 거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정섭씨는 따져 묻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엄숙하게 느껴져 입을 꾹 다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건부로 행복을 찾죠.”     


“조건부.... 행복이요?”     


“네. 그러니까 이런 거요. 사업이 번창하면 행복하겠다. 우리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행복하겠다. 취업을 좋은 곳에 하면 행복하겠다.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하겠다. 크고 넓은 집이 있으면 행복하겠다. 고급 차가 있으면 행복하겠다. 남들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행복하겠다.”     


대구탕 사장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며 이야기하자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얼굴이 빨개지며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원하는 것을 얻으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원하는 것을 얻으면 정말 행복할까요?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 중에 한때 원했던 것들은 없었나요? 그런데 그것으로 지금 행복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나요? 이 순간 원하는 것을 언젠가 얻으면, 그것 또한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처럼 가치가 없어지고, 행복한 마음도 사라지지는 않을까요?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걸 원하게 되고, 그 새로운 걸 얻으면 행복해지겠다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     


행복해지세요. 지금 이 순간. 충분히 가졌어요. 여러분들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가졌어요. 행복을 계속 미루지 마세요. 지금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은 평생 행복할 수 없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만들던 도마는 오늘까지 다 만들어서 들고 가세요. 내일 가져가시진 못할 테니까요. 오늘은 얼마든지 공방을 사용하셔도 괜찮습니다.”   

  

 오늘은? 대구탕 사장은 아리송하게 말을 남기고는 1층으로 내려갔다. 다들 멀뚱멀뚱 서로의 얼굴을 쳐다만 볼 뿐이었다.     





 다음 날. 홍사장은 점심시간이 되어 대구탕 매장으로 향했다. 다음날 오면 알 수 있을 거란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너무 궁금했다. 만약 오늘도 꿈에서 봤던 그 현상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어떻게라도 알아낼 생각이었다.     


 홍사장이 대구탕 매장 앞에 도착하니 어제 2층 공방에서 봤던 여자 둘과 남자 하나가 바깥에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경씨, 지연씨, 정섭씨였다. 홍사장이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인사를 하니, 정섭씨가 홍사장에게 들어가 보라는 몸짓을 했다. 홍사장은 무슨 일이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며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어?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어서오세요? 뭔가 이상했다. 거기다 목소리도 평소 듣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홍사장이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니 어떤 아주머니 한 명이 서 있었다. 홍사장이 멀뚱히 그녀를 쳐다보고 서 있자 그녀가 홍사장에게 물었다.     


“안 들어오세요?”     


“예? 아......예. 들어가야지요.”     


홍사장이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혹시.....”     


“뭐요?”     


“여기 새로 일하러 오신 분.....”     


“누구요? 저요?”     


“네.”     


“허이구. 참나. 오늘 다들 왜 이러실까? 나 여기서 언니하고 둘이서 장사한 지가 10년은 더 되었수다.”  

   

“뭐, 뭐요?!!”     


“오늘 도대체 뭣 때문인지 몰라도 다들 그쪽하고 똑같이 물어보고, 똑같이 놀라던데, 도대체 왜 그런 거유? 나도 이유나 좀 들어봅시다!”     


“지, 지금 농담하는 건 아니시죠?”     


“뭐라구요? 아니, 당신들이야 말로 나한테 오늘 떼로 와서 장난치는 거 아니죠? 왜들 이래요? 누가 시켰어요? 아침부터 여기 와서 요상한 소리나 하라고?”     


 홍사장은 망치로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다시 밖으로 나왔다. 


홍사장의 표정과 밖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똑같았다. 홍사장도 그들의 곁으로 가서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대구탕 간판을 보니, 간판은 그대로였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가 도대체 뭘 본 거죠?”     


주경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다.     


정섭씨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서 봤다. 분명 날짜는 그대로였다. 

    

“다른 모든 곳의 시간은 그대로인데, 여기만 시간이 다르게 흘러버릴 수가 있나? 이 건물만?”     


다들 이 기괴한 현상에 대해 저마다 나름의 이야기들을 쏟아냈지만, 이야기를 할수록 더욱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2층엔 올라가 봤소?”     


홍사장의 말에 다들 경황이 없어 아직 2층에 올라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어제만 해도 깔끔했던 2층 테라스가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 무척 낡아 있었고, 오래되어 삭은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무성했다. 홍사장을 비롯한 일행들은 하루 만에 변해버린 테라스의 모습을 보고 입을 턱 벌리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어...어떻게 이런 일이.....”     


 주경씨는 친구 선희와 앉았던 탁자와 의자에 다가갔다. 이젠 너무 낡아 앉으면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정섭씨는 2층 공방의 입구로 다가갔다. 현판이 삐딱하게 걸려 있었는데,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다. 정섭씨가 먼지를 털어내려 훅 불자 먼지가 일어나며 정섭씨 얼굴을 확 덮었다.    

 

“에헤이! 켁! 켁!”     


정섭씨는 먼지를 뒤집어 쓰고 콜록거렸다. 뿌옇게 일어난 먼지가 공기중으로 옅게 흩어지자 현판에 쓰인 글자가 희미하게 나타났다.     


- 시간을 달리는 공방     


현판 앞에서 네 사람은 한동안 그 글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진짜..... 였나? 시간을 달린다는 게....”     


지연씨가 나직이 말했다.     


끼이익.     


 정섭씨가 얼굴에 덮어쓴 먼지를 툭툭 털면서 공방의 낡은 문을 열었다. 공방에도 오랜 시간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듯 먼지가 자욱 했고, 곳곳에 거미줄이 쳐 있었다. 오래된 공방에서는 신선한 나무 냄새가 아닌, 쿰쿰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일행들이 공방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나무바닥이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그들은 각자가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공방 이곳저곳을 천천히 둘러봤다. 오래된 창문. 꿈속에서 시계가 걸려 있었던 창문 위의 벽. 바로 어제까지 앉아 있었던 자리와 의자들. 눈으로 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쌓여있던 나무 자재들은 대부분 사용을 한 것인지 사라지고 없었다. 공방을 둘러보던 홍사장의 눈에 한쪽 구석에 떨어져 있는 목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홍사장이 천천히 허리를 굽혀 목판을 집어 들었다. 뿌옇게 먼지가 앉은 그 목판에 글자가 쓰여 있었는데, 앞부분은 먼지가 조금 덜 앉아 글을 볼 수 있었다.     


- 타인의 시간....     


어? 이건 저번에 봤던 건데?     


 홍사장은 얼마 전 공방에 왔을 때 쓰다만 글이 있는 목판이 생각났다. 먼지가 묻은 목판을 후~ 불려고 하다가 조금 전 정섭씨가 당한 일이 생각나, 그냥 옷 소매로 슥슥 닦았다. 모두 다 닦자 지난번 미완의 글이 마침내 완성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타인의 시간을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시간만을 보려 하고, 다른 사람의 시간을 보기 위해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홍사장은 어제 대구탕 사장이 오늘 와보면 알게 될 거라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홍사장은 그것을 어제 자신들이 모여 앉아 있던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정섭씨, 주경씨, 지연씨 그리고 홍사장은 목판을 보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로부터 한 달이 흘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공원묘지에 운구행렬이 지나갔다. 내리는 빗속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우산을 쓰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우산 없이 비를 그대로 맞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장례가 끝나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모두 자리를 떠나고 마지막 남은 한 사람. 우산을 쓰지 않고, 계속 비를 맞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얼마 전엔 정부장. 이제는 정사장이었다. 정사장은 눈물을 흘리며 빗속에 한참을 서 있다가 천천히 걸어가 앞에 세워진 묘비에 흐르는 빗물을 슥 닦았다.     


홍.유.인. 묘비에 쓰인 글자.     


 홍사장의 무덤이었다. 눈물을 빗속에 섞어 흘리던 정사장이 홍사장의 이름 아래에 쓰인 묘비명을 보고선 피식 웃었다.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그리고 보통의 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신은 지금 나의 배 위쪽 근처에 서 있는 것이다. 너무 놀라진 마라. 나처럼 죽을 수도 있으니까. 놀랄 시간에 행복해라. 이곳이 아닌, 그곳에 있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조건은 모두 갖췄으니. 더이상은 행복을 미루지 마라.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묘비명을 되새기고, 되새기던 정사장은 마침내 묘비에서 등을 돌리고 빗속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홍사장의 마지막 지시를 따르기 위해서. 행복을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행복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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