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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Apr 20. 2023

건널목 앞에서 그와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도망쳤다.

이팝나무꽃과 조팝(반드시 입으로 소리 내 본다) 나무꽃이 팡팡 터지는 요즘. 죽순이 쑥쑥 올라오는 요즘. 등나무꽃이 주렁주렁 피는 요즘. 걸으러 나간다.     

산책하는 강아지의 발아래가 새까맣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면 산책을 자주 하는 행복한 강아지인 것 같아서 다행이고 무엇보다 귀엽다. 그 작은 발이 까맣게 될 때까지 어디를 그렇게 다녔을까.      


위치추적장치를 달고 있는 따오기를 발견했다. 따오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지만 나는 보자마자 이 아이가 따오기인 것을 알았다. 이 희귀한 새는 정말이지 저를 신기해하는 이들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먹이를 찾느라 기다란 부리를 풀숲에 넣었다 뺐다 분주히 움직인다. 그래 먹고사는 일은 중요하지. 따오기야.   

  

덩치가 엄청나게 큰 남자와 그 남자의 1/3 크기쯤 되는 작은 여자. 그런 커플의 조합을 보면 도대체 섹스는 어떤 체위로 할까 상상하고 머리를 도리도리 휘저으며 방금 한 상상을 지우려고 애쓴다.      


양손에 포장한 먹거리를 한가득 들고 바쁜 걸음으로 걸어가는 아저씨. 음식이 식기 전에 먹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얼굴에 스며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알까?      


사실 나는 산책을 빙자하고 빵을 사러 가던 참이었다. 한 시간이 걸려서 도착한 빵집에는 내가 먹고 싶었던 빵이 모두 소진되었지만 나는 오히려 안심했다. 이젠 빵이 먹기 싫어졌기 때문에.     

 

까만 옷을 입고 까만 가방을 메고 까만 뿔테를 쓴 청년들이 근처에 중고서점이나 헌책방이 있는지 묻는다. 이 근처에는 없다고 말해주고 다시 가던 길을 가는 내게 다시 쪼르르 달려와서는 근데, 학생은 예체능 같은 계열에서 일하면 잘 될 것이니 꼭 시도해 보라고 했다.     


고마워 도를 아는 청년들. 나 비록 42살이지만 힘을 내서 한번 도전해 보도록 할게. 조금 의기소침하던 중이었는데 덕분에 힘이 나네.      


실은 아까 집에서 나와서 두 번째 건널목을 건널 때 신호등에 내려앉은 까마귀가 뭔가를 쑤셔 넣는 걸 구경하다가 바로 앞에 그 사람이 있는 걸 미쳐 보지 못했거든. 근데 핸드폰을 보고 있던 그 사람을 보자마자 내 몸이 내 머리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더라.     


내 몸이 뒤돌아서 가던 길의 반대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거야. 나는 막다른 길에서 멍하니 서 있다 가려던 길로 되돌아갔어.      


나는 왜 그렇게 당당하지 못했을까? 무엇이 두려워서 그 찰나의 순간도 마주하지 못했을까.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내 진심이 나를 덮쳐서, 내가 내 인생을 회피하고 있다는 걸 확인시켜 줘서 난 좀 얼얼했어. 그냥 그랬다고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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