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드라마에서도 등장하지 않는 클리셰.
이젠 드라마에서도 등장하지 않는 클리셰. 그 진부하고 예측 가능한 상황을 직접 연출해 보았다.
J는 오래전부터 결혼반지를 정해놓았다고 했었다. 그러니까 결혼 상대가 누구든 간에 그가 정해놓은 결혼반지는 ‘까르띠에 트리니티 링’이었어야 했다. 보석 따위에 일절 관심이 없었던 내가 결혼반지라고 해서 관심이 있었겠는가. 결혼반지가 된 그것은 대단한 사랑의 표식이 되어 당당하게 왼쪽 약지에 끼여졌다가 지금은 한 푼이 아쉬운 탓에 내던져지지 못하고 화장대 서랍 속에 깊숙이 박혀있는 금붙이가 되었다.
화장대에 앉아있을 때마다 결혼반지가 웅웅 소리쳤다. ‘날 언제까지 여기 둘 셈이야?’
영원히 간직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결혼반지를 내다 파는 여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을 뿐. 언젠가 돈이 필요할 때 팔겠다는 미적지근한 생각으로 방치했는데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그렇게 클리셰적인 인간이 되어 중고 명품 매입하는 곳을 찾았다.
그는 제품과 보증서를 살펴보고 키보드를 타닥타닥 거리다가 예상한 금액의 절반을 제시했다.
‘그럼, 금은방이 더 나을 수도 있겠네요?’
‘네. 다른 곳도 한번 비교해 보시고 판단해 보세요.’
반지와 보증서를 주섬주섬 챙겨 들고 창고 같은 그곳을 빠져나왔다. 순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든 비싼 값에 결혼반지를 팔고 싶어 하는 나라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런 내가 튀어나온 것에 대해.
그대로 다시 서랍장에 처박아야 되나 싶다가 지하철역을 오가다 쇼윈도에 ‘최고가 금 매입’이라는 문구가 박힌 금은방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곳으로 직진했다.
‘브랜드 제품인데 그냥 금으로 파시려고요?’
‘네. 별반 차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케이스는 들고 가셔도 되고 여기서 폐기하셔도 되고요.’
‘그럼, 그냥 폐기해 주세요.’
금은방에서는 정확히 내가 예상한 금액이 나왔다. 현금을 챙겨 들고 지하철을 탔다. 나는 웃음이 나올 줄 알았다.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한 결혼반지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뭐든 함께 시간을 보낸 것과 헤어지는 순간이 마냥 유쾌할 리 없었다.
예상대로 되는 일은 역시 아무것도 없다. 예상하지 못한 울적한 마음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찰나의 순간을 박하게 후려치지 말자고. 그 정도의 애도는 할 수 있는 거라고. 해도 된다고.
결혼반지를 판 돈으로 수업을 듣고 자격증을 딸 예정이다. 결혼반지는 한때 왼쪽 약지에 머물며 사랑을 믿게 해 주었고 어두운 화장대 서랍 안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다가 이제는 언제 다가올지 모를 기회를 잡아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미안하고 고맙지 아니할 수가 없다. 괜한 자존심에 버리고 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J의 결혼반지도 모른 척하고 슬쩍 가져왔어야 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