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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Oct 08. 2024

바퀴벌레까지 걱정하는 사람

여자들은 왜 이렇게 다정한 지 모르겠다. 

   본가 현관 언저리에서 바퀴벌레를 발견해 버렸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나를 피해 소파 뒤쪽으로 달아나던 녀석은 엄마에 의해 검거당했다. 엄마는 아파트 단지 내에서 방역 작업을 할 때면 간혹 바퀴벌레가 실내로 피신해 온다고 덤덤히 말하면서도 애가 못 먹었는지 삐쩍 말라서 힘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끝을 흐렸다.   

  

‘엄마?! 지금 바퀴벌레가 밥을 못 먹어서 불쌍하다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그래도 애가 너무 말랐어.’     


바퀴벌레의 끼니까지 걱정하는 엄마를 역시 당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후미진 골목길에서 바퀴벌레와 마주치면 ‘... 애는 그래도 좀 많이 먹었나 봐.’ 통통한지 비쩍 말랐는지를 체크하는 나. 지금도, 앞으로도 바퀴벌레와는 친해질 수 없지만, 마냥 징그러워하기엔 어쩐지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체육관의 할머니들도 만만치 않다. 아래쪽의 로커에 허리를 숙여서 짐을 꾸역꾸역 넣고 있으면 샤워를 마치고 나가면서 본인이 썼던 위쪽의 로커로 바꿔주겠다고 난리가 난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다정한지 모르겠다. 다정하지 않은 나로서는 매번 고맙다고 그렇지만, 괜찮다고 사양한다.    

  

혼잡한 지하철역 계단에서 커다란 장바구니를 들고 힘겹게 내려가는 할머니를. 예전의 나였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부쩍 무릎이 불편해진 엄마를 생각한다. 장바구니를 들어드렸다. 그녀는 주름진 반달눈을 하고서는 예쁜 아가씨가 마음씨도 참 예쁘다는 생각지도 못한 다정한 말을 건넸다.   

   

정말로 마음씨가 착한 아가씨가 된 것 같았다. 이런 나의 착함을 친구들 앞에서 자랑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깟 일로 자랑하듯 떠들어대는 인간이란 결코, 착하지 않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깨달아버렸다.      


노인이 계단을 내려가려면 온몸에 무리가 간다. 그런데 짐까지 있다? 그러면 정말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 엄마와 주변의 나이 든 여자들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 또한 나이 들어가고 있어서 예전과 다르게 행동했던 것뿐이었다.     

 

최근에 이상할 정도로 다정한 여자들을 자주 마주쳤다. 법문을 듣다가 에어컨 바람이 추워서 살짝 움찔했는데 옆자리의 여자가 내 손을 꼭 쥐어보더니 ‘손이 차갑네’라는 무심한 멘트와 함께 자신의 니트 모자로 내 무릎을 덮어 주었다. 본인도 추워서 가방으로 다리를 가리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이런 예상하지 못한 다정함에 꼼짝없이 말랑 따끈해진다. 하지만 옆자리 사람이 춥든지 말든지 관심 없는 나로서는 이런 다정 공격에 ‘고맙습니다.’라는 말밖에 내뱉지 못한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다정함에 혼절할 지경이지만 말이다.      


다정함이란 건 별것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별것 아닌 일을 몸과 마음에 베일만큼 일상적으로 행하는 사람은 대단하다. 이 세상이 어디 다정해지기 쉬운 세상이던가. 포악해지기 쉬운 세상에 가깝지.      


타고난 기질과 환경을 탓하기엔 어느새 멋쩍은 나이가 되었고 그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다정해지진 않았다. 사실은 ‘아무리’를 붙이고 싶어서 자신의 노력을 과대평가했을 뿐 실제로 ‘아무리’라는 부사를 붙일 만큼의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냥 타인의 다정에 감탄하는 자신을 이만하면 다정하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정’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 별것 아닌 것들이 팍팍해서 목메는 삶을 목구멍으로 부드럽게 넘겨주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그런 순간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 때문에. 그러나 결국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말을 믿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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