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을의 시작이다.
인천 영종도를 다녀왔다. 어딜 가도 산이 시야에 들어오는 지역에 살다 보니 서쪽의 광활한 평야를 보면 조금 당황스럽다. 숨을 데를 찾고 싶어 진달까. 대신 걸리는 게 없으니 본래 하늘이 고스란히 드러나 굳이 우주를 들먹이지 않아도 존재의 미비함이 드러나는 건 맘에 든다. 나 따위 막살아도 될 것 같은 이 후련함.
바다도 마찬가지다. 남해에 익숙해서 동해나 서해를 볼 때도 바다가 아니라 평야 지대 같다. 광활하게 펼쳐진 갯벌을 보면서 저기서 살아서 나오긴 힘들겠다고 생각한다. 들어가지도 않을 거면서 빠져나갈 걱정이 들게 하는 것이 내겐 갯벌이다.
갯벌을 보며 걱정했다. 과연 몇 시간을 걸어야 저기서 탈출할 수 있을까. 손을 흔들면 사람들이 날 발견해 줄까. 근데 뭘 타고 갯벌에 들어올까. 따위의 생각을 한다. 광활함을 소화하기엔 내 그릇은 아무래도 작은 것 같지만 막살고 싶다는 소망은 내려놓지 않는다.
영종도까지는 6시간이 걸렸다. 평소엔 지하철 7코스의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하루 24시간 중 절반을 이동 시간에 할애해 놓고서도 꽤 가깝다고 생각했다. 나의 거리 감각은 줏대가 없다. 걸어서 5분 거리의 체육센터는 가깝고 걸어서 5분 거리의 버스 정류장은 멀다고 느낀다.
거리의 측정단위는 시간이 아니라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이없는 거리 감각도 설명된다. 먼 거리가 가깝게 느껴지는 일이 많았으면 했다.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다. 거주지에서 이탈해 현실로 복귀하면 대체로 헛헛하거나 갑갑하고 안심이 되었지만, 이번엔 그 감정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익숙한 바다를 보며 이곳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든지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고 홀가분했다. 나는 내가 원하면 어디로든지 갈 수 있다.
마음은 날 죽고 싶게 했지만, 이렇게 날 황홀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마음에 휘둘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여전히 쓰고 있지만, 그냥 내버려 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음은 결국 날 살리려고 괴롭히는 것이지 날 죽이려고 괴롭히는 것 같진 않다. 시시때때로 뒤바뀌고 제멋대로 날뛰지만 결국 마음은 항상 내 편이다. 그런 믿음이 생겼다.
집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온 집안이 나를 반기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바랬던 나를 밀어내지 않는 따뜻한 공간. 늦은 새벽 반겨주는 이 하나 없어도 외롭지 않았다. 행복했다. 그 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걸 행복이라 부를 수 없다면 이 세상에 행복은 없다고 생각했다.
의심하며 사는 건 이제 하지 않아도 된다. 아마도 그 사실이 날 홀가분하게 만들었으리라. 때마침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든 더위도 물러갔고 온 집안으로 풀벌레 소리가 가득 흘러들어왔다. 행복한 가을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