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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Sep 26. 2024

막살고 싶다는 소망.

행복한 가을의 시작이다.

 인천 영종도를 다녀왔다. 어딜 가도 산이 시야에 들어오는 지역에 살다 보니 서쪽의 광활한 평야를 보면 조금 당황스럽다. 숨을 데를 찾고 싶어 진달까. 대신 걸리는 게 없으니 본래 하늘이 고스란히 드러나 굳이 우주를 들먹이지 않아도 존재의 미비함이 드러나는 건 맘에 든다. 나 따위 막살아도 될 것 같은 이 후련함. 

    

바다도 마찬가지다. 남해에 익숙해서 동해나 서해를 볼 때도 바다가 아니라 평야 지대 같다. 광활하게 펼쳐진 갯벌을 보면서 저기서 살아서 나오긴 힘들겠다고 생각한다. 들어가지도 않을 거면서 빠져나갈 걱정이 들게 하는 것이 내겐 갯벌이다.      


갯벌을 보며 걱정했다. 과연 몇 시간을 걸어야 저기서 탈출할 수 있을까. 손을 흔들면 사람들이 날 발견해 줄까. 근데 뭘 타고 갯벌에 들어올까. 따위의 생각을 한다. 광활함을 소화하기엔 내 그릇은 아무래도 작은 것 같지만 막살고 싶다는 소망은 내려놓지 않는다.   

  

영종도까지는 6시간이 걸렸다. 평소엔 지하철 7코스의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하루 24시간 중 절반을 이동 시간에 할애해 놓고서도 꽤 가깝다고 생각했다. 나의 거리 감각은 줏대가 없다. 걸어서 5분 거리의 체육센터는 가깝고 걸어서 5분 거리의 버스 정류장은 멀다고 느낀다.     


거리의 측정단위는 시간이 아니라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이없는 거리 감각도 설명된다. 먼 거리가 가깝게 느껴지는 일이 많았으면 했다.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다. 거주지에서 이탈해 현실로 복귀하면 대체로 헛헛하거나 갑갑하고 안심이 되었지만, 이번엔 그 감정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익숙한 바다를 보며 이곳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든지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고 홀가분했다. 나는 내가 원하면 어디로든지 갈 수 있다.      


마음은 날 죽고 싶게 했지만, 이렇게 날 황홀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마음에 휘둘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여전히 쓰고 있지만, 그냥 내버려 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음은 결국 날 살리려고 괴롭히는 것이지 날 죽이려고 괴롭히는 것 같진 않다. 시시때때로 뒤바뀌고 제멋대로 날뛰지만 결국 마음은 항상 내 편이다. 그런 믿음이 생겼다.     


집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온 집안이 나를 반기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바랬던 나를 밀어내지 않는 따뜻한 공간. 늦은 새벽 반겨주는 이 하나 없어도 외롭지 않았다. 행복했다. 그 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걸 행복이라 부를 수 없다면 이 세상에 행복은 없다고 생각했다.      


의심하며 사는 건 이제 하지 않아도 된다. 아마도 그 사실이 날 홀가분하게 만들었으리라. 때마침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든 더위도 물러갔고 온 집안으로 풀벌레 소리가 가득 흘러들어왔다. 행복한 가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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