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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Sep 19. 2024

줄곧 이런 명절을 바라왔다.

의미를 부여하면 삶은 괴로워진다.

 부모님을 큰 집에 모셔다 드리고 나 홀로 본가로 돌아왔다. 어쩌면 이번 추석이 큰아버지의 마지막 방문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예상했지만, 그의 병세는 그마저도 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다. 평소에도 입이 짧은 큰아버지는 아픈 뒤로는 더욱더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었고 엄마의 음식만은 마다하지 않아서 부모님은 명절 음식을 잔뜩 싸 들고 가셨다.   

  

에어컨이 켜진 거실 소파에 누워 책을 읽으며 언니를 기다렸다. 매년 명절이 되면 가족끼리 칼부림이 나서 난장판이 되는 응급실 에피소드를 들었지만, 올해는 그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다. 응급환자를 받지 않기 때문에. 언니는 앞으로 절대 아프거나 다치면 안 되니 조심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언니와 나는 서로의 근황은 딱히 궁금해하지 않는 편이다. 못 본 사이 SNS에서 보았던 웃긴 글이나, 동영상을 공유하며 낄낄대고 유용한 아이템을 추천하고 남자들, 주로 못생기고 삐뚤어진 남자들을 철저하게 욕한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자신이 저런 애들을 낳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눈치다.     


4시간 뒤에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언제 올 것인지를 물었다. 빨리 고기를 구워 먹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우리는 큰아버지를 안타까워한다. 나는 이혼을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언니는 그를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애를 썼고 이제는 큰아버지가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길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받아들임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한다.      


명절 음식은 엄마와 내가 장만했고 언니는 현금을 지불했고, 아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므로 고기는 아빠가 구워주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런 게 추석이지.’ 언니와 나는 그렇게 소리치며 아빠가 구워주는 고기를 받아먹었다.      


줄곧 이런 명절을 바라왔다. 감정의 소모가 없는 명절. 서로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명절. 애써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 명절. 자신을 부정하지 않아도 되는 명절.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건지 되묻지 않아도 되는 명절.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쉬기만 해서 살찌는 명절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아무런 감정의 찌꺼기가 남지 않았다. 부모님은 큰 집 내외에게 내가 성질머리가 더러워서 이혼했다고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나는 그런 부모님께 미안함을 느끼지 않았다. 엄마가 챙겨준 명절 음식을 트렁크에 가득 싣고서 차 안에 가득 울려 퍼지는 노래를 신나게 따라 불렀다.

      

명절은 본디 이런 것이었다.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모여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 모두가 괴로워지고야 마는 것.      


비단 명절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거다. 삶도 그렇다. 지금 하는 행위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면 삶은 괴로워진다.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에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들은 우리 삶 곳곳에 도사리고 있고 생각이라는 놈은 귀신같이 그것들을 찾아내 의욕을 꺾어 버린다. 아무 생각 없이 꾸준히 무언가를 해내는 일은 그래서 어렵다.    

  

명절을 그저 가족끼리 밥 먹는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삶도 단순하게 바라보고 싶다. 헬스장을 끊었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헬스장을 가는 단순한 내가 다른 일도 그렇게 해내면 좋겠다. 지금 하는 일을 폄하하지 말고 그것이 내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가늠하려 들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대신에 그냥 해보자는 마음으로. ‘못 먹어도 고’의 마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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