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엔 기필코 에어컨을 설치하리라.
잘 알고 있어서 포기하는 일
숨 막히던 8월이 드디어 흘러갔다. 리모델링을 진행하면서 시스템 에어컨 2대를 설치할 예정이었지만 중개인의 말대로 사방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이닥쳐서 7월에도 추위를 느꼈고 쾌재를 부르며 선풍기 한 대로 사람을 죽였던 올해의 8월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 하아. 내년엔 기필코 에어컨을 설치하리라. 해를 거듭할수록 여름이 힘들어질 걸 알면서도 이런 무모한 결정을 했다니. 똥고집이 있어서 망할 결정을 하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아는 인간이기도 했구나.
지난주에는 다른 트레이너에게 코어근육이 좋다는 말과 함께 예전에 했던 운동이 있었냐는 질문을 받았다. 70세의 몸을 가졌다는 말을 불과 5일 전에 들었었는데 설마 나.. 헬스 천재?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내가 튀어나온다. 주로 후진 내가 나올 때가 많지만, 어쩌다 멋진 내가 등장할 때도 있다. 분명한 건 그들은 내가 무언가를 시도할 때마다 나타난다는 것이다. 한 번의 멋진 나를 만나기 위해 열 번의 후진 내게 두들겨 맞는 건 괴롭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멋진 나를 만날 가능성은 더더욱 희박해지므로 시도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굳이 멋있어져야 하냐고? 내 멋짐의 목표는 무기력에 빠지는 횟수를 줄이기 위함이다. 술, 담배, 마약(마약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만)과 마찬가지로 무기력도 중독적이다. 알다시피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건 매우 어려우므로 이것저것 해보는 거다. 금주 센터에도 가보고 정신병원에도 감금되어 보고. 그렇게 당분간 나의 멋짐을 발견하는 것으로 좌절과 불안을 이겨내 보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여전히 싫다. 아무 일도 안 할 수 있지. 쉴 수도 있는 거지. 20대에 꼭 해봐야 하는 일. 40대가 되기 전에 안 하면 안 되는 일. 따위의 되지도 않는 말로 불안감을 조성하고 구분 짓고 찍어 내리는 건 정말 꼴도 보기 싫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 나이가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래서 무엇보다 아주 잘 알고 있어서 포기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렇게 사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건 재앙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팔자가 좋아 무기력에 빠져있을 때였다. 격동의 시절을 흘려보내고 밥벌이를 찾지 못해서 팔자가 좋지도 못한 주제에 다시금 평온을 느끼기 시작했지만 고새를 못 참고 불안감이 슬며시 몰려와 겁이 났다.
그러나 고작 헬스를 시작했을 뿐인데 불안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인간은 알 수 없는 것들 속에서도 어떻게든 자기를 살게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설계된 모양이다. 나는 이렇게 멍청하고 경이롭다.
근력 운동 후에 오는 고통을 달콤하게 느끼고 슬픔에 몸부림치다가도 그 모습이 궁금해서 슬며시 거울을 집어 드는 게 인간이다. 고통이 달콤함을 부르고 슬픔으로 희열을 느낀다. 죽을 것 같이 힘들어서 퇴사하고, 퇴사 후에는 굶어 죽을 것 같아서 다시 일을 찾는다. 결핍은 무언가를 하게 만들고 풍요는 오히려 무언가를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쩌면 불안과 괴로움 같은 것들이 이 지리멸렬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일지도.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살짝 벗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집에서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아직도 현관문을 열면 코끝에 스치는 집안의 공기와 냄새가 익숙지 않고 샤워 후에 남아있는 나의 체취에 화들짝 놀란다.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체취는 다른 체취에 감춰져 있었을 뿐이었다.
지난 20년의 삶도 사라진 게 아니었다. 허망한 게 아니었다. 내 삶은 이곳으로 옮겨와 더 넓고 깊게 확장된 것일 뿐 상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잡을 수 없이 다양하게 후지고 간간이 멋진 나와 시간을 보내다 보면 삶은 계속, 계속 확장되겠지.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앞으로 잃을 것도 없다. 선선해지면 겁이 나서 미뤄왔던 아르바이트를 알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