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태도
체념의 사슬
요즘 다시 마음이 불안해졌다. 작년 여름 아르바이트로 모아놓았던 사업자금 500만 원이 이제 십만 원 단위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스케일 봐라. 천만 원 단위도 아닌 백만 위 단위, 이제 십만 원 단위에 바들바들 떨고 있다. 올여름 유일한 플렉스(FLEX)가 하나뿐인 아들의 크록스 신발에 꼭 필요하지 않지만 아들이 가지고 싶어 했던 자동차 모양의 지비츠를 달아주는 것이었다.
한땐 멋진 패션기업 CEO를 꿈꾸던 나였지만 인생에서 멋과 감성을 빼고 가성비를 넣었다. 능력보다 상황이라는 말처럼 빠듯한 가계의 가정주부로서의 삶은 내게 체념을 가르친다. 그냥 네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라고. 몇 번의 재취업 반란 속에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헐렁한 고무 바지가 내게 꼭 맞는 옷이었을까. 집을 치우고 빨래를 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가슴속 열정과 용기는 오늘도 조금씩 빛바래간다. 그리고 거울 속엔 기미와 주름이 가득한 남루한 얼굴 하나가 서 있다.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나의 의식이 나에게 말을 건다. 지금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건 일정하게 들어오는 100만 원의 추가 수입이야. 무슨 일이 되었든 일을 시작해. 이제 현실을 직시해야지. 너 마흔이야. 그냥 아줌마라고. 또 다른 의식이 서둘러 말을 막는다. 그래도 잘 생각해봐.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기술들을 보충해서 적성이든, 경력이든 살려서 일을 해야지. 너 지금 급하다고 아무 일이나 시작하면 진짜 끝이야. 그냥 알바로 인생 끝난다고. 너 알바만 하면서 살 수 있겠어? 네가 꿈꾸던 삶, 기억 안 나?
위태로운 나의 꿈
인구 10만의 소도시 13평 주공아파트에 살았던 스무 살의 나는 패기롭게도 패션 브랜드의 총괄이 되어 나의 재능으로 반짝이고 싶었다. 디자이너로 시작해 거의 모든 포지션을 돌고 돌아 마지막에야 꿈을 이룰 수 있었는데, 기업의 규모를 보아도 중견기업에서 대기업, 동대문 도매시장까지 거의 모든 곳을 경험했다. 돌아보면 SPA 브랜드에서 일을 시작할 때도 캐셔로 시작해 모든 포지션을 거친 후에 매니저가 될 수 있었다. SA(sales assistant)부터 시작했다면 절반은 줄었을 과정이지만 언제나 신은 나에게 더 많은 경험과 시간을 선물로 주셨다.
그러고 보면 나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는데 할 수만 있다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이제와 직업적 평가를 해본다면 전쟁에선 이겼는지 모르겠지만 전투에선 패배한 장군 같다. 왜냐하면 지금 나에겐 남은 것이라곤 일과는 상관없는 사랑하는 가족뿐이니깐. 일은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일의 의미
나에겐 일은 돈벌이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나의 쓰임을 확인하고 가치를 인정받는 수단이었다. 육아맘이 되고 스스로를 투영했던 집단의 평가가 사라져 버린 삶 속에서 스스로가 한없이 무의미해졌고 그동안의 노력들이 헛수고처럼 느껴졌다. 티클만큼 가벼운 나의 존재감.
완벽하지 않은 나에 대한 미움을 딛고 절망과 좌절의 시간을 버티게 한 것은 독서였다. 여전히 인생은 내 뜻과는 다르게 흘러가지만 주어진 삶이 아닌 이루어 낸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을 일깨워주는 책들이 있는 한 나는 또 다른 탈출을 시도할 것이다.
물론 실패는 나를 아프게 했다. 100만 원을 들고 무작정 동대문에서 사입을 한 후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렸지만 한 장도 판매하지 못했던 일과 조그마한 옷가게 매장을 얻고 싶어 아는 언니와 한 달 동안 돌아다녔지만 결국 돈 문제로 포기했던 일 모두 나를 주눅 들게 했다. 이제 점점 자신감도 사업에 대한 감각도 희미해져 가는 걸 느낀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물론 자본이 없는 나의 한계이기도 했다.
삶은 내게 이제 그만 체념하라고 한다. 하지만 상황은 어쩔 수 없다 해도 태도는 내가 선택할 수 있으니깐. 성실함으로 하루하루 살아볼 수밖에. 태도는 가장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해주는 몸에 밴 습관이라고 했다. 좋은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성공이 아닐까.
삶에 대한 태도가 좋은 사람
주부의 삶을 살아가는 내게 세상은 더 이상 기대하지 않지만 나는 좋은 책들을 읽고 영어도 공부하며 열심히 운동도 해서 집안일과 육아에 매몰되지 않은 균형 잡힌 삶을 나에게 선물하고 싶다. 지금 내가 어떤 일을 하든 세상이 어떤 사람이라고 구분 짓든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우리는 삶에 대해 태도를 선택할 수 있으니깐.
언젠가 테드 강연 중에서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은 사실 각자의 감각정보가 만든 환상이라는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감각정보가 어떻게 뇌에 전달되어 머릿속에서 구체화되는지를 설명한 강연은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뒷받침해주었다.
세상엔 진실은 없다. 단지 내가 믿는 진실만 존재할 뿐. 그러니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한계 따위는 잊어보는 건 어떨까. 마흔에도 여전히 나는 청춘을 꿈꾼다.
It’s just that when we agree about our hallucinations we call that reality.
-Anil Se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