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후회는 없어 (feat. 원피스)
불후의 명작 일본 애니메이션인 <원피스>는 주인공 루피가 해적왕이 되기 위해 모험을 떠나며, 그 과정에서 각양각색의 사연을 가진 동료들을 모아 최강의 해적왕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다.
주인공 루피는 '고무고무 열매'라는 온몸이 쭉쭉 늘어나는 저주의 열매를 먹고 능력을 얻게 된다. 그 능력을 보유한 사람답게 생각이 상당히 유연하고 언제나 열려있다. 그리고 언제나 낙천적이다.
미안, 나 죽나보다
루피가 로그타운 사형대에서 죽을 위기에 처하자 동료들에게 하는 말이다.
27년째 전세계에 수많은 원피스 덕후를 양산해낸 이 <원피스>의 주제는 꽤 단순하다.
삶에는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지만, 그 과정에는 목숨과도 바꿀만큼 소중하고 귀한 동료들이 있다는 메시지다.
주말에는 동료 작가들끼리 모여 스터디를 한다. 사는 곳이 각자 다 떨어져 있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화상회의로 진행한다. 서로의 글감과 아이디어, 기획안과 대본 등을 공유한다.
우리는 경쟁자이면서, 동시에 협력자다.
밀물이면서 썰물이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마음에는 바다처럼 깊고 짠한 뭔가가 있다.
이 일은 일정 기간의 숙련이 필요한 일이다. 숙련이라 하면 기술적인 단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냥 블로그에 글을 쓰는 건 누구나 쓸 수 있다. 초등학생도 가능하며 AI도 능숙하게 한다. 하지만 시나리오와 대본의 영역에는 기술이 들어간다. 물론 AI가 대본을 쓰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업계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진짜 뭔가를 써내는 작가를 대체하진 못할 거라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은 가치중립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반면 작가들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가치관이 뚜렷하다. 그 가치관으로 세계관을 설립하고, 캐릭터를 설정한다. 모든 게 개인의 취향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결코 동료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작가에게 동료가 필요하다니? 어떤 이들은 코웃음 칠지도 모른다. 근본적으로 혼자 하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 글을 쓰는 작가에게도 동료는 분명 있다. 다른 이가 쓴 책 속 문장, 생각, 가치관 등을 읽고 감탄했던 경험이 있다면 틀림없다. 그런 문장을 쓴 작가를 한 번쯤 질투해 봤다거나 성장 배경을 조사해 봤더라면 당신의 동료의 자격을 충분히 갖췄다고 생각한다. 고작 그 정도로 동료라고 생각한다고?라고 의문할 수 있겠지만 사실이다. 작가란 얼굴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슴속 깊은 비밀을 들키게 하는 존재다.
동료들의 존재는 나를 천장 위에서 똑똑 흐르는 얼음장 같은 물처럼 깨어있게 만든다. 그들은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고 싶을 정도로 죽을힘을 다해 쓰고, 실제로 그 행위로 죽음을 향해 매일 뛰어가는 것 같다. 이들 중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들도 있다. 최소 몇 년간의 숙련 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통념을 뒤흔들 정도로, 단번에 잘해버린다. 기승전결 완성도 높은 대본을 일주일에 뚝딱 만들어내고, 캐릭터도 정말 눈앞에서 살아 있는 인물 같다.
당연히 나는 그들을 더 이상 질투하지 않는다. 그 단계는 이미 늙어 버려서 한참 전에 지나쳤다. 나에게 재능이라는 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작가의 신이라는 자가 다가와 '너는 때려죽여도 재능이 없으니 때려치워라' 한다면 작가의 신 붙들고 무릎을 꿇고 빌면서 '아 예 작가의 신님, 그래도 말입니다. 제발 방법 하나만 알려주십시오, 때려죽이셔도 좋습니다.' 하면서 구걸할 생각이다. 그렇게 죽을 때까지 작가의 신에게 곤죽이 되도록 맞다가 어느 정도 정신이 들면 벌떡 일어나 가던 길 갈 생각이다. 설마 명색이 신인데 사람을 막 이유없이 살해하진 않겠지.
사람은 결코 혼자 성장할 수 없다. 예전에 한 대표님이 나에게 혼밥(혼자 밥 먹기) 하지 말라고 조언하신 적이 있다. 젊을수록 가능한 한 사람을 많이 만나고, 그렇게 만난 사람들을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좋은 글이 나온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나는 소설을 쓰는 순수문학 작가가 아니다. 나의 글은 철저한 대중문화다. K팝 아이돌 작곡가와 가장 유사하다. 대단한 선생님 소리를 듣는 위치도 아니고, 가난한 집안의 여자가 재벌 집안의 남자를 만나 신데렐라 스토리를 써내는데 노벨 문학상을 받기도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눈물을 흘리는지에 무수한 레이더가 세워져 있어야 한다.
나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보조작가로 뽑혀 작품에서 짧게 일했던 적이 있다. 당시 메인 작가님이셨던 문지원 작가님께선 그동안 어떤 작품들을 써오셨는지 이야기해 주셨다. 굉장히 어둡고 다크 한 이야기를 주로 쓰셨다고 설명해 주셨다. 그러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처럼 밝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하셨다. 그 시도는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나는 이 작품이 대박 날 거라고 당시에도 확신했다.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생각하면 반드시 보조작가를 완성도 있게 수행해 내야 했다. 하지만 때마침 한 제작사에서 나에게 집필계약을 제안했고, 이중계약은 안된다는 말에 (사실 독소조항이라 빼달라고 요구하고 두 일을 같이 했어도 됐다.) 보조작가 일을 나오게 됐다. 그리고 이는 내 인생에 좀 뼈아픈 후회로 남아있다.
이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아무리 작가가 개인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에 본능적으로 끌린다 해도, 결국 대중들은 밝고, 희망적인 스토리를 원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교훈은 일의 성공여부는 함께 일하는 팀원들의 평균적인 수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나 혼자 잘한다고 해서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 무조건 능력 있고, 될 것 같은 팀에 착 달라붙어서 함께 가야 한다. 그런데 그 당시엔 이걸 몰랐다. 기고만장했던 건 딱히 아닌데, 그냥 도전해보고 싶었던 패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패기는 처참히 바닥에 분질러졌다. 물론 유의미한 대본은 나왔으나, 그 대본은 아직도 편성을 구하며 구천을 떠돌아다니는 중이다. (이 바닥에 그런 대본이 30849762238104975개 정도는 된다. 무한대로 증식 중이다.)
용의 꼬리와 뱀의 머리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2030대의 사회 초년생이라면, 경험이 많지 않다면 무조건 용의 꼬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용의 꼬리는 승천이라도 해본다. 뱀의 머리는 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용의 꼬리로 10년간 땅을 헤집다 보면, 어느 순간 용의 몸통에 가 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용의 머리에 앉아있는 날을 경험하게 된다.
'너, 최고의 동료를 만나라.'
그것이 바짓가랑이 붙들고 안 떨어지는 내게, 작가의 신께서 알려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