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하 Dec 12. 2023

뉴욕 버스에서는 어린이가 춤춰도 됩니다.

맨해튼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있을 때 유모차를 가지고 차량에 오른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아들을 유모차에 태운 채로 남편에게 넘긴 후 일행과 버스 뒷자리에 앉아서 수다삼매경에 들어갔다. 그 여자에겐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추정되는 딸도 둘이나 있었다. 아이들은 버스 하차 문 앞 공간이 넓은 쪽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치치채~ 치채초~ 치치채채 와~~~~~~~!”  

        

발을 엇갈리고 손을 맞대며 아이들은 칙칙책인지 치치체인지 모를 음성을 반복해 가며 뭔가를 연습했다. 마미~ 하고 부르며 자기들을 보라고 하자 엄마가 오~ 치치채? 하고 잘해보라며 격려한다. 와~ 이곳은 길거리가 아니라 버스인데 말이다! 더 충격받은 것은 그런 아이들을 누구도 나무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버스 기사도 말이다. 승객들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찡그린 사람이 없다. 아이들이 노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 구경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저러면 맘충이라고 하고 노키즈존 얘기 나오고 난리도 아닌데, 대단하지 않아요?” (프롤로그에 썼던 내용입니다.)


남편에게 놀란 눈으로 이야기했다. ‘버스에서 그렇게 춤추면 넘어질 수도 있는데!’, ‘아이들을 위한 충고다!’라고 댓글을 달고 싶은가. 맨해튼은 이동량이 많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버스가 천천히 달려서 아이들이 서 있어도 크게 넘어질 염려가 없다. 또, 아이들은 차가 멈췄을 때만 춤을 췄다. 내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아이들이 웃고 떠들고 춤춰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뉴요커의 행동이다. 아이들은 자제력이 약하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다.     

아이들에게만 관대한 것이 아니다. 강아지에게도 관대하다. 아니, 강아지라고 말하기보단 개라고 해야 할까. 대중교통에 커다란 개를 데리고 타도 문제가 안 된다. 골든레트리버 같은 정말 큰 개 말이다. 훈련을 잘 시켰는지 개들은 주인이 자리를 잡으면 주인의 발 근처에 앉는다. 한 번은 뉴욕 지하철에서 커다란 개가 바닥을 마구 긁고 있었다. 사람들은 개가 민폐를 끼친다고 생각하기보단 저 밑에 뭔가가 있어서 개가 긁나 보다고 생각했다. 우리 같았으면 커다란 개의 탑승은 어림도 없다. 청각장애인 보조견도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 마당에 일반인이 키우는 커다란 개가 어떻게 대중교통을 이용하겠는가. 그렇다면 대번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 그 큰 개가 나를 물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라고 말이다. 맞다. 물면 큰일이다. 그런데 물면의 전제엔 만약이라는 단어가 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사건이란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을 가지고 무슨 권리로 타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드는가. 그럴 권한이 우리에게 있는가? 왜 이러는지 사실 알 것도 같다.‘우리 개는 착해요’와 같은 멘트를 날리며 책임 있는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강아지를 키우는 모든 사람들을 싸잡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가는 것은 위험하다. 

뉴욕만 강아지 천국이 아니다. 가까운(이라고 쓰고 버스로 4시간) 보스턴으로 넘어가면 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의 모습을 더 자주 관찰할 수 있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나는 스타벅스에서도 봤고 트롤리를 타고 가다도 만났으며 심지어 서점에서도 봤다. 걸어 다니면 무조건 만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나에게 폐를 끼친 적은 한 번도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약한 고리를 공격하는 습성이 있다. 어린이도 강아지도 자신을 대변하기 힘든 존재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에겐 너무나 팍팍하다. 이거 안돼, 저거 안돼, 여기 오지 마 등등 한계를 설정해서 강하게 억압한다. 그러나 잘 보면 어린이나 강아지는 잘못이 없다. 그들을 관리해야 하는 주체의 문제다. 그렇다 하더라도 뉴욕에서는 관리해야 하는 주체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락한다. 버스에서 아이들이 떠든다고 엄마를 탓하지 않고 큰 개가 지하철 바닥을 긁는다고 주인을 욕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은 아직 배워야 하니까, 동물의 본성은 그런 거니까 하며 이해해 주고 넘어간다. 마음을 넓게 쓰는 느낌이랄까. 

그렇다면 한국은 왜 삭막해진걸까. 내 생각엔 치열한 경쟁이 반복되다 보니 숨 쉴 틈이 없어서 차갑게 변한 것 같다. 절대평가의 시대엔 각자 열심히 하면 보상받을 수 있었으나 상대평가가 되다 보니 저 사람이 시험을 못 봐야 내가 잘되는 상황이 와버렸다. 그러니 타인의 잘못을 어떻게든 꼬투리 잡아야 내가 생존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서로를 갉아가며 경쟁하고 있는 걸까. 공동체를 위한 건강한 경쟁은 사라지고 삶의 여유를 잃은 지금.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조차 잊어버린 건 아닐까.

이전 04화 뉴욕 식당에서는 어린이가 그림을 그려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