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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하 Mar 28. 2024

돌향기 가득했던 할머니의 김장김치

할머니의 김치는 뭔가 독특했다. 다른 집 김치에선 느껴지지 않는 뭔가가 있었다. 어디에서 많이 맡아본 냄새가 양념 사이사이에 섞여 있었는데 어렸던 나는 그 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묵직하기도 하고 마른 것 같기도 하고 어떨 땐 축축한 것 같은 맛이었다. 그 맛의 정체가 시골 할머니 집의 지하수 맛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땐 내가 결혼한 후였다.      

퇴근 후 남편은 언제나 허기져 있었다. 저녁을 먹었음에도 일정 시각이 되면 야식을 찾아 나선 하이에나가 되어 괜히 주방을 어슬렁거렸다. 그럴 때면 저리 비키라고 한 뒤, 먹을 만한 걸 만들어줬다. 남편은 유난히 쫄면을 좋아했기에 야식의 80%는 쫄면이 차지했다. 그때마다 빠지지 않는 재료가 있었으니 바로 할머니의 김치였다. 너무 오래 손을 대지 않아 하얗던 배추 줄기가 투명에 가까운 상태가 된 신김치.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장 때마다 굳이 우리 몫까지 왔던 시골 김치였다. 김치를 송송 썰어 할머니가 소주병에 담아 보내준 들기름까지 더해지면 미슐랭 별들이 울고 갈 맛이었다. 한 번은 집에 손님을 초대해서 저녁 식사를 대접한 적이 있다. 그때 김치를 썰어서 쫄면을 해놨는데 맛있다고 난리가 났다. 요즘 이런 김치를 구할 수 있냐며 조금 얻어가도 되냐는 분도 계셨다. 나는 만리장성에서 벽돌 하나 뺀들 대수냐 싶어서 김치통 하나를 가득 채워 보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김치를 가져가셨던 분께서 연락이 오셨다. 어머니에게 김치 맛을 보여드렸더니 좀 더 얻을 수 없냐고 물으셨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나는 피라미드에 벽돌 하나 뺀들 대수냐 싶어서 김치통 한가득 담아드렸다. 그렇게 우리 집에서 빛을 못 보던 김치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우리 집 냉장고는 음식의 무덤으로 유명하다. 한 번 잘못 들어갔다가는 3년 뒤에나 탈출할 수 있는 곳이 우리 집 냉장고였다. 냉장고 청소를 한 번 하면 언제 사다 놨는지 모를 고기가 빼빼 말라 발견됐고 흰색 곰팡이가 핀 정체 모를 반찬들이 생명의 신비로움을 자랑하며 등장하곤 했다. 그런 집에 김치는 사치였고 나는 김장 때마다 김치 좀 가져오지 말라고 엄마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엄마는 김장김치를 언제나 잔뜩 가지고 와서 작년에 준 김장김치가 그대로 있음에 깜짝 놀라며 가곤 했다. 엄마에게 김장김치는 나도 잘살고 있다는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첫 돌이 오기도 전에 이혼했던 엄마는 친정에서 언제나 찬밥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할머니에게 1순위는 친손주였고 2순위는 돈 많은 자식이었다. 엄마는 할머니의 차별에 친정과 절연할 만도 했으나 명절 때마다, 제사 때마다 찾아가서 구박 덩어리를 자처했다. 그런 엄마가 참여하지 못하는 행사가 있었으니 바로 김장 날이었다. 엄마는 목욕탕에서 음료수를 파는 일을 했는데 목욕탕은 겨울이 극성수기였으므로 휴가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장 날이 되면 엄마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김치를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러나 할머니가 우리 몫의 김치를 챙겨줄 리가 없었다. 엄마가 큰 이모 집에서 고들빼기를 보고는 집에 와서는 서럽게 운 날이 있었다.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는데도 할머니가 자기만 쏙 뺀 채 다른 자식들에게 고들빼기를 챙겨줬기 때문이다. 김장이 끝나고 할머니의 고들빼기를 받지 못한 것이 그렇게 서러웠을까. 엄마는 큰 이모에게 받아온 고들빼기를 보며 한참을 괴로워했다. 그렇게 외톨이 같던 시간이 흘러 엄마가 재혼했고 김장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엔 엄마의 처지가 그리 달라지지는 않았다. 엄마는 김장에 참여할 수 있었으나 돈 많은 자식에게 매번 밀렸나 보다. 작은 이모가 김칫소를 많이 넣는 것을 본 할머니가 돈 많은 작은 이모에겐 뭐라고 하지 못하고 엄마에게만 김칫소 좀 적당히 넣으라고 구박했다나. 그렇게까지 면박을 주는데도 엄마는 김장 때가 되면 시골에 갔다. 내가 준 용돈을 들고, 말이다. 그 돈은 자의가 아닌 타의로 내 지갑에서 튀어 나간 것이었다. 엄마는 김장 때마다 올해 배춧값은 얼마 줄 거냐며 나에게 당당히 돈을 요구했다. 그렇게 뺏어간 돈은 손녀가 챙겨줬다는 그럴싸한 포장으로 할머니에게 갔다. 그렇다고 엄마의 지위가 크게 변동된 것 같진 않지만, 엄마는 매년 김장을 위해 시골로 갔다. 그 때문에 나까지 매년 엄청난 김장 김치에 파묻혀야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나와 상의도 없이 김치냉장고를 들여놨다. 하나 있는 냉장고에서도 손도 안 댄 김치가 즐비한데 김치냉장고라니 이런 낭비가 있나 싶었다. 엄마는 신이 난 눈치였다. 내가 김치냉장고를 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1년 된 김치, 2년 된 김치, 3년 된 김치들이 행과 열을 맞춰 엑셀 파일처럼 저장돼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숙성된 김치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남편이 쫄면을 먹고 나서부터였고 남편 친구들이 김치를 얻어가면서부터였다. 옛날엔 할머니 김치에서 돌 향기가 나는걸 참 싫었는데 이걸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했다. 그렇게 할머니 김치는 우리 집 냉장고에서 불티나게 이사가 갔고 어느 날 완판이 됐다. 김치는 매년 새로 생겨나니 사람들에게 마구 퍼줘도 상관이 없을 줄 알았다.

Image by moshillly from Pixabay

할머니의 나이가 구십이 넘자 수술했던 철심이 허리를 뚫고 나와버렸다. 다시 수술한다 해도 너무 고령이라 권하지 않았기에 할머니는 고름을 닦아내며 살게 되셨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매년 배추와 무를 습관처럼 심었고 김장은 어김없이 진행됐다. 그때마다 할머니 집 마당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하수는 배추를 씻고 저리는 데 여전히 함께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순간 멈췄다. 할머니가 너무 힘들어서 배추를 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 집엔 돌 향 가득한 배추김치가 자취를 감췄다. 할머니 김장김치는 없어도 엄마가 조금씩 김치를 했기 때문에 우리 집 김치냉장고는 언제나 가득 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김치를 얻어가셨던 분에게 연락을 받았다. 어머니께서 돌 향기 가득했던 그 김치가 너무 먹고 싶다고 혹시 조금 남아 있는지 물어봐 줄 수 있냐고 조심스레 말했다면서 말이다. 안타깝게도 할머니 김치는 없지만, 할머니에게 김장을 배운 엄마 김치가 있는데 그건 어떠냐고 했다. 그 양념이 그 양념 맛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김치를 주는 나도 김치를 받아가는 분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우리에겐 돌 향기 나는 김치가 필요함을 말이다.      

시골 할머니 집 뒤로 커다란 맥주 공장이 생겼다. 시골에 가면 고요한 공기가 볏짚 삶는 냄새를 껴안고 있었는데 이젠 웅웅 기계 소리가 시끄럽게 떠다니고 있다. 할머니 집 마당에서 보이던 논들도, 너무 커서 고개를 들어도 눈에 다 들어오지 않았던 나무들도 이제는 다 사라지고 전원주택으로 가득 차버렸다. 집을 상속받은 친척 오빠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집과 땅을 팔아버리겠다고 했다. 그 소리가 전해질 때마다 외가에서 잃어버린 것이 돌 향 가득한 김장김치만은 아니지 않을까 싶어서 아쉬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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