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쿄 센소지(浅草寺)
감정의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려면 걷기만 한 것이 없다. 운 좋게도 집 근처에 냇가가 있어 물 위를 떠다니는 오리와 철마다 바뀌는 꽃, 싱그러운 풀들을 보며 걷는다. 처음엔 이어폰을 끼고 다니다가 어느 날부터는 바람에 풀잎이 나부끼는 소리와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를 친구 삼아 다녔다.
감정이 격렬한 날에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나쁜 말이 튀어나온다. 내 입에서 툭 하고 튀어나오는 그 말은 이성적인 판단을 거치지 않고 자동 발사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뱉고도 엄청나게 놀라곤 한다. 그렇게 툭툭 튀어 나가는 감정의 폭죽을 견디고 나면 생각이 뚝 끊어지는 순간이 온다. 명상이라는 것이 그런 것인지 나는 분명 풀냄새를 맡고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오리가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순간 이동을 한 것 마냥 다른 곳을 걷고 있다. 아, 이렇게 육근(눈, 귀, 코, 혀, 몸, 뜻의 여섯 가지 근원)의 도적을 끊어내는 것인가.
어느 날, 숨이 턱턱 막혀 내 안의 굴을 파고 들어가 버릴 때면 여행만 한 것이 없다. 집을 떠나는 것이 무엇이길래, 사나흘 동안 아주 잠시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떤 고통과 괴롭게 싸웠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낯선 풍경과 마주하며 평소와는 다른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긴장감을 주나 보다. 가벼운 일정에도 피로는 금세 몰려오는데, 그렇게 지친 상태로 순백의 침대 시트에 몸을 던지면 살아 있어서 좋다는 느낌이 든다. 집 앞을 걷는 것과는 다르게 여행은 육근을 다시 살아나게 만든다. 특히나 센소지에 가면 그렇다.
도쿄에 있는 센소지는 내가 일부로 마음을 내어 자주 찾는 공간이다. 전설에 따르면, 스미다강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던 어부의 그물에 불상이 따라 올라왔고 이를 모시기 위해 센소지가 창건되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관세음보살상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사찰에 가면 부처님을 만나기 쉬운데 일본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기대하고 갔더니 불상을 모신 불단의 문이 꽁꽁 닫혀있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지만 만나 뵙고 싶던 부처님을 못 뵈고 오면 괜히 심술이 난다. 사실, 절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 것은 불상에다가 절을 하려는 것이 아닌데, 인간이 만든 형태에 집착하는 나를 보면 내가 다 한심하다. 그러나 나는 아직 어리숙한 중생인가 보다. 이왕 갔으면, 꼭 전설의 불상을 보고 참배하고 싶다.
이런 나의 마음과는 다르게 센소지를 찾는 사람들은 사찰 앞에 조성된 상점가에 가려고 그곳을 찾는다. 센소지 거리엔 사갈만한 기념품과 먹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낮에 센소지에 가면 정신이 없어서 싫다가도 북적북적한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괜히 기분이 방방 떠서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센소지와 인연을 맺게 된 이유는 황당하게도 주변에 저렴한 숙소가 많아서였다. 또, 나리타 공항으로 가는 스카이라이너를 타기 위해 번잡한 우에노보다 한적한 아사쿠사를 더 선호하게 된 것도 이유다. 그 이유가 쌓여서 인연이 되고 그 인연으로 센소지에 서른 번은 넘게 간 것 같다.
낮의 센소지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나는 저녁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저녁에 가면 관음당 문이 닫혀 참배할 수 없지만 조명에 빛나는 붉은 절의 모습에 마냥 기분이 좋다. 그래서 도쿄에 갈 때면 센소지 근처에 숙소를 잡곤 한다. 그렇게 이국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집으로 오면 희한하게도 괴로움이 집을 떠나기 전, 그 상태로 리셋된다. 아, 고통은 모르는 척 그냥 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구나.
살다 보니,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자주 느낀다. 화가 날 때가 특히 그렇다. 욱하는 감정이 나를 온전히 사로잡을 때면 심장이 요동치고 목덜미가 뻣뻣해지며 누구라도 잡고 떠들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온다. 그럴 때면 나는 친구를 붙잡고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있는 힘껏 감정을 내뿜었다.
참지 못하고 무언가 계속 조치를 취하다 보면 실타래가 엉켜서 풀기 힘든 상황이 온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가위를 가져다가 뚝하고 잘라내야 하는데 나와 개인적으로 맺은 인간관계에서는 그것이 가능해도 나를 간접적으로 지나가는 관계들은 껄끄러운 상태 그대로를 유지해야 한다.
마음속에 독을 품고 사는 것은 내가 나를 죽이는 과정임에도 계속된다. 몇 날 며칠을 앓으며 그 사람이 잘 안 되기만을 빌고 또 비는 내 모습이 참으로 미운데도 멈춰지질 않았다. 어떤 유명한 심리학자가 개인 SNS에 글을 올렸다. 자신이 개인적으로 멀리하는 인간이 있는데 용서가 안 된다며 내가 후진 사람이 돼도 계속 미워할 거란 글이었다. 마구잡이로 싫다거나 그 사람은 너그러움의 공간에서 제외한다는 문장도 글에 포함됐는데 어찌나 마음에 드는지 캡처해 두고 자주 보고 있다. 그래, 유명한 심리학자도 저러는데 내가 뭐라고 모든 이를 사랑하려고 했나 싶었다.
고요한 센소지를 걸으며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 입을 꾹 다물고 걷다 보니, 요동치던 감정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렇게 내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돌아다니다 보니, 화가 너무 날 때는 일부로 더 말을 줄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등상태가 깊어지지 않도록 제어해야, 나의 감정도 빨리 잔잔해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 뒤론, 조금 억울하더라도 말을 줄이고 또 줄였다. 상대에게 충분히 내가 화났음을 알리는 문장을 던져야 하는 상황에도 꾹 참았다. 그랬더니, 세상은 알아서 자정 능력을 발휘해 주었고 나는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래도 그 과정은 너무도 지난 했다. 그래서 하루빨리 이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르고 싶다. 고통과 슬픔, 괴로움, 분노를 하루라도 빨리 끊고 싶다. 다음번에 센소지에 가게 된다면 관세음보살님께 간절히 빌어야겠다. 번뇌를 끊어낼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말이다. 나무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