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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훈 Apr 16. 2017

다름 아닌, 너를 위해

2017.04.16


학창시절 학교에서 기분이 좋은 순간은 언제였을까. 성적이 잘나왔을 때? 반에서 아이들에서 주목을 받았을 때?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았을 때?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을 때? 체육대회에서 일등을 했을 때? 위에 적힌 경우와 여기 적히지 않은 많은 일들이 그에 해당되겠지만 결국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머리를 하고 같은 교육을 받는 집단에 소속된 개인이라는 나의 개성이 드러나거나 집단 속 개인인 너와 내가 좋은 관계를 맺을 때가 그에 해당된다.

이는 비단 학창시절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군대를 가서는 더욱 심하며, 직업을 갖고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을 자기소개를 할 때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 누구입니다. 라는 말을 많이 한다. 어디 어디에 소속되어 어디로 분류되는 누군가 입니다. 라는 소개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다."가 아닌 "나는 어디에 소속된 사람입니다."를 자기소개로 말한다. 군중과 집단 속의 인간인 우리들은 집단으로의 소속감을 가지고, 집단에 필요한 행동을 습득한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집단으로서 필요한 사고를 취한다. 그 과정에서 개인은 사라지고 인지되지 않으며 인지되지 않음을 당연시한다.

그렇게 인간은 텍스트로, 때로는 숫자로 때로는 덩어리로 존재한다. 그 하나의 덩어리는 인간의 형상을 하지 않으며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슬퍼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뻐하지 않는다. 나와 다른 덩어리를 이루는, 나와 관계없는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덩어리의 이익을 바라고 다른 덩어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세월호로 많은 희생자들이 생겼고, 용산참사로 또 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 다쳤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는 폭도로 몰린 사람들이 죽었고, 때로는 개발에 밀려 반대하는 사람들이 다치기도 했고, 누군가는 부당 해고를 당해 회사에서, 사회에서 내쳐졌다. 그들은 한 명의 개인으로 취급받지 못했고 그렇게 버림받았다. 각기 다른 개인으로 인식되었다면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버려지진 않았을거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덩어리를 이루는 사람들은 각기 한 명의 개인이다. 세월호의 희생자들도 하나의 "희생자"가 아닌 304명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고 부당 해고를 당한 사람들도 한 명의 개인이자 가정을 꾸리는 아버지이자 어머니이고, 아들이자 딸이다. 그들은 텍스트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한 사람으로, 인간으로 피와 살을 이루며 실제로 존재한다. 그들의 주변은 그들로 인해서 기쁨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고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힘들어한다. 인간은 존재로서 존중을 받아야 하고 인간으로 보여져야 한다. 사회는 개인을 끌고 갈 것이 아니라 개인을 하나의 개인으로 볼 수 있도록 책임을 져야 한다. 개개인이 하나의 역사를 이루고 그 존재는 나와 다르지 않다. 다른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나와 같은 구조를 가진, 나와 같은 기쁨과 슬픔을 지닌 온전한 하나의 인간이다.

사람은 덩어리가 하나의 개인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슬퍼하고 분노한다. 4.19혁명의 시발점이 된 김주열 열사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나왔을 때, 6월 항쟁의 도화선인,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발표에 시민들의 분노가 촉발된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 6월 항쟁이 전국적인 조직을 이루게 만든 이한열 열사의 사망사건까지. 덩어리진 집단의 개인을 주목했을 때 사람들은 움직이고 공감한다. 그래, 인간은 그렇게 인간이고 그래서 인간이다. 누군가의 슬픔과 기쁨에 오롯이 함께 할 수 있다면, 아직 우리는 인간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슬픔에서 자신을 본다. 다른 사람의 연애사에서 자신의 연애사를 보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고통을 본다. 다른 사람의 부모님을 보며 자신의 부모님을 보게 되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서 자신의 역사에 있는 어려움을 본다. 인간은 타인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그대로 느끼기 어렵다. 흔히 말하는 공감이란 이렇게, 타인의 사연 속 나로서 이루어진다. 내면화할 수는 무언가가 자신의 속에 있어야 하고 그 안에 타인이 존재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사실 공감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타인의 기쁨과 타인의 슬픔을 그대로, 자신의 슬픔과 기쁨으로 내면화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사연 속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울고 그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다른 사람을 위해, 그 사람만을 위해 울고, 그 사람만을 위해 슬퍼하고, 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래야 하고,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나는 그러고 싶고, 그러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간다. 나는 누군가의 괴로움과 슬픔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나의 고통을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가진 고통과 슬픔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은 나와 같이 너무 힘들 테니까. 비록 사랑받고 싶고 이해받고 싶고 위로받고 싶지만 나의 위로를 위해 힘들어할 누군가가 있지 않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나는 이처럼 괴로울 거다. 나에 의해서도 힘들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힘들 거다. 나의 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누군가에 의해서 상처를 받을 거고, 답답해하기도 하겠지. 그래도 괜찮다. 나는 나로서 얼마든지 괜찮아질 수 있다. 괜찮아질 수 있을 거다.

그냥 세상에 괴로운 일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세상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그래야 한다면 나는 그렇게 되고, 그렇게 살아간다. 세상에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 사람들이 앞으로 더 많아졌으면 좋겠고, 더 많아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힘들어할 수밖에 없다면 빨리 괜찮아지기를, 그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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