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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교육을 다시 들여다보다.

by 김노하 Norway


나는 한국에서 대학을 마쳤고 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상징적인 시어에 감탄하고, 소설의 문장에서 암시와 복선을 찾아내는 희열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국어 수업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교사가 됐다. 밑줄 긋는 수업을 지양하고 다양한 활동 하려고 애썼다.


고2 문학 교과를 맡았을 때의 일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큐레이션 한 시집 한 상자를 들고 수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잔잔한 피아노 음악을 틀어줄 테니 시집을 읽어보라고 했다. 읽고 있는 시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시집을 추천해 주었다. 시집이란 것을 처음 읽었다는 아이도 있었고, 빈둥대다가 무료한 김에 시집을 펼치는 아이도 있었다. 시험에 나오지 않을 거란 생각에 후다닥 활동 기록을 적고 자기 공부를 하는 아이도 있었다.

‘이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친구들과 함께 시집을 읽는 기회가 언제 또 있을까?’ 이런 생각하면서 수업을 계획했었다. 학기 초반이 지나고 교무실에서 다른 국어 교사가 나에게 말했다. 내 수업은 아이들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논쟁을 시작했지만 금방 그만두었다. 시험 진도는 나갈 거라고 문제없을 거라고 말했다. 교육관이 달랐고 더 이상 대꾸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중학교 때까지 하굣길에 서점에 들러서 시집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책을 고르는 척하면서 한 권을 읽고, 이 시집, 저 시집 돌려가며 읽다가 눈치껏 가끔 책을 사서 나왔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시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시를 즐기는 경험을 해주고 싶었다. 읽지 않는다면 시집을 읽는 분위기라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한 학기에 겨우 3시간이었는데, 그 시간이 쉬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다.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지능적인 기계들로 채워질 것이다. 두 딸을 보면서 나는 묻는다. 너희 세대를 위해 내가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생존 역량은 무엇일까? 불안감에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강의를 듣고, 책이나 칼럼도 읽는다. 가장 솔깃한 건 AI 분야의 전문가나 교육분야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 이야기다. 그들의 공통적인 마무리는 결국 “나다움을 찾아야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힘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이다. 자기 삶의 ‘왜’를 분명히 알고(나다움), 그 ‘왜’를 타인과 함께 구현하는 ‘어떻게’를 갖추라는 것(사회정서역량)이다.


AI를 잘 활용하려면 질문을 잘해야 한다는 말이 한동안 유행했다. 전문가들은 좋은 질문은 어디서 나오는지 다시 고민을 했다. 결국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고 싶은지—즉 나만의 왜가 분명할 때 비로소 정확하고 힘 있는 질문이 나온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지점에서 멈칫한다. 스스로에게 묻고 답해 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다움은 결과가 없는 과정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잘하는 것·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 꾸준히 스스로에게 묻고 조율하는 과정이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지? 무엇을 할 때 즐겁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지?"와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살아가야 한다.


노르웨이에서는 한 살배기 아이에게도 무엇을 먹고 싶은지, 어떤 놀이를 하고 싶은지 묻는다. 유치원에서도 같다. 언어로 소통이 되지 않아도 아이들은 눈빛·표정·소리로 자기표현을 하고, 어른들은 그 신호를 존중한다. ‘어른 말씀을 잘 따르면 된다’는 규범 속에 자라온 나에게는 낯선 방식이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어른들이 결정하고 이끌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스스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되묻고 선택하며 실패와 성공을 반복해 본 경험의 축적이야말로 장차 나다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왜'의 근육이다.


'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떻게'에 대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나다움을 타인과 함께 구현하는 방법을 교육적으로 해석하면 바로 <사회정서학습(SEL: Social-Emotional Learning)>이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나다움이 '왜'를 찻는 일이라면, 사회정서학습은 그 '왜'를 타인과 함께 현실로 옮기는 방법이다. 이 분야의 역량은 책으로 공식 외우듯 익히기 어렵다. 자전거를 타고 수영을 배우듯 직접 경험해야 하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익혀야만 한다.


노르웨이에 사는 아이들은 시시때때로 '왜'와 '어떻게'가 만나는 지점에서 자라고 있다. AI가 일상을 재편하는 지금, 나다움으로 ‘왜’를 세우고, 사회정서역량을 키우면서 ‘어떻게’를 연습하는 사람, 그 사람이 변화의 파도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노르웨이에서 마주한 작고 소소한 장면들을 기록하려 한다. '왜'를 찾기 위해, 그리고 '어떻게'를 익히기 위해.


사회 정서 교육.png


|참고| 국제 표준 용어 SEL은 보통 ‘사회정서학습’으로 옮기고, 아이들이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지를 말하고자 할 때 사용한다. 그리고 ‘사회정서교육’은 교육기관이나 지역사회가 사회정서학습을 어떻게 가르치거나 운영하는지를 말할 때 사용하는 용어다. 이 글에서는 한국인 어른의 시선으로 노르웨이 사회정서교육 프로그램이나 활동들을 기록하게 될 것이므로 "사회정서교육"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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