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는 나에게 안 맞아.’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면 내 의지로 달리기 했던 기억이 없다. 학교에 늦었을 때 어쩔 수 없이 달렸고, 운동회나 체육대회 때는 양심껏 달렸다. 조금만 달리면 허벅지 근육이 찌릿해졌고, 땀을 흘릴 때의 찝찝함도 달리기를 멀리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달리기는 경쟁의 느낌이 강했다. 옆 사람을 이기는 것이 중요했고, 이어달리기할 때도 조금 더 빠른 아이가 선수로 뛰는 것이 당연했다. 달리기는 1등을 정하는 운동이고, 그 경쟁에서는 소외되는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했다.
달리기에 대한 생각은 노르웨이에 살면서 천천히 바뀌었다. 첫 아이를 출산한 뒤 산책 할 때면 유아차를 밀며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아기를 태우고 저렇게 빨리 달린다고?’ 낯설었던 그 장면이 12년이 지난 지금은 이해가 된다. 노르웨이 부모들에게 유아차 달리기는 육아와 운동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지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에는 달리기를 취미로 즐기는 사람이 많다. 달리기로 출퇴근을 하는 사람도 있고, 비가 와도 비를 맞으며 달린다. 우리 부부도 달리기를 일상에 조금씩 들여놓고 있다. 남편은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달리기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달리고 있다. 주중에는 아이들을 수영 코스에 데려다주고 수영장 근처를 달리는 것이 그의 루틴이다. 남편은 나에게도 신발을 사주면서 함께 달려보자고 했는데 슬금슬금 빠질 기회를 찾다가 마지못해 따라 나가게 되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있다. 일단 신발을 신고 나가서 내 수준에 맞게 걷고 달리는 것을 반복한다. 이제는 한 시간 가까이 달려도 예전처럼 허벅지 근육이 따갑지 않다. 땀을 흘린 후에는 개운함을 즐기기도 한다. 무엇보다 달리기에 대한 기분 좋은 기억이 생기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다.
101년 전통의 이어달리기 행사, 홀멘콜렌 릴레이 마라톤
남편은 지난 주말 '홀멘콜렌 릴레이 마라톤(Holmenkollstafetten)'에 참가했다. 매년 5월 오슬로에서 열리는 이 대회는 1923년에 시작되어 올해 101주년을 맞이했는데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릴레이 달리기 행사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처음엔 엘리트 선수들을 위한 경기였지만 지금은 기업, 학교, 가족, 친구끼리 팀을 꾸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장애인과 시니어 팀도 함께할 수 있어서 모두를 위한 시민 축제이자 지역의 전통 행사로 여겨진다.
올해 대회에는 약 5,000개 팀이 참가했는데 한 팀 구성원이 총 15명이니 참가 인원만 해도 7만 5천 명. 역대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남편이 다니는 회사에서도 20여 개 팀이 출전했다. 대회 코스 길이는 약 18.45km로 오슬로 시내와 홀멘콜렌 지역의 언덕을 지나야 해서 급한 오르막과 내리막 구간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 참가자가 동일한 거리를 뛰는 것이 아니라 주자의 체력과 실력에 따라서 구간과 거리를 나누어 맡는다. 평소에 달리기하던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하며 팀 전략을 짜고, 무사히 완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재미있는 것은 이어달리기 코스가 진행되는 홀멘콜렌 언덕과 도심지 마을의 분위기다. 골목마다 사람들로 꽉 차고, 응원이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진다. 동네 아이들은 집 앞에 탁자를 펴고 직접 만든 케이크와 음료를 팔기도 한다. 부모들은 아이들과 함께 국기를 흔들며 참가자들을 응원한다. 달리는 사람도,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함께 축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는 것. 홀멘콜렌 릴레이 마라톤이 100년 넘게 이어질 수 있는 힘이란 생각이 들었다.
청소년 버전, 티네 이어달리기 대회(Tinestafetten)
남편이 릴레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 일주일 전, 딸아이도 티네 이어달리기 대회(Tinestafetten)에 참여했다. 1993년에 시작된 이 행사는 노르웨이 육상연맹과 유제품 회사 TINE, 그리고 각 지자체가 함께 주최하는 전국 규모의 대회다. 여러 해에 걸쳐 기네스 기록 도전 이야기가 나올 만큼 큰 행사이면서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청소년 스포츠 행사로 주목받고 있다.
딸 행사 당일 아침, 집 근처 가까운 육상 경기장으로 등교했다. 전국 행사지만 한 장소에서만 대회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지역 단위로 300개에서 350개의 장소에서 동시에 행사가 치러진다. 딸아이 말로는 근처 10개의 학교가 모였다고 한다. 참가한 학생들은 모두 'TINE' 기업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경기에 임한다. 8명씩 한 팀을 이루어 각자 200미터씩 이어 달리면 된다. 아프거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모든 학생이 팀을 이뤄서 선수로 뛸 수 있다. 딸에게 “기록은 안 쟀어?”라고 물으니 “그냥 열심히 뛰면 돼. 응원도 하고!”라고 답했다. 단순하지만 그 말 안에 이 행사의 본질이 담겨 있는 듯했다.
노르웨이의 이어 달리기 행사는 기록이 아닌 함께 완주하는 경험을 남기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경쟁보다는 참여, 순위보다는 응원이 중심인 이런 행사를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달리기는 즐거운 기억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노르웨이 사회가 중요시하고 지켜나가려는 ‘공동체’와 ‘협력’이라는 키워드가 이런 행사를 통해서 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 명약관화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