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노르웨이 공립학교 7학년에 다니고 있다. 한국으로 치면 초등학교 6학년이다. 11월 중순쯤, 과학 시험을 친다는 공지가 있었다. 집에서 따로 공부할 수 있는 교과서나 문제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에게 물어봐도 "수업 시간에 공부한 걸로 그냥 치면 돼"라고 했다.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없었고 그냥 잘 알아서 하겠지 생각했다.
며칠 후 시험지로 보이는 종이가 거실 테이블 위에 있었다. 학교에서 시험을 쳐도 시험지를 집에 가지고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엄마, 시험지에 사인받아 오라고 하셨어. 사인해 주세요."
"아, 그래? 한 번 볼까?"
나는 본능적으로 점수에 눈이 먼저 갔디. 36점 만점에 30.5점. 아이에게는 "와! 잘했네, 이렇게 문제가 많았어? 열심히 적었네!"라고 말은 하면서도 '틀린 5.5점은 어디서 깎였을까?'가 더 궁금했다. 아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보다 무엇을 몰랐는지를 찾으려고 했다. 아이도 맞힌 문제보다는 틀린 문제가 신경이 쓰였는지 2번 문제를 가리키면서 “설명하고 그림도 그리는 것 중에 하나만 하면 되는 줄 알았어. 설명을 썼다면 점수를 다 받을 수 있을 거야.“라고 했다.
그다음에 눈에 띈 건 5번 문제였다. “에너지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아이는 투박한 답을 적어 냈다.
-에너지는 사물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하는 무언가입니다.
나는 아이의 답을 읽고 '이게 무슨 말이지?' 싶었다. 그런데 2점이나 점수를 받았다. 그리고 선생님은 아이의 답을 틀렸다고 하지 않고 대신 파란 펜으로 이렇게 답을 쓰면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는 선생님의 점수 부여와 피드백 방식을 보면서 노르웨이 교육이 지향하는 사회정서 학습(SEL)의 핵심인 ‘비계(Scaffolding)’를 보았다. 선생님은 아이의 직관적인 이해를 부정하지 않고 존중했다. 부족함을 지적하여 좌절감을 주는 대신, 아이가 도달한 현재의 이해 수준 위에 과학적 정의라는 디딤돌을 하나 더 놓아준 것이다.
이런 피드백은 시험을 ‘내가 틀린 것을 확인하는 심판의 시간’이 아니라 ‘내 생각을 선생님과 조율하고 배움을 확장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 이는 구성원 개개인의 속도를 존중하고 기다려주는 노르웨이 사회의 분위기와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지를 넘기다 보니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바로 “그림과 글을 모두 사용하시오(Bruk både tekst og tegninger)”라는 문제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 방식은 글쓰기에 서툰 아이들에게도 ‘나도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를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표현 방식을 허용함으로써 아이들의 ‘학업적 자기 효능감’을 지켜주는 배려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이 시험을 칠 때 아이들이 가장 시간을 많이 들여서 답을 쓴 문제가 10번이었을 것 같다. 댐의 위치 에너지가 운동 에너지를 거쳐 전기 에너지로 바뀌는 과정을 통째로 그리고 설명하는 문제였다. 긴 호흡으로 현상을 설명하게 하는 문제들은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야 이런 시험을 쳤지만 이런 문제들을 어릴 때부터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르웨이 아이들은 객관식, 오지선다형 시험을 치지 않는다. 정답을 맞히는 것, 점수로 아이의 학습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 평가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에 아이가 친 과학 시험지(단원 평가)를 보면서 시험은 정답과 오답을 가르는 차가운 판결문이 아니라, “네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구나, 멋지다. 그리고 여기를 더 알면 완벽해질 거야”라고 말 건네는 교육의 한 과정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AI 시대의 평가는 앞으로 더 많이 달라져야 겠지만 OMR 카드따위는 버리고 이런 방식으로부터라도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어른들에게 질문을 던져 보고 싶다.
글을 쓰면서
개인적으로 저는 '평가'에 관심이 많아요. 평가의 본질은 타인과의 비교가 아닌, 스스로 자신의 학습 과정을 확인하는 데 있는 거잖아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가 학생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국 학교의 평가는 크게 바뀌지 않았어요.
노르웨이에서 아이를 키우다 보니 이곳의 아이들은 '누가 나보다 잘했어, 못했어'를 염두에 두기보다 '내가 이걸 이만큼 했다'에 더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것 같아요. 학교에서도 사람마다 잘하고 못하는 것이 다르고,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늘 강조하고요.
아이의 과학 시험지를 보면서 이런 평가라면 좀 더 자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들은 힘드시겠지요. 학부모의 욕심입니다.
그럼 아이의 과학 시험지를 살짝 공개합니다.
[노르웨이 초등 7학년 과학 시험: 에너지와 전기]
1. 참 또는 거짓 (Sant eller usant)
다음 문장이 맞는지 틀린지 표시하시오.
에너지는 생성될 수 있다.
답: 아니오 (Nei) - 에너지는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고 형태만 변합니다 (에너지 보존 법칙).
에너지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답: 예 (Ja) - 운동, 위치, 열, 화학, 전기 에너지 등이 있습니다.
전류는 전하의 이동이다.
답: 예 (Ja)
배터리는 에너지원이다.
답: 예 (Ja)
절연체(부도체)는 전기가 통하는 물질이다.
답: 아니오 (Nei) - 전기가 통하는 물질은 도체(Leder)입니다.
플라스틱은 좋은 절연체가 될 수 있다.
답: 예 (Ja)
자전거를 탈 때 운동 에너지를 사용하는가?
답: 예 (Ja)
2. 전기 회로란 무엇인가? 설명하고 그리시오.
모범 답안: 전기 회로는 전류(전자)가 전원에서 나와 전선을 타고 다시 전원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연결된 닫힌 경로(closed loop)를 말합니다. 회로가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있어야 전구에 불이 들어옵니다. (그림: 배터리와 전구가 끊김 없이 연결된 그림)
3. 직렬연결을 회로도로 그리시오.
모범 답안: 배터리, 전선, 그리고 2개 이상의 전구가 한 줄( 하나의 경로)로 이어진 회로도를 그립니다.
3-1. (서술형) 직렬연결에 전기를 연결하면 전구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하시오. 또한 전구 하나를 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하시오.
모범 답안:
밝기: 전압을 나누어 가지기 때문에 전구가 하나일 때보다 빛의 밝기가 어두워집니다.
제거 시: 직렬연결은 길이 하나뿐이므로, 전구 하나를 빼면 회로가 끊겨 모든 전구가 꺼집니다.
4. 당신이 아는 에너지의 형태들을 말해보시오.
모범 답안: 운동 에너지, 빛 에너지, 열 에너지, 화학 에너지, 전기 에너지, 위치 에너지, 소리 에너지, 원자력 에너지 등.
5. 에너지란 무엇인가?
모범 답안: 과학적 정의로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핵심은 에너지가 새로 생겨나거나 없어지지 않고, 단지 다른 형태로 변환된다는 점(에너지 보존)입니다.
6. 전하가 무엇인지 설명하시오. (설명과 그림)
모범 답안: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는 양성자(+)와 전자(-)를 가집니다. 마찰 등을 통해 전자가 이동하면 물체가 전하를 띠게 됩니다. 같은 극끼리는 밀어내고(척력), 다른 극끼리는 당깁니다(인력). (그림 예시: 풍선을 머리카락이나 옷에 문질러 정전기가 발생하는 모습)
7. 왜 전선에 금속을 사용하는가?
모범 답안: 금속은 전자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 전기를 잘 흐르게 하는 도체(Leder)이기 때문입니다.
8. 위치 에너지(잠재적 에너지)란 무엇인가?
모범 답안: 높은 곳에 있는 물체나 당겨진 활시위처럼,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어서 나중에 운동 에너지 등으로 변환될 수 있는 상태의 에너지를 말합니다.
9. 배터리의 두 연결 지점(극)의 이름은 무엇인가?
모범 답안: 양극(플러스, +)과 음극(마이너스, -)입니다.
10. 수력 발전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시오. (글과 그림 모두 사용)
모범 답안:
댐(저장): 물을 가두어 수위를 높입니다. (위치 에너지)
수로(낙하): 물이 아래로 빠르게 떨어지며 흐릅니다. (위치 에너지 → 운동 에너지)
터빈(회전): 흐르는 물이 터빈(날개)을 돌립니다. (물의 운동 에너지 → 기계적 에너지)
발전기(생산): 터빈과 연결된 발전기가 돌아가면서 전기를 만듭니다. (기계적 에너지 → 전기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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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문제 번역과 모범 답안은 AI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직접 할 능력이 부족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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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과학 시험 사례 <사회정서 교육(SEL)과의 연결 고리>
1. '비계(Scaffolding)'를 통한 심리적 안전감의 실천 사례
2. 학업적 자기 효능감을 지키는 포용적 평가 방식, 자아 존중감 형성
3. 비교가 아닌 '성장'에 초점을 맞춘 건강한 자아 형성 (자기 조절과 자기 성찰), 등수로 줄 세우지 않는 환경은 타인을 경쟁자가 아닌 협력자로 인식하게 하여 '사회적 인식'과 공동체 의식을 건강하게 발달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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