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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Jan 09. 2024

사랑, 이별, 죽음에 관한 짧은 소설

정이현, 임솔아, 정지돈 소설집



Part1 사랑 


: 정이현의 <우리가 떠난 해변에> 


낭만적 사랑, 하면 떠올릴 법한 두 이야기가 교차되며 흘러간다.


첫번째는 첫사랑. 열일곱에 만나 이십여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주인공 설의 사랑은 이미 종결되었음을 소설 도입에서부터 독자에게 알려준다. 두번째는 운명적 사랑. ‘사회적 조건에 종속’됨 없이,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마치 운명처럼 사랑에 빠졌던 이들의 이야기다. 소설은 이들 사랑의 현재를 추적하기 위해 방송작가 설과 피디 선우가 Y시로 떠나는 데서 시작된다.


이 소설은 왜 ‘이별’이 아닌 ‘사랑’ 파트에 놓여 있을까.


그 시절 특별했던 사랑이 세속과 세월에 모양을 바꿨든 결국 퇴색하고 풍화했든 간에, 사라지지 않은 채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어서. 그래서 문학과 인간사의 유구한 질문,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일까’ 묻지 않을 도리가 없어서. 이건 사랑 이야기가 맞구나 했다.


"그렇잖아요? 우리 부부가 지금 이렇게 됐다고 해서, 그때의 특별한 사랑이 사라지나요, 없어지나요?
아니요, 사라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아요, 하고 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다고 정말 그대로 있는 걸까요, 하고. 
모든 멈춘 것은 퇴색하고 틈이 벌어지고 낡아진다." p34


Part2 이별


: 임솔아의 <쉴 곳>


변해버린 시간과 관계와 사람들의 이야기. 그러니 이별이 맞다.


자기가 운전을 하면 멀미를 안 하는구나.”라는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하지만 오랜만에 오빠의 집으로 직접 운전하며 가는 길에 주인공 민영은 심한 멀미로 괴로워한다.


인생의 운전대를 거머쥔다는 게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길의 향방과 속도가 타인의 손에 맡겨진 채 뒷좌석에서 멀미에 시달리는 듯한 일을, 운전대 앞에서도 언제고 어떤 길에서든 겪게 된다. 운전대를 돌려 쉴 곳을 찾아보지만, 진정한 쉼을 과연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민영에게 그곳은 자신을 부모처럼 키워준 오빠와 올케가 있는 집일까.


마지막 장면에서 민영이 그들에게 언젠가 배운 말들을 되돌려주는데, 좋았다. 도무지 돌파구가 없어 보일 때, 그럼에도 다시 길을 나설 때, 그 길에서 웅덩이에 빠지고 급브레이크를 밟고 떨면서 비상등을 켜는 순간, 그때마다 사랑하는 이들의 손을 잡고 나눌 법한, 이 평범한 말들이 가끔 생각날 것 같다. “그냥 해봐. 아무렇지도 않게.” “걱정 마. 아무렇지도 않아.” 이 별거 아닌 말을 들으러 쉴 곳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언니, 해볼래? 자기가 운전하면 멀미가 안 나.” “안 한 지 오래됐는데.” 
“그냥 해봐. 달걀 꺼내듯이.” 그럴까?라고 말하며 정화는 활짝 웃었다. 
(...)
차가 크게 휘청였고 정화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웅덩이였다. 정화의 손이 떨려왔다. 민영은 비상등을 켰다. 한쪽 손을 정화의 손 위에 포갰다. 
“걱정 마. 아무렇지도 않아.”
민영은 민기에게 배운 말을 뱉었다. 정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p70


Part3 죽음


: 정지돈의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


'나'는 여자친구 모어와 함께 그녀의 죽은 남편이 냉동보존되어 있는 연구소를 찾아간다. 그는 스물다섯에 필즈상을 수상한 유명한 수학자로 3일 후 부활할 예정이다. 여친의 첫사랑이자 변함없는 흠모의 대상을 향한 질투, 그의 이력과 기행, 세간에서 떠도는 말들로 인한 호기심, 부활의 과정을 목도하는 일에 대한 흥분, 긴장 속에서 드디어 나는 죽음에서 돌아온 그를 만나게 되는데...


정지돈 작가의 소설이 맞나 싶을 만큼 페이지가 술술술 넘어간다. 죽음, 부활, 영생. 존재란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는가. 나를 나로 만드는 건 무엇일까. 깐깐한 주제를 이토록 가볍고 산뜻하게 풀어가다니, 재밌네, 큭큭거리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다시 읽어 보니 이게 가볍고 산뜻한 이야기가 아니었어. 퍽 충격적인 결말을 암시하는 조각들이 이야기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최근에 괴담집 두 권을 내리읽었는데 거기 실려도 좋았겠다(그중 하나에 이미 그의 단편이 실려 있었지만). 그 이야기들을 통틀어서 가장 소름 돋았다.


그런데 제목이 내 여자친구의 ‘남편’이 아니라 왜 ‘남자친구’일까. (제목에서 느껴지는 '막장 드라마 vs. 로맨틱 코미디' 재질은 차치하고) 엄밀히 따져보자면 내 여친의 남친은 부활한 수학자가 아니라 주인공인 '나' 아닌가. 이 제목이 남편과 '나', 두 사람 모두를 가리킨다고 생각해보니, 흥미롭다. 어쩐지 우로보로스가 떠오르는데, 그건 결말 탓도 있으려나. 최첨담기술이 동원된 빙의라니 듣도 보도 못한 부활의 방식이라 참신하고 혁신적이긴 하지...만 주인공을 생각하면 눈물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렇다. 애인이 “전에 사귀었던 사람을 (속 좁게) 의식”하고 경계해야 마땅하다. 그가 질투심 많고 악명 높은 천재라면 말이지. 산 채로 잡아먹힐지도 몰라. 


“철학자 브라이언 캔트웰 스미스는 거리감은 그것을 향한 행위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단지 물리적인 요소만으로 거리감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것을 향한 행위가 있다면 우리는 함께 있는 것이다.” p99

"이렇게 생각해볼까요. 만약에 지금 여기의 내가 진짜 내가 아니라 파운데이션에서 나를 모사해 만든 가상 존재라면 어떨까요.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가상... 존재세요?
아니, 그렇게 생각해보라는 거지.
FM-2080은 지금 상황이 재밌다는 듯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구분할 수 있어요?
못 하죠.
그렇죠. 하지만 더 이상한 건 저도 그걸 구분할 수 없다는 거예요.
아...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영생이니 불멸이니 이딴 이야기는 다 엿 먹으라고 해요.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으니까요."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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