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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Mar 04. 2024

네가 없는 날의 쓰기




2024. 2. 27. 불의 날. 


“이렇게 어느 구석에선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구석에서 눈에 띄지 않고, 물에 잠겨 떠내려가는 나무토막처럼 세월에 떠내려가는 것이다. 나무토막은 아주 가라앉지 않아야 한다. 한곳을 빙빙 돌지도 말아야 한다. 그리고 물에 거의 잠겨 잘 보이지 않아야 무사히 떠내려간다. 
봄은 구석이다. 여름도 구석이다. 한 달도, 일주일도, 오늘도 구석이다. 이 방도, 이 글도, 왜 쓰는지 모르는 이 작은 글도 구석이다. 글은 원래 왜 쓰는지 모르는 것이다. 글을 쓰다 말고 짚는 이마도, 내쉬는 한숨도 모두 구석이다.”
 
- 이수명, <내가 없는 쓰기>, p114 


이수명 시인의 2년 전 일기를 읽고 있다. 시인이 보낸 하루가, 그날의 문학적 단상이, 시간의 흐름과 동떨어진 듯하면서도 계절의 흐름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2022년도가 통째로 들어가 있다. 이제 시인은 봄의 한가운데 들어섰지만 나는 아직 2월이다. 얼마 전에는 함박눈이 무섭도록 쏟아졌지만 요 며칠간 차갑고 맑은 대기에서 봄의 기척을 느낀다.  


짧은 밤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 어깨를 움츠리고 걷는다. 아직은 차가운 밤공기 탓이라 생각해보지만, 실은 그것도 이유가 아니라는 걸 안다. J에게 전화했다.  


오늘도 달이 크고 노랗다, J야. 


아, 그래? 그렇구나아. J가 말꼬리를 늘리며 웅얼거리는데 목소리부터 이미 잠에 취해 있다. 시의 경계를 넘어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자취방으로 혼자 가본 길이 피곤하지 않았을 리 없다. J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내내 씩씩했지만. 얼른 자라는 인사말 뒤에 서둘러 덧붙였다. 난방비 아낀다고 춥게 자지 마. 통화는 간단하게 끝이 났고, 나는 이런 마음이 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발밑에서 자갈들이 잘그락거릴 뿐 거리는 고요하고, 이 인적 없는 길에 나만이 서 있는데, 구름 한점 없는 밤하늘 동그마니 떠 있는 오늘의 달도 하필 어제처럼 크고 노랗고, 예뻐서, 어제의 달을 함께 보던 우리가 생생하게 떠오를 수밖에 없다. 


어제는 마지막 짐을 옮겨주려고 J의 자취방에 다녀왔다.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다. 온종일 편두통에 시달렸다. 초반에 미리 약으로 잡지 못한 두통은 머리 한켠에 묵직하게 자리잡고 사방으로 뿌리가 뻗쳐나가는 것 같다. 그리고 소음. 도시의 시끌벅적한 활기로 인해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에너지가 송두리째 빨리는 기분이었다. 인구밀도가 매우 낮은 동네에서 십수년 지낸 탓에 이런 소음에 면역력을 잃어버렸는지도. J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동네를 샅샅이 둘러보다가 한 카페로 도망치다시피 들어갔다. 거의 만석이다시피한 그곳에서도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 소음이 결정타였다. 신경줄이 거의 닳을 지경이 되어서는 느지막한 시간에 집으로 출발했다. 온가족이 다음날 조조로 파묘를 볼 계획이었기 때문에 J도 동행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뭐 넋이 털리면 대체로 그러하듯이(나는 왜 변하지 못하나) 그때도 아무 말이나 내던지던 중에(나는 왜 입을 다물지 못하나), 내가 그랬다. 우스갯소리하듯 툭(하지만 불온한 의도가 들어 있지 않았나).   


엄마 인생의 절반을 너한테 갈아넣었다... 

J가 바로 받아쳤다.

아싸!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한마디 더 보탠다. 

맛있었다! 


그러곤 저도 웃긴지 큭큭거린다. 둘이 한바탕 크게 웃는데, 그 웃음소리가 그날 내게 끈질기고도 눅진하게 달라붙은 것들을 말끔히 털어냈다. 바로 그때, 무심코 탄성을 내지른 건 나였을까, 너였을까, 어쩌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달을 발견했다. 휘어진 도로를 따라 차가 비스듬히 회전하자 바로 정면에 큼지막하고 샛노란 달이 있었다. 고가도로 가까이, 묵직해진 몸을 어쩌지 못하고 내려앉은 듯한 달을, 혹은 그제야 느긋하게 떠오르는 달을 우리는 함께 보았다. 



J가 집을 떠나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사진: Unsplash의Pascal Debru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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