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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Mar 08. 2024

더 부드럽게, 더 천천히

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오직 이 정원을 따라서 쓰인 글이다.
어느 날 내가 우연히 도착하게 된, 투야나무 울타리 뒤편의 보이지 않는 정원.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p251



2024. 2. 14. 물의 날.


여러 목소리들에 둘러싸여 겨울을 보낸다. 결이 다른 내성적인 목소리들이다. 그들은 아주 먼 곳의 이야기들을 저마다 다른 리듬과 어조로 들려준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같은 방식으로, 쓰인 것보다 "더 '부드럽게(dolce)', 더 천천히(lento)' 마음속으로 노래하면서 읽었다. 그러자 가장 간단한 문장조차도 감동적인 어조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p174)". 그래서 먼 훗날 이 겨울을 하나의 곡조로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여러 목소리가 조화를 이룬 하나의 아름다움으로. 내가 보낸 나날도 함께한 책들도 점점 더 옅어져 그저 어떤 분위기로만 남는다 해도 그건 그것대로 시간을 기억하는 괜찮은 방법이지 않을까. 


명절 전에는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여행가방으로 작은 도서관을 꾸린다는 '베를린 서가의 주인'만큼은 당연히 아니겠으나, 여느 독서가들처럼 나 또한 여행지에 들고 갈 책을 고르는 일에 공을 들인다. 여행의 순조로운 시작을 위해 이 일은 동행인 모르게 행하는 게 낫다.


나는 고심 끝에 캐리어 속에 한 권을 넣고 전자책은 포기했다. 엄마, 잘했어. J의 말에 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뗀다. 내 백팩에 두 권이 더 들었다는 걸 모르고 한 칭찬이었다. 남편은 안 봐도 알겠다는 듯 고개만 절레절레 젓는데,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그 책들은 "읽는다는 직접적인 필요보다 여행지인 장소에 어울린다고, 그러므로 반드시 동행해야 한다고 느끼는 책들"이며, "그 책들은 그곳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그곳으로 떠나는 것이다(<작별들 순간들> p11)." 결과적으로 그들이 했을 법한 예측이 맞았다. 한 권밖에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매일 할당받는 내 에너지로는 욕심을 감당하지 못하는데도, 내 마음은 언제나 딴소리를 한다.


머무는 곳곳에서 배수아 작가의 산문을 읽었다. 여행하면서 동시에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 온화하고 호젓한 겨울 바다를 눈앞에 둔 채로 나는 안개가 발을 집어삼키며 땅에 번져 흐르는 11월의 숲 안쪽 호수를 바라보았고, 저 노란 꽃 무더기가 배추꽃이냐 유채꽃이냐 셋이서 따지다가도, 보라색 초롱꽃과 노란색 앵초가 섬처럼 군락을 이뤄 일렁이는 독일의 풀밭에 나 홀로 머물렀다. 배 한 척 없는 포구에서 하얀 부리와 검은 머리에 온몸이 잿빛인 유라시아물오리 떼를 보고 온 날에는, 책을 펼치고 눈 내린 날 아침의 호수로 산책을 떠났다. 거기서 그녀와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보는 무채색 아름다움을 마음에 새겼다. 아직 덜 얼어붙은 호수를 활기차게 젓는 들오리떼와 나뭇가지 위의 눈을 흩뿌리며 날아오르는 까마귀들을, 겨울 호밀밭에 서 있던 노루들이 숲으로 달려가고, 석양빛이 뒤섞인 구름을 배경으로 묽은 어둠 속에 숲이 차츰 잠기는 것을, 그렇게 고요히 얼어붙은 풍경과 그 속에 정물처럼 서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프롤로그에서 그녀는 처음에는 순간에 대해서, 글을 쓰는 순간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쓰려 했으나, 막상 쓰기 시작하자 하나의 순간은 동시에 존재하는 많은 순간들이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그녀의 글은 어느 한 지점에 머물지 않는다. 어쩌다가 내가 이곳에 이르렀나 의식 못하게끔 매끄럽게 시공간을 오가며 여러 순간들을 부드럽게 포개어 놓는다. '영혼의 서쪽 벽'과 '9월의 황무지에서'는 그런 글쓰기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 글들의 마지막 문단은, 그녀가 넘나든 순간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그 자체로 마치 한 편의 시 같았고, 그래서인지 시가 탄생하는 과정을 읽은 듯도 했다.


'쓰기'만이 아니라 '읽기' 또한 그렇지 않을까 나는 생각했다. 그 행위가 이뤄지는 한 순간에 대한 것은 아니라고, 여러 중첩된 시간들로 남는다고. 그녀가 말한 바 독서는 "한 권의 책과 나란히 일어나는 동시성의 또다른 사건"이기에 책 속에 담긴 순간들과 더불어 내가 지금 그 책과 함께하는 순간과 그 책이 환기시킨 내 과거의 순간들이 모두 한데 겹쳐지는 것이다.


누군가 이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녀는 '읽기'에 대한 글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누군가 이 독서가 내게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보기'나 다름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녀가 베를린 서가의 주인과 함께 여러 계절 글을 쓰며 머물렀던 오두막과 투야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정원, 그 뒤편에 펼쳐진 숲과 안쪽 호수, 그 너머의 섬, 깊고 울창한 숲이 숨겨놓은 황금 밀밭, 비 내리는 묘지와 입구를 찾을 수 없었던 폐쇄된 공항... 책을 읽는 동안 그녀가 도달했던 숱한 순간들을 보았다고. 내가 떠난 여행지에서. 그곳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그곳으로 떠나는, 여행의 필연적인 동행자가 되어.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마른 풀줄기가 들어가자 화르르 소리와 함께 뜨거운 불길이 엄청난 기세로 높이 솟아올랐다. 동시에 어떤 기억이 함께 불처럼 솟아 올랐다. 나는 소스라치며 뒷걸음쳤다. 오래전 어느 날 당신으로부터 온 편지... 그 순간 문득 작별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특정 시기에만 국한된 개별 사건이 아니라, 삶의 시간 내내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비밀의 의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일생은 그것을 위해 바쳐진 제물이었다. 우리가 평화롭게 정원의 흙 위로 몸을 기울인 동안, 당신의 몸 위로 빛과 그늘이 어지럽게 얼룩지는 그 순간에도. 작별은 지금, 우리의 내부-숲안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궁극의 사건이었다. 배추흰나비의 애벌레가 몸을 구부리면서 당신의 목덜미 위를 느리게 기어간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집어올린다. 평화와 고요. 오직 빛과 호흡만이 있는 순간. 지금 당신이 불타고 있다는 증거인가? 글쓰기는 작별이 저절로 발화되는 현장이다. 그 아래 아직 당신의 발자국이 움푹 팬 채로 남아 있는 죽은 딱총나무가 내 눈앞에서 저절로 불타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의 내부-숲안쪽-로 간다.” pp.82-83


“세상의 다른 많은 일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아마 한 권의 책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가 일생을 맡기기로 한 그런 일들.”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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