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3층에 들어서자 숨통이 턱 막혀왔다. 아, 오랜만이네 이런 더위는. 찜질방에서 맛볼 만한 밀도의 더위다. 이 시간이면 대개 가득차던 공간이 거의 비어 있었다. 창가 자리에 세 사람이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수행자의 표정을 한 채. 고요함조차 밀도 높게 느껴지는 건 더위 탓이려나.
그런데 마음에 들었다.주저 없이 가장 그늘진 자리에 가방을 풀었다. 선택의 여지도 없긴 했다. 1층은 소란스럽고, 2층은 자리가 차 있다. 일단 버텨보고 정 못견디겠다 싶으면... 따뜻한 라떼가 뜨겁게 느껴진다. 등줄기에 땀이 배고 뒷덜미가 달아오른다. 머리를 질끈 동여맸다. 수험생 모드로 독서하겠네.
예전에는 이런 여름날이 디폴트였다. 그래서 수박은 더 달았지. 남편과 J가 이런 나를 보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겠지. 그들은 내가 잘라놓은 냉수박을 먹으며 오후 6시에 내린다는 큰비를 기다릴 것이다. 이열치열하는 토요일 오후, 나도 이곳에서 비를 기다리며 책을 읽는다.
“한꺼번에 다 하겠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게 겁나는 일이다. 소설이 그렇듯. 시험이 그렇듯. 하지만 한 시간씩, 매일 하루씩 해 나가다 보면, 삶도 가능해진다.”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중에서.
에르베 르 텔리에의 2020 공쿠르상 수상작 <아노말리> 끝냈다. 이 미친듯한 흡인력과 소설적 재미로 흥분한 가슴을 진정시킬 겸, 올초 다짐을 되새기며 게으른 마음을 들쑤셔볼 겸, 금정연 일기로 넘어왔다.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이 책에서 발견했다. 앤 라모트의 "bird by bird"가 떠올랐다. <쓰기의 감각> 원제이기도 한 이 말은 라모트의 아버지가 당시 열살이던 오빠에게 들려준 조언이었다.
"Bird by bird, buddy. Just take it bird by bird."
새를 주제로 보고서를 써야 하는데 석달 내내 놀다가 마감일이 당장 내일로 다가오고... 소년은 억지로 책상 앞에 앉았으나 막막함에 눈물이 터질 것 같다. 바로 그때 아버지가 곁에 앉아 어깨를 감싸고 말하길,
"새 한 마리씩 한 마리씩. 한번에 하나씩 해치우면 돼."
개학식 앞두고 라모트의 오빠처럼 울고 싶었던 날이 얼마나 많았나. 날 가장 괴롭혔던 건 독후감 숙제와 방학일기였다. 그 시절 내게 들려주고 싶다." 넌 훗날 자발적으로 다짐하며 독후감과 일기를 쓰게 될..."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다 헛되...""다 울었어? 자, 눈물 닦고 그럼 첫째 날 일기부터 시작..."
과제도, 글쓰기도, 삶도 하나씩 하다보면 가능해진다. 이런 말은 언제 들어도 좋다. 하루치 위로 그리고 격려로 끝날지라도. 비록 플라스는 가스오븐에 머리를 넣고 생을 마감했으나, 그날이 오기까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게 겁나는 일'을 매일 하루씩, 한 시간씩, 소분하고 감당하려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잠시만 고삐를 풀어놓으면 저 멀리 뻗어나가려는 마음을 움켜쥐고, 바로 이 순간, 여기, 지금의 내게로, 내 손에 주어진 단 하나에만 시선 집중시키기. 그런 애씀을 매일 잊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