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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시 Dec 28. 2018

사랑

음식 동화 8 :: 단호박

"하암...." 동글 양은 오늘도 넓둥그런 하품을 했어요. 도무지 해결될 수 없는 권태로움 때문이었지요. 부모님은 딸의 그런 감정은 '연애'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어요. 기실 그녀 역시 연애, 나아가 결혼도 하고 싶었지만 눈에 들어오는 이는 전혀 없었답니다. 동글 양이 사는 곳에서는 떡 벌어져 듬직한 어깨를 가진 이들이 많이 있긴 했어요. 레몬빛 꽃가루가 흩날리는 노오란 꽃과 함께 프로프즈를 받는 일도 더러 있었고요. 하지만 동글 양은 그 마을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어요. 어쩌면 그건 동글 양이 자신에게 만족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마을 주민들은 모두 동글 양처럼 누우런 몸뚱이에 노오란 속살, 그리고 투실투실한 몸매를 갖고 있었거든요. 넓은 초록빛의 잎사귀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고 동그르르 말려있는 줄기가 땅 위 여기저기로 뻗어 가는 그 마을. 그곳은 '늙은호박밭'이라고 불렸어요.


"에혀..." 길쭉 군도 긴 한숨을 내뿜었어요. 반투명한 비닐 하늘 아래 사는 그는 매일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지요. 언제 떨어져도 이상할 것 없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삶. 언젠가는 하나뿐인 꼭지 손을 놓고 자신만의 삶을 살리라는 막연한 희망은 있었지만. 길쭉 군은 아예 땅에 내려가서 살아보고 싶었어요. 그런 길쭉 군을 향해 형은 '결혼'을 하라고 했지요. 그러나 땅에서 삶을 꾸리겠다는 자신의 꿈과 발을 맞출 상대는 그 마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어요. 기실 길쭉 군 스스로도 투실투실한 흙 위에서의 삶이 조금은 두렵게 느껴졌고요. 아무도 해보지 않은 삶을 산다는 건 일종의 모험이었거든요. 때가 되면 물도 얻어 먹고 밥도 얻어 먹는 따뜻한 비닐 마을에서의 삶. 그 삶을 버리기가 아깝다 아니, 버릴 수 없다는 것이 그 마을 사람들 대다수의 생각이었지요. '애호박밭'이라고 불리는 그 마을 말이에요.  


그러던 어느 날 밤 비바람이 몰아쳤어요. 애호박밭을 감싸고 있던 비닐들 위에도 커다란 빗방울이 거세게 주먹질을 했어요. 우두두두투투투투, 툭툭..툭! 빗방울의 연타발 주먹은 견뎌냈지반 바람이 쥐고 있던 돌멩이들을 떨어뜨리자 상황이 달라졌어요. 투투투투툭. 툭, 투타타타타. 속수무책으로 몸을 찢기고 있는 비닐들. 그 아래에서 비닐 '신'만을 믿고 있던 애호박 주민들은 큰 타격을 입고 말았어요. 얼굴에 상처를 입는 일은 예사. 자신들을 지탱하던 막대기들 아래에 쓰러져 버리기도 하고, 땅바닥 아래로 떨어져 짓이겨지까지 했지요. 길쭉 군도 피해자 중 하나가 되었어요.


이튿 날. 폐허가 된 애호박 밭에서 들리지 않는 울음소리가 이어지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사라진 비닐하우스에서 시작된 울음은 옆의 밭, 또 그 옆의 밭, 또 그 옆의 옆의 밭으로 울려 퍼져나갔지요. 그 울음은 늙은호박밭에까지 가 닿았어요. 간밤의 일 때문에 그곳 주민들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지요. 그들은큰 잎사귀로 서로를 보듬으면서 큰 피해가 없음에 감사를 했어요. 산 아래에 있는 비닐하우스 주민들에 대해 애도를 표하기도 했고요. 동글양도 함께 침묵의 기도를 했고요. 한데 동글 양의 마음에 갑자기 종이 울렸어요.


'뎅그렁'.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소리를 따라 동글 양은 몸 전체를 움직여 구르기 시작했어요. 산 아래로 향하는 것이기에 이동은 어렵지 않았지요. 게다가 산의 몸 역시 비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쉽게 미끄러질 수 있었답니다. 동글 양이 멈춘 곳은 비닐하우스 근처. 그곳에서 그녀는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호박들을 발견했어요. 동글 양과 길쭉 군이 눈을 마주친 건 그 순간이었어요.


"당신이군요."


길쭉 군 쪽으로 굴러간 동글 양은 일그러진 이들을 일으켜 앉혔어요. 자신에게 늘 묻어 있던 호박꽃가루를 상처 위에 발라주었고요. 상처는 길쭉 군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동글 양의 꽃가루는 금세 동이 났어요. 그렇게 애호박 마을에서 몇 날 며칠을 지새운 동글 양. 그 사이에 밭들의 울음은 잦아들었고, 사라진 눈물 틈으로 새로운 것들이 돋아났어요. 위로, 희망, 무던함, 용기. 그중에는 '사랑'도 있었지요. 동글 양과 길쭉 군 사이에서 돋아난 것 말이에요.


돋아난 것은 감정뿐만이 아니었어요. 동글 양과 길쭉 군 사이에서 작은 새싹이 삐죽 손가락을 내밀었거든요. 그 싹은 뿌리를 내리고 허리를 펴서 땅을 향했고, 하늘로는 크고 푸른 잎사귀를 내어갔지요. 그 아래에서 길쭉 군의 초록색 피부와 동글 양의 노오란 마음을 닮은 아기가 태어났어요. 엄마 아빠의 사랑처럼 달디단 단호박 아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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