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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시 Jan 07. 2019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거나

음식 에세이 10 :: 오이 쇠고기 죽

임신 기간을 꽉 채워 출퇴근을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임신 후반부터는 직장 동료와 출근길 카풀을 할 수 있었고요. 하지만 그 전까지는 대중 교통을 이용해서 출퇴근을 했는데요. 버스와 지하철 승객들이 임신부를 대하는 태도에는 제법 큰 차이가 있었어요. 결론부터 말하면 버스를 탔을 때 자리 배려를 훨씬 더 많이 받았습니다. 버스에서 자리 양보를 받지 못한 적은 딱 두 번뿐이었거든요.


반면 지하철을 탔을 때에는 딱 한 번 양보를 받았습니다. 몸은 무겁고 숨은 턱턱 차오르는데 내 앞에 있는 두 다리 건장한 그들은 눈을 딱 감고 있었고요. 그것도 레드카펫(임신부 배려) 의자에서 말이에요. 그들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겠지만, 서운한 감정이 스물스물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임신을 한 동생과 며칠 후 그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말을 듣자마자 울분을 터뜨렸어요.


"언니는 그나마 괜찮은 거야. 나는 너무 힘이 들어서 노약자석에 몇 번 앉았는데 하루는 웬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어린 게 뭐하는 짓이냐'며 혼내더라고. 그 다음부터는 노약자석에 절대 안 앉아!"


수원에서 강남까지 지하철로 출퇴근을 했던 동생. 결국 동생은 아기를 낳기 전에 회사에 퇴직서를 냈습니다. 업무적으로나 생활적으로도 아주 유능한 친구인데 말이지요. 결국 동생이 퇴사를 한 건 소수자이기 때문. 이 이유식을 만들면서 살짝 조마조마했던 것도 소수자와 관계가 있습니다.




오이 쇠고기 죽

    재료(3끼 분량) : 불린 쌀 15g, 쇠고기 20g, 오이 10g, 물 200g

    도구 : 믹서, 체, 이유식 냄비

    과정 

        0. 쌀은 미리 불려놓기 (30분 이상) 쇠고기는 미리 핏물 빼두기

        1. 불린 쌀을 믹서에 갈기 (물 20g과 함께) 

        2. 물 100g과 함께 쇠고기 익히기 (육수 버리지 않기) 

        3. 오이는 껍질과 씨를 제거한 후 작게 썰어 삶기

        4. 믹서에 쇠고기, 오이 갈기

        5. 육수 100g에 불린 쌀 + 간 쇠고기 + 간 오이를 끓이기

        6. 천천히 저어가며 끓이며 적당한 농도 맞추기

       


아기의 입은 오물거리며 그릇의 바닥을 선물해 주었어요. 그후 며칠 동안에도 저는 평소보다 더 아기를 살펴보았는데요. 혹시라도 아기에게 오이 알레르기가 있을까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답니다. 다행히 아기는 그 이후로도 오이를 잘 먹었고요. '소수 집단에 속한 아기'에 대한 엄마의 걱정은 사그라들었어요. 그런데 막상 이 글을 쓰고 동생과 저의 경험들을 차분히 정리해 보니, 오이 알레르기에 대한 저의 염려가 조금은 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혹시 아기가 오이 알레르기를 갖고 태어났으면 그걸 인정하고 살면 될 텐데, 꼭 다른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살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이 땅의 많은 문제들이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벽쌓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떠올려 볼 때, 저는 이미 스스로도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다수와 소수는 상대적인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떠올려 보면 저는 지금도 소수자입니다. 요즘에는 덜해졌지만 한때 이 사회에서 '맘충'이라고 불리는 소수자이고요.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이지요. 그리고 언젠가는 '노인'이라는 소수자가 될 것이고요. 그나마 '임신부'라는 소수자였을 때 제법 많은 배려를 받았습니다. 직장에서는 가장 힘든 업무에서도 제외되었고, 카풀도 할 수 있었으며, 버스 안에서는 자리 양보도 많이 받았고요. 하지만 이건 임신이라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음식 알레르기나 성적 정체성처럼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에 대한 배려를 받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요. 아니, 뉴스 몇 구절만 읽어 보아도 이 사회는 배려 이전에 소수자에 대한 가감 없는 인정조차 없는 곳 같기도 합니다.


소수성이 임신부의 배처럼 드러나는 것이든, 신념이나 정체성처럼 드러나지 않는 것이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아기를 기르며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배려는 그 다음의 문제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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