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람 Jun 13. 2022

35년 워킹맘 선배가 후배 워킹맘에게 1편

  12월. 본격적으로 시작된 학기말 업무에 지쳐있던 목요일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난 중학생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뛴다. 수업 진행은 어렵고, 책상 위 달력에는 칸 마다 해내야 일이 빽빽하게 쓰여 있다. 지칠 대로 지친 오후 3시. 국어 선생님이 도서관으로 수업하러 오셨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선생님이다. 도서관 수업 전에 늘 빈 시간을 미리 확인하고, 수업이 끝나면 "오늘도 고마워요."인사를 챙기신다. 허공에 외치는 듯한 단체 발송 메시지에도 따뜻한 답장을 보내주시고, 작은 간식이라도 꼭 하나씩 들고 와 가만히 내 책상 위에 놓아두신다. 딱딱한 분위기는 점잖은 농담으로 풀어주고, 불합리한 일에 대해서는 'NO'를 외쳐주시는 분이다. 무엇보다 학생들을 정말 사랑하신다. 함께 수업하는 1년 동안 선생님이 학생을 포기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어떻게 문제학생을 지도해야 하는지, 모두가 참여하는 수업을 만드는 방법까지 곁에서 노하우를 많이 배웠다.


  그런 선생님이 수업이 끝나고 1년 동안 도서관에서 수업하게 해 줘서 고마웠다며 선물을 주셨다. 감사해야 할 사람은 난데 내어드릴 게 없는 빈 손이 부끄러웠다. 얼마 전 친한 선생님이 국어 선생님의 멋진 집에 놀러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선생님께 댁이 어디쯤이냐고 여쭤봤다. 어머, 세상에! 우리 집과 가까운 곳이 아닌가! 오가면서 봤던 빨간 지붕 집은 나도 아는 집이다. 선생님은 언제든지 놀러 오라며 기꺼이 초대해주셨다. 우리는 서로의 집을 사진으로 보여주고, 시골 생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님도 시골에서 사신다니 어쩐지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조금 있다가 온갖 창이 띄워진 내 모니터를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아이 키우면서 직장 일을 병행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우리 수람 선생님은 일 욕심도 있는데 육아는 또 얼마나 잘하려고 할까? 일 하는 걸 보면 그 사람이 보여요. 애쓰는 게 보여서 언제부터 칭찬해주고 싶었어. 올 한 해 정말 고생 많았어요."


  갑자기 눈물이 고여 고개를 푹 숙였다. 집에서 직장에서 종종거리며 고군분투했던 지난 시간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이어서 선생님은 35년 직장인으로 살며 아이 키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되돌릴 수는 없지만 '아이에게 이렇게 했더라면......' 하는 반성과 고백 그리고 선생님을 뒤따라 그 길을 걷고 있는 나를 위한 응원과 조언이 뒤섞인 이야기는 앞으로 워킹맘으로 살아갈 나에게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엊그제 오랜만에 전화드려 선생님께서 해주신 이야기를 글로 작성하는 것에 허락을 구했다. 선생님은 여전히 우아한 목소리로 "그래 주신다면 제가 영광입니다." 하시며 웃어주셨다. 선생님의 전해준 이야기를 몇 가지 주제로 정리해 옮겨본다.




1. 교사 엄마의 특징

교육 시스템 안에 들어와 있어서 사례를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잘하는 아이들을 보며 '내 아이도 저만큼은 해야지'하는 기대감을 갖는다. 반면 평가는 냉정해서 아이들의 실수나 풀이 오류 등을 그냥 넘기기 힘들어한다. 완전히 반대가 되어야 한다. 기대는 낮추고, 평가는 후하게. 그게 아이를 살리는 방법이다. 


 얼마 전에 내가 '아이를 바라보는 기준이 좀 높은가?'하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정말 이 이유인 것 같았다. 학교에서 성격 좋고, 리더십도 있고, 예의 바른데 성적까지 좋은 학생을 보면 자연스럽게 '내 아들도 저렇게 자랐으면 좋겠다'하고 생각한다. 슬프게도 반대의 경우는 더 많다. 하다 못해 아이들 이름 지을 때도 특정 학생들을 떠올리며 최종 이름을 결정했으니 말이다.


2. 스마트폰이 대신할 수 없는 능력을 키워줘라

우리 아이들은 자라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살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 손에 스마트폰이 들려있는 세상이다. 앞으로는 많은 것들을 사람이 하지 않아도 되고, 직업의 종류도 지금과는 달라질 것이다. 스마트폰이 대신할 수 없는 능력을 키워줘라. 예를 들면 글씨를 바르게 쓰는 것, 잘 시간에 자고 일어날 시간에 일어나는 것, 외투를 정리하고 자기 옷을 개키는 것, 다 먹은 그릇을 스스로 정리하는 것. 이런 능력을 키워줘라. 부모는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일 뿐이다.


그동안 아이들을 잘 키워보겠다고 많은 육아서를 읽어왔다. 이 이야기는 대부분의 육아서에 공통으로 들어가 있는 내용이다. 요즘 출판되는 육아서를 읽을 리 만무한 선생님이시니 이 말이야 말로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 아니겠는가. 책에서 본 문장을 선생님의 목소리로 들으니 '명사와의 대화'를 하는 기분이었다. 다 실천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후로 지금까지 식사 후 자기 그릇은 자기가 정리하도록 했더니 아이들이 정말 잘하고 있다.


3. 가족은 늘 그 자리에

아이들은 한 번씩 왜 저러나 싶게 발광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아이들과 싸우지 마라.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누가 됐든 아이가 믿는 '가족'이 버티고 있으면 언제고 제자리로 돌아온다. 아이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이상한 걸 좋아하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한다고? 누구 원망할 것도 없다. 엄마, 아빠 닮지 누굴 닮나. '다 나 닮아서 그런 거다'하고 생각해라. 다만 아이가 기본은 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아이를 의심하지 말아라. 


평소에도 아이들과 대립할 일이 참 많다. 가끔 아들이나 딸이랑 말싸움을 하고 있으면 '내가 지금 애들이랑 뭐 하고 있나.'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또 뒤돌아서면 언제 문제가 있었나 싶게 싱겁게 끝나버리는 일이 대부분이다. 우리 아이들은 아직 어리지만 이 말을 기억해두었다가 아이가 정말 엇나갈 때, 내 마음 같지 않을 때,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릴 때. 그때 꼭 꺼내서 되새겨야겠다.



당시에는 좋은 말씀 잊지 않으려고 두서없이 메모해 놓았지만 언제든 꺼내 볼 수 있게 꼭 한 번 제대로 정리해놓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워킹맘들을 응원하며 다음 글에서 선생님의 따뜻한 응원과 위로의 이야기를 마저 풀어보려고 한다.



링크) 35년 워킹맘 선배가 후배 워킹맘에게 2편

https://brunch.co.kr/@island21s/20



이전 09화 손가락이 닮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