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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람 Sep 03. 2022

손가락이 닮았다

피는 못 속여

  엄마의 새끼손가락은 다른 손가락보다 유난히 짧다. 손톱은 짧고 납작해서 남들이 보면 손톱이 아니라 발톱 아니냐고 놀릴만한 못생긴 손이다. 기능상의 문제는 없지만 엄마의 손이 남다르게 생긴 것은 확실하다. 엄마가 난산 끝에 나를 낳고 정신이 들자마자 내 새끼손가락부터 확인했다고 하니 손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다행히 새끼손가락도 길고, 손톱도 길쭉한 네모 모양이라 엄마는 '감사합니다'를 외쳤다고 했다. 다만 아쉽게도 발은 피하지 못했다. 엄마의 가운데 마디가 없는 짧은 발가락과 하늘로 솟아 자라는 작은 발톱은 내 발에 고스란히 복제되었다. 발톱을 바짝 자르지 않 가족들 살이랑 부딪치기라도 하면…… 어휴, 치명상을 입힐만한 무기다. 나는 평생 발톱에 매니큐어를 바른 적이 없다. '이래 봬도 발톱입니다'하며 발톱 흉내나 내고 있는 조막만 한 네모 위에 매니큐어를 바른다면 글쎄. 컬러풀한 점이 하나 찍힐 거다.

 

  유전의 신비로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쩜 그렇게도 엄마 아빠의 좋은 점만 피해 가며 닮은 건지. 특히 엄마의 하얀 피부를 닮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쉽다. 엄마는 60대인 지금도 티끌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를 갖고 있다.(엄마 다리에는 다리털도 없다) 흐르는 세월에 못 이겨 주름은 졌지만 여전히 빛이 나는 하얀 피부는 주변의 이모들도 부러워한다. 애석하게도 나는 아빠의 짙은 쌍꺼풀 대신 까만 피부를 빼닮아 털도 많고, 이 나이까지 얼굴에 여드름이 난다. 그리고 아빠가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았을 '계절성 알레르기 비염'은 나와 동생의 유전자에 깊이 새겨졌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공기의 온도에 세 식구가 돌아가며 재채기를 했다. 재채기는 한 번 터지면 기본 십 회씩 반복한다. 에취!(아빠) 에취!(나) 에취!(동생) X 10회

 



  아이를 가졌을 때 뱃속의 아이가 누구를 닮았을지 정말 궁금했다. 그래 봐야 남편을 닮거나 나를 닮거나 혹은 둘을 조합해서 닮았을 텐데도 궁금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예쁜 곳만 골라 닮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서 속으로 빌었다. 내 비염은 닮지 않기를. 동그란 과 예쁜 은 남편을 닮고, 큰 랑 빨간 입술은 나를 닮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질없는 바람처럼 보이지만 그때는 꽤 진지했고, 매일 밤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주문을 외듯 바람들을 속으로 말했다.


  아이와 처음 마주했을 때 우리는 아이가 생각보다 작고, 빨갛고, 못생겨서 당황했다. 분명한 것은 아이가 나도 남편도 닮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젖살이 통통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자 아이가 누굴 닮았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온 가족이 웃었다. 아들의 얼굴이 시어머니와 쌍둥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하하. 아이를 가졌을 때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사람을 닮는다던데. 아닌데? 나 우리 시어머니 좋아하는데! 어머니는 본인이 봐도 손주가 너무도 본인을 똑 닮아 "내 얼굴이 남자 얼굴로는 괜찮은 얼굴이야." 웃으며 이야기하셨다. 그러면서도 내심 좋아하는 눈치다.


  한 번의 경험으로 우리는 유전자 조합이 우리의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깨달았다. 둘째를 가졌을 때는 첫째를 키우느라 주문을 욀 힘도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둘째는 쌍꺼풀 없는 큼지막한 눈에 날 닮은 코와 입술, 남편을 닮은 예쁜 손까지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크으, 성공이다! 조리원에서 남편과 요정 같은 딸을 안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런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것이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열두 번도 변한다는 사실을. 딸의 인형 미모는 50일쯤 지속되다가 지금은 어릴 적 내 모습을 복사해서 붙여놓은 -홍길동 분신술 저리 가라, 손톱 먹은 들쥐 저리 가라- 수준의 도플갱어로 자라고 있다.




  동생과 내가 말을 안들을 때 엄마는 "쟤는 누굴 닮아 저러는지 몰라"하다가도 예쁜 짓을 하면 "누굴 닮아 이렇게 예쁠까"했다.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누구에게서든 이유를 찾으려고 했던 그 말을 지금 내가 아이들에게 하고 있다. 물려받은 유전자는 어쩔 수 없다 치지만 말투나 걸음걸이, 자세나 태도, 성격까지 닮아가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웃음도 나고, 책임감도 느낀다. 야속하게도 닮지 않았으면 하는 내 모습은 여지없이 아이들에게 보인다. 그럴 때면 낯이 뜨거워지고 반성도 하지만 사람이 참 쉽게 바뀌질 않는다. 가끔 놀랄 만큼 엄마처럼 말하고, 엄마랑 똑같은 행동을 하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자식에게 비치는 부모의 흔적은 날이 갈수록 더 짙어지는 것 같다.


  어제는 친정에서 저녁을 먹고 소파에 누워 쉬고 있는데 엄마의 손톱이 눈에 들어왔다. 큰 아이 손톱을 잘라줄 때면 왼손 엄지 하나가 엄마랑 똑같이 생겨서 피식 웃고는 했는데 문득 두 손을 나란히 놓고 사진을 찍어두고 싶었다. 나도 동생도 닮지 않은 엄마의 우렁손톱이 (유난히 짧은 손톱을 '우렁손톱'이라고 하는데 엄마처럼 단지증과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대를 건너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아들에게 나타난 것이다.


아들의 엄지와 엄마의 엄지


  엄마가 그토록 나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손톱인데 큰 아이 손만 보면 엄마는 깔깔 웃으신다. "어쩌다 이런 걸 다 닮았을까"하시면서.




덧) 문득 아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우리의 흔적은 유전자 검사가 필요 없을 정도다. 얼마 전에 발견한 아들과 남편의 부자관계 99.999% 성립 지표.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아들의 오른팔과 남편의 오른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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