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세기말'에 대해 상상한다.
이 시대의 종말이 온다면 어떨까?
그런 날이 정말 올까?
아니, 그런 날이 있긴 한 걸까?
그렇다면 무슨 일 때문일까?
거부할 수 없는 자연재해? 지구의 멸망? 지구의 새 사이클을 위한 wipe out 같은 것?
혹은 외계인의 침략? 액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또라이, 혹은 천재 악당의 세계 정복을 위한 범죄?
아님, 치유가 없는 병의 전파? 좀비 같은 것?
또는 북한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엄청난 핵을 어딘가 떨어뜨리고 시작되는 제3차 세계대전?
뭐 또, 우주에서 갑자기 떨어진 거대한 유성에게 공격을 받게 되는 것? 아님, 성경책에서 나오는 종말 같은 것? 뭘까? 뭐가 될까?
그때 난 어떤 기분일까?
내가 알고 지내온 모든 것이 파괴되고 사라지고,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은,
이 지구에 더 이상 아름답고, 따뜻하고, 기억할 수 있고, 나눌 수 있고, 살아 숨 쉬는 것들이 없는 것,
이 지구가 사라진다거나 혹은 이 지구에 더 이상 '인간'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어떨까?
'그나저나, 난 그렇다고 쳐도, 우리 아이들, 우리 애들은 어떡하지?'
오전 열 시, 따뜻하게 토스트 된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올려 커피를 마시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주부의 머릿속에 끝도 없이 이어지는 종말에 관한 상상.
나의 종말에 관한 상상은 대개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지구의 멸망, 종말, 이런 것들을 갖다 붙이는 순간 머뭇거려진다.
아이들을 생각했을 땐 그런 슬프고 안타까운 결말은 싫다.
난 아이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자신 있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내가 느낀 지구와 이 세상, 이 세계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자신이 살 수 있을 만큼까지는 건강하게 오랫동안 살았으면 좋겠다.
캐나다의 학교에는 급훈이라는 것이 없다.
근데 우리는, 한국은, 왜 있을까?
이 세상에는 급훈이라는 것을 달아놓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나라가 얼마나 있을까?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개 성실하자, 정직하자, 공부 열심히 하자, 노력하는 사람이 되자, 착하게 살자, 지조 있는 사람이 되자 등등.. 많이 있었는데
물론 다 잘돼라고, 좋은 말들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급훈'이라는 것을 아이들의 눈길이 많이 닿는 교실 정 중앙에 아주 잘 보이게 붙여 놓는 것은 사실 명백하게
'아이들이라는 백지 종이에 이념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써 놓는 일', like brainwashing, 이 아닌가.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이념이 사회의 자유와 이념보다 더 중시되는 분위기의 캐나다가 그래서 급훈이 없을 수도 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성실한 사람이 되든, 도둑놈이 되든, 공부를 열심히 하든 안 하든, 정직하든 안 하든, 학교란 곳에서는 물론 공부 외에도 공중도덕, 사회성 등을 익히긴 하지만 개인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 '어떻게 하자, 어떻게 해라'라고 계속 세뇌당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념'이라는 것은 사실 인간이란 동물에게 가장 위험한 무기이다.
이념이라는 것은 다른 이념과 대개 다 잘 어울리지 못하고, 또한 그 이념을 너무나 깊고 짙게 파고들었을 때 그래서 그 이념이 다른 이념보다 더 우월하다 라는 생각이 들 때에 엄청난 파괴력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은 나쁘지 않지만 '사람의 이념'은 종종 나쁜 것이 되어 나쁜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이념이 없이는 무른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쉽고, 목적에 필요한 기본 개념을 상실할 수도 있고, 무언가를 성취해내고자 하는 데 있어 좋은 바탕을 만들어 낼 수 없기도 하다.
As parents, consciously, we teach what we know.
And unconsciously, we teach who we are.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잘 키우는 걸까?'라는 고민을 해 보지 않은 부모는 없을 것이다.
공부를 정말 잘할 수 있게 아이를 키운다면 그게 잘 키운 걸까?
아이가 가진 특별한 재능이 있을 때, 그것을 잘 다듬고 성장해서는 그것을 기본으로 잘 먹고살 수 있게 인도해주는 것이 좋은 부모일까?
아이들이 달라는 것, 원하는 것들은 그저 다 들어줄 수 있는 능력 있는 부모가 되면 아이를 잘 키우는 걸까?
아이들에게 상처 하나 내지 않고 온실 속의 화초처럼 극강 보호를 해서 아름답게 키워내면 성공한 걸까?
정말, 혹시, 이 아이가 나중에 뭔가 사회에 엄청나게 공헌을 하는 일을 하게 되면, 아님 돈을 엄청나게 벌면, 그럼 나는 애를 잘 키운 걸까?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닌데 나에게서 태어난 내 아름다운 아이들을 볼 때면 가끔씩 내가 완벽한 부모가 아닌 것에 대해 자괴감? 같은 것이 든다.
하지만 사실 완벽한 부모란 것은 세상에 없다, 라는 것을 안다.
그것보단 노력하는 부모가 완벽한 부모라고 하는 것이 더 옳다.
나에겐 '아, 난 커서 아이를 낳으면 우리 부모님 같은 부모가 될 거야.'하는 모델상이 없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고, 남들이 하는 거라... 서 나도 무조건 시키고 보는 부모가 되기 싫은 탓도 있고, 완벽하진 않지만 노력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졌으니
난 스스로 부모라는 존재에 대한 그 어떤 가이드라인, 목표점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아이들을 잘 키워낼 수 있게 나 스스로에게 쥐어주고 지킬 나만의 교훈,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도 경쟁과 발전의 속도가 빠른데 우리 아이들이 주역이 되어 살아갈 미래는 어쩌면 아주 큰 서바이벌 게임 같지 않을까, 라는 상상을 해 본다.
물론,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는 리얼리티 쇼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 아이들의 시대는 아마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보다 더 적을 수도 있고, 혹은 더 많을 수도 있고,
미래는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우리가 지금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것들이 창조될 수도 있으니,
우리의 2세들은 아마 우리가 성장해 오면서 겪은 변화들만큼 혹은 그보다 더 격렬한 변화를 겪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 아이들에게 어딜 가서든, 누구와 있든, 무엇을 하든, 그것을 잘 소화해 낼 수 있는 적응력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고, 사회성이 좋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고, 가진 특별한 재능이 있어 그것을 잘 다듬어내는 것도 중요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2세를 만들고 사회를 계속 이어나가게 만드는 받침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다 균형 있게 잘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에게, 우리 아이들에게 참 많은 것을 원하는 사회에, 그리고 미래엔 아마 더 많은 것을 원할 사회에 그만큼 부응하고 살기 위해,
그리고 꼭 기대치만큼 살지는 않더라도 그 사회에 대한 희망은 갖고 살기 위해,
살면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크게 당황하고 힘들어하지 않고 박차고 나갈 힘은 늘 갖고 살기 위해,
막말로,
궁에 가서 가장 고귀한 사람들과 어울리라면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어도 마치 귀족으로 태어난 것 마냥 우아해질 줄도 알고
공사판에 던져지면 고되더라도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패기를 보여줄 줄도 알고
바다에 가면 수영할 줄 알고, 산에 혼자 남겨지면 구조대가 나타날 때까지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지식과 체력이 있고,
캐나다에서 편하고 자유롭게 지내다가도 한국에 가면 정중하고 깍듯한 매너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적응력.
어디 가서든 굶어 죽지는 않고,
기본적으로 사랑받고 관심받고,
인생의 어두운 곳보다는 밝은 곳에 머무를 줄 아는 그런 적응력.
자연을 들여다보면 그렇다.
어미새는 알을 낳기 위해 둥지를 만들고 그곳에 알을 부화시켜, 애기 새가 언젠간 혼자 날아가 먹이를 구해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길러준 다음, 높은 둥지 밑에서 아이 새를 떨어뜨려 날 수 있게끔 유도한다.
우리도 그렇다, 내 새끼라고 언제까지 품에 안고 살 수는 없다.
내 아이들도, 당신의 아이들도,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아이들도 언젠가는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다 정든 둥지를 떠나 혼자 날아야 할 시기가 온다.
그리고 우리는 부모로서,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나갈 사회의 현재 구성원으로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고만큼만 해주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