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5)
'한국사람들만큼 무언가 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어제보다 오늘 못하면 어때?
잘 나가는 고속도로 가다가 좀 덜컹거리는 길을 천천히 가면 좀 어때?
왜 남들보다 잘 사는 게 인생의 목적이 돼야 하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왜 나빠?
라는 생각이 든 건 정확히 언제인진 모르겠지만 캐나다에 온 2007년 3월 말부터 첫 아이를 낳은 2009년 5월까지 약 2년간은, 그러니깐, 스물셋부터 스물 다섯 때까지.. 당시, 난 나보다 훨씬 바쁘고 알차고 박진감 있게 잘 사는 것만 같이 보이는 주위의 아는 모든 사람들을 보며 느끼던 열등감과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제대로 쓰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변명 같지만 난 그때 글이 안 써졌다,라고 얘기하고 싶다.)
세상에 마치 나 혼자 살아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윌 스미스가 주연한 영화, 'I am Legend'라는 영화에서처럼, 이 세상에 마치 혼자 남겨진 마지막 인간처럼...
사실 당시 제이가 출장을 자주 가야 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 난 종종 그때 살던 Charing Cross(채어링 크로스)의 집에 홀로 갇혀(차가 없이는 인근 타운으로 나갈 수가 없는 완전 시골 동네!) 아는 사람도 없고, 인터넷도 안되고(모뎀이 있었는데 전화줄을 끊고 인터넷에 오래 접속해 있을 수가 없잖아요.. 속도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느렸죠.) 제이와 함께 있으려고 유학이고 뭐고 한국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캐나다에 와 있는데 정작 그는 평일에 일하느라 집에 돌아올 수가 없으니 (것도, 돈을 벌어야 하니깐 또 불평할 수 없었죠.), 집에 오고 가는 사람도 없고, 정말 근처에 나갈 데도 없고 하니(전부 논 밭!)..
생각해보면 정말 내키는 대로 살았다. (OH how I miss this!!)
키우던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하루 종일 속옷도 입지 않고 집안을 어슬렁 거리기도 했고, 어떤 날은 작정하고 침대에서 나오지 않고 하루 종일 자고, 책 읽고, 영화 보고, 조금 먹고, 그러다 지치면 뒷마당에 나가서 밤에 모닥불을 피고, 새벽 두 시에 에어로빅을 하고, 밤새서 플레이 스테이션 3 게임을 하고, 하루 종일 소파에 옆으로 누워 미국 드라마를 보고, 낮에는 밤처럼 자고, 그가 돌아오는 주말이면 침대에서 아예 나오지 않은 날도 있었다.
(I guess it was like heaven!!)
그렇게 사는 것이 의미 없고 무료하고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면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생각해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그때가, 글을 써야 하는데 글을 쓰지 않는다고 자책하고, 제이가 없인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인간이라는 상실감을 느꼈을 때가 사실 지금 돌아보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더 나다운 나를 만든 '밑 물 작업의 시간들'인 것 같다.
Because now I know that I needed that time to be me of today.
케이블도 들어오지 않던 치어링 크로스에서 TV 안테나로 수신해 볼 수 있었던 몇 개의 채널 중에는 미국의 공영방송이며 교육방송인 PBS가 있었다.
( "I love me some PBS!")
PBS안에서도 미국의 다른 지역에 따라 그 안에 몇 개의 다른 채널이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Creative(크리에이티브)'라는 채널이 있다. 이 채널은 생활과 밀접한 실제로 우리 삶에 많이 필요한 기술들과 요리, 여행 등에 관한 프로그램들만으로 24시간 방송을 내보내는데 미국에서는 이 채널에 요리쇼를 내보내는 셰프나 레스토랑 오너들의 명성은 실제로 엄청나다. 그리고 그만큼 검증되고 실력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자신의 주방에서 요리하는 것을 보여주는 식의 쿠킹쇼가 많은 편이다.
제이가 일을 가고 없는 평일이면 집 안엔 늘 참을 수 없는 적막함이 돌았고, 난 그것이 못 견디게 싫어 TV를 하루 종일 틀어놓았다. 그 때 무엇보다 많이 본 프로그램들은 바로 이 채널이다.
미국음식, 프랑스음식, 이탈리아음식, 스페인 음식, 타이음식, 중국음식, 한국음식(Kimchi Chronicle, 김치 크로니클 이라해서요, 미국의 굉장히 유명한 셰프인 Jean-Georges의 아내이자 어렸을 때 미국으로 입양된 Marja라는 분이 만드신 한국음식을 굉장히 재밌고 유익하게 잘 소개시켜준 프로그램이 있어요.), 아이슬란드 음식, 멕시코 음식 등부터 시작해 홈 베이킹 까지, 요리에 관한 모든 다양하고 알찬 프로그램들이 나왔지만 그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한 쇼는 줄리아 차일드(Julia Child)와 잭 페펜(Jacque Pepin)의 'Cooking at home(쿠킹 앳 홈, 유튜브에 가셔서 검색하시면 찾아 보실 수 있어요!))'과 리디아 바스티아니쉬(Lidia Bastianich)라는 이탈리안 셰프의 Lidia's Italy(리디아의 이탈리아)'라는 프로그램이었다.
메릴 스트립이 열연한 영화 Julie&Julia(줄리&줄리아)의 주인공이자 실제 인물인 줄리아 차일드는 1960년대부터 시작해 아직 식문화가 활발히 발달하지 못한 미국 땅에서 프랑스 전통 요리 학교인 '르 코르동 블루(Le cordon Bleu)'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와 자신의 집 주방에서 찍은 'French Chef(프렌치 셰프)'로 많은 미국인에게 대중적이고 쉬운 프랑스 요리 기술을 전파한 선구자로 생애를 마감하기 까지 많은 미국인에게 'Master Chef(마스터 셰프)'라고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고 2004년 생을 마감하셨다.
(죽기 전에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저에게는 오프라 윈프리와 줄리아 차일드, 바락 오바마가 있죠! 아쉽게도 줄리아는 볼 수 없지만... 그녀가 남긴 쇼와 레시피들이 제게는 있답니다!)
아직 프랑스도 이탈리아도 가보지 않은 나의 음식 정체성.
I guess I am a woman with many herit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