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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딥그린 Sep 26. 2023

10 앞치마를 버리다

-하루에 하나씩, 물건과 이별하기




한 때 앞치마를 한 내 모습을 사랑했다.


일부러 귀여운 앞치마를 사보기도 하고, 기분 좋은 타월 소재로 된 앞치마를 구입한 적도 있었다.

식기세척기를 사용하지 않았을 땐, 설거지를 할 때마다 옷에 튀는 물 때문에 앞치마가 매우 요긴했다.

앞치마를 단단히 묶으며 자, 이제 주방 일을 시작해 보자! 하고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일을 시작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요즘 난, 손으로 설거지를 거의 하지 않아 앞치마는 고이 접어 서랍 속에 넣어둘 때가 대부분이다.

외식보다는 집에서 요리해 먹는 것을 좋아하지만, 대부분 조리법이 심플하기 때문에 요리할 때는 굳이 앞치마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주방에서 일하다 손에 뭍은 물기는 작은 타월이나 엄마가 잘라서 만들어준 소청을 즐겨 사용하고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최근에 내가 앞치마를 한 건 언제였더라.

아, 시가에 가서 김장을 할 때, 그리고 명절에 시가에 가서 설거지를 할 때. 그때였던 것 같다.


곧 추석인데. 결혼을 한 후 명절은 기쁘고 즐겁다기보다는 막막하고 얼른 후딱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그런 날이 되어버렸다.

시가에 가면 집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부엌을 종종거리기 바쁘고, 가끔 거실에 앉아 TV를 보다가도 시어머니가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나도 따라가야 하나, 무얼 해야 하나 마음이 바빠지기 일쑤다.

시가의 남자들은 음식 세팅하는 것을 돕고, 의자 배치하는 것과 상 펴는 것 들을 하지만 설거지는 하지 않는다.

설거지와 요리는 온전히 여자들의 몫.

언젠가 한번, 남편의 형이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다가 어머니의 눈총을 받은 일이 있었다.


나는 키보드를 많이 사용하는 일을 하고 있어, 손목과 손가락을 아끼는 편이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사용할 때도 손목에 신경을 쓰며 일을 하고는 한다.

손 설거지를 하지 않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기도 하다.

설거지를 할 때 손에 힘을 주어 박박 닦고, 무거운 그릇을 들고 헹구며 손목에 무리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조금 더 효율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나는 손설거지를 거부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일 년에 몇 번이나 시가에 가서 일을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넘기기엔 답답할 때가 종종 있다.

더한 집도 있다고. 명절마다 고속도로를 몇 시간씩 달려가야 하는 집도 있고, 일 년에 제사가 몇 번인 집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니, 타인과 비교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타의에 의해 내 삶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이리저리 휘둘리고 끌려다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서글플 뿐이다. 

나는 손목이 좋지 않아서, 이것 말고 다른 일을 할게. 더 힘든 일이어도 괜찮아.

이렇게 논의하고 타협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게 갑갑할 뿐이다.

내가 그 말을 한다면 어떤 말들이 되받아쳐 쏟아질지 알기 때문에.

이제는 알기 때문에.


부엌 서랍을 정리하다 나는, 하나 남은 앞치마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내가 사는 이 집에서는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을 서성이는 것보다 

더 즐겁고 유쾌한, 그게 아니라면 평온하고 쉼이 있는 그런 시간을 모두가 함께 갖는 게 더 중요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렇게 살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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